6피트 가까운 장신,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죄수를 생각나게 하는 짧게 깎은 머리, 깊은 슬픔이 드리운 야위고 거친 얼굴을 가진 위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지휘자였던 최후의 거인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러시아의 세미요노바에서 태어나서, 1943년 3월 28일 미국 비버리·힐즈에서 작고한 러시아의 대·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겸, 작곡가이다. 아홉 살 때 페테르스부크 음악원에서 수학한 다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 작곡, 대위법을 배웠다. 1887년 그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덕분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은 20세기 최고의 후기 고전주의 작곡가라는 타이틀로 인해 이제는 전설 속에 묻혀 버렸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1897년 최초의 교향곡이 실패하자 노이로제에 걸렸으나 다르 박사의 심리요법을 받고 회복하여 피아노 협주곡 제2번으로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1902년 많은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촌 여동생인 나탈리아·사티나와 결혼했으며, 피아노·작곡·지휘의 세 장르에서 활약했다. 1917년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RCA를 통해 녹음도 하였다. 그는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피아니스트로서는 큰 장점이었으나, 반면에 고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옥타브를 연주할 때 손이 삐어져 나오는 것은 큰 장해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에 옥타브의 패시지가 극히 적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종종 협연을 하였는데, 이는 콧대 높은 레오폴트·스토코프스키도 라흐마니노프에게만은 순종했기 때문이기에 가능했다. 그와 지휘자 프리츠·라이너와의 불화는 음악계의 에피소드로 남을 정도이다. 그는 말 수가 적었고, 기교적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이는 동시대의 또 한명의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인 이고르·스트라빈스키( 키가 작고 수다스럽고, 자작곡인 경우 피아노 연주도 잘하는 20세기를 뒤흔들게 한 혁신적인 작곡가)와는 비록 미국에서 같은 비버리힐즈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 거의가 왕래가 없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음악에 역행해 나가는 스트라빈스키와는 평생 말 한마디 없을 정도로 싫어했을 만큼 고집이 셌다. 그의 음악은 생전에도 4개의 피아노 협주곡(특히 2번과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특히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꼽혔으며 소란스러웠던 6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후에는 협주곡 이외의 곡들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전주곡의 경우 '위대한 전주곡'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1942년-1943년 시즌이 최후의 연주회가 되었다. 그는 1943년 2월 17일 녹스빌에서 최후의 콘서트를 한 직후 쓰러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암으로 판명되었고 그 후 끝내 다시는 연주회를 가지지 못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장송행진곡)을 즐겨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그의 주된 콘서트 연주곡목이었다.) 그의 연주는 RCA를 통해 10장의 음반이 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크라이슬러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으나, 베토벤 소나타 전곡의 녹음은 계획만으로 끝나 버려 무척이나 아쉽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y Rakhmaninov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y Rakhmaninov
(러시아 1873.4.1-1943.3.28 미국)
6피트 가까운 장신,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죄수를 생각나게 하는 짧게 깎은 머리, 깊은 슬픔이 드리운 야위고 거친 얼굴을 가진 위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지휘자였던 최후의 거인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러시아의 세미요노바에서 태어나서, 1943년 3월 28일 미국 비버리·힐즈에서 작고한 러시아의 대·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겸, 작곡가이다. 아홉 살 때 페테르스부크 음악원에서 수학한 다음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 작곡, 대위법을 배웠다. 1887년 그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 덕분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은 20세기 최고의 후기 고전주의 작곡가라는 타이틀로 인해 이제는 전설 속에 묻혀 버렸다. 작곡가로서의 그는 1897년 최초의 교향곡이 실패하자 노이로제에 걸렸으나 다르 박사의 심리요법을 받고 회복하여 피아노 협주곡 제2번으로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1902년 많은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촌 여동생인 나탈리아·사티나와 결혼했으며, 피아노·작곡·지휘의 세 장르에서 활약했다. 1917년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RCA를 통해 녹음도 하였다. 그는 거대한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피아니스트로서는 큰 장점이었으나, 반면에 고민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옥타브를 연주할 때 손이 삐어져 나오는 것은 큰 장해였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작품에 옥타브의 패시지가 극히 적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종종 협연을 하였는데, 이는 콧대 높은 레오폴트·스토코프스키도 라흐마니노프에게만은 순종했기 때문이기에 가능했다. 그와 지휘자 프리츠·라이너와의 불화는 음악계의 에피소드로 남을 정도이다. 그는 말 수가 적었고, 기교적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이는 동시대의 또 한명의 위대한 러시아 작곡가인 이고르·스트라빈스키( 키가 작고 수다스럽고, 자작곡인 경우 피아노 연주도 잘하는 20세기를 뒤흔들게 한 혁신적인 작곡가)와는 비록 미국에서 같은 비버리힐즈에 살고 있었지만 서로 거의가 왕래가 없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음악에 역행해 나가는 스트라빈스키와는 평생 말 한마디 없을 정도로 싫어했을 만큼 고집이 셌다. 그의 음악은 생전에도 4개의 피아노 협주곡(특히 2번과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인기를 모았다. 특히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최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꼽혔으며 소란스러웠던 6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경안정제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후에는 협주곡 이외의 곡들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전주곡의 경우 '위대한 전주곡'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1942년-1943년 시즌이 최후의 연주회가 되었다. 그는 1943년 2월 17일 녹스빌에서 최후의 콘서트를 한 직후 쓰러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암으로 판명되었고 그 후 끝내 다시는 연주회를 가지지 못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장송행진곡)을 즐겨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그의 주된 콘서트 연주곡목이었다.) 그의 연주는 RCA를 통해 10장의 음반이 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크라이슬러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으나, 베토벤 소나타 전곡의 녹음은 계획만으로 끝나 버려 무척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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