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특집극 를 선보이긴 했지만 미니시리즈로 치자면 이후 2년이 흘렀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된 동력은 어디서 왔나.
‘심한 좌절’이 동력이었다. (웃음)
나는 외국드라마를 거의 안 보던 사람이다.
예전에 를 잠시 보고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섹스만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다
쉬는 동안 와 등 외국드라마를 챙겨보면서
솔직히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연애를 하면서도 수사를 하면서도,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철학을 하고 있었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진지했다.
물론 드라마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다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단지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와 삶의 본질을 기막히게 비벼내더라.
저 작가에 저 감독에 저 배우에 저 시청자라니!
문화적 충격을 넘어
드라마가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멸감에 빠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봤다.
어떻게 그 충격에서 벗어났나
그러다가 눈을 부릅뜨게 됐다.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심리학책, 철학책을 파기 시작했다.
드라마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질에 다가가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판이 그동안 가진 것 없는 노희경을 먹여살렸으니
계속 공부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고민의 끝에 뭐가 있었나.
지금껏 내가 써왔던 대사들을 보게 되었다.
“날 잊어줘”, “이해해줘” 같은,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썼던 대사들까지
혼란스러웠다.
그게 내가 잊어달란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간 포장을 하느라 본질을 이야기할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노희경표 명대사] 를 기대하는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드라마를 써오고 그 대사들을 기억하는 팬들을 보면서,
나 역시 할 수 있는 대사,
아름다운 대사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작가는 인상적인 대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지.
그런데 어느 날 TV를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 드라마에서 온갖 아름다운 대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나는 저렇게는 못 쓰겠다, 느낄 만큼 휼륭한 대사들이었다.
그런데 그 눈부신 대사를 듣는데 이상하게 쓸쓸하고 허전했다.
예전에 선배 PD들이 날 보고
“넌 오만방자해, 넌 테크니컬해, 넌 자아도취야, 너는 마스터베이션하고 있는 거야”라며 충고했을 때는
흥, 했던 말들이
희미하게 무엇인지 알겠더라.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요즘은 그냥 지나가는 대사가 좋아졌다.
대신 배우나 연출에 훨씬 많이 기대게 되고, 그런 여유가 더 좋은 연기나 연출을 끌어내는 것 같아 기쁘다.
정감가는 노희경표 캐릭터들은 눈에 익지만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수희가 계속 받게 되는 정체 모를 문자메시지처럼 추리 요소도 긴장감을 주고, 영숙의 환영이나 과거의 플래시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앞서 말했지만
추리 요소는 나 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고 좋은 외국드라마 그대로 베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웃음) 내 색깔과 내 방식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추리’라는 사고 전개는
결국 무언가가 일어난 심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경우를 볼 때
성격이 고집불통에 교만해진 이유에는
어린 시절 무시받았던 상처가 있었던 식으로.
그렇다면 나는 사건의 추리가 아니라
심리의 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멜로에 다중스토리로 얼개를 짜게 되었다.
물론 반응(시청률)을 보면서 여전히 멀었구나 했지만. (웃음)
대신 1년 공부해서 안 해본 거 해보려고 한 거니까,
앞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은 생겼다.
“첫사랑은 처음이란 뜻밖에 없는 건데,
텔레비전 보면 온통 첫사랑 때문에 목매는 거
비현실적이라 싫었거든.
두번, 세번 사랑한 사람들은 헤퍼 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이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 영숙과 미리의 대화 중
총 16회로 이제 막 반환점을 돈 KBS 미니시리즈 는
주인공들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꽉 차는 드라마다
설치미술가에 바텐더, 건설회사 직원에 밥집 아줌마까지
그들을 직업군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힘들고,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한 청년과
하자투성이 ‘나쁜 놈’을 조건없이 사랑하게 된 아가씨와
젊은 날 준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한 채 시체처럼 살아가는 중년 여자의 애절한 러브스토리
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는 그보다
저마다 “죽어도 말 못할” 과거에,
저마다 하나씩의 거짓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힘들게 시작한 고해성사 같은 드라마다.
지안(이한)도, 영숙(배종옥)도, 민호의 엄마(정애리)도, 대부분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화해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숙이는 길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먹고 도둑질을 하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거를 잊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소문난 효녀였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간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내가 어떻게 밥을 먹어’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엄마보다 오래 살고 있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죽은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살아 나왔을 때
모든 가족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던 표정은
‘아, 또 시작이구나’였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엄마가 죽기를 바랐다.
내가 진짜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건
거로 돌아가 그 순간의 나와 대면했을 때였다.
여전히 그 시절의 나는 부끄럽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주인공 모두 환자 같고 의사 같다. 서로의 치유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하고.
모두 과거에 대해 변명하고
그것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것이 합리화가 될지라도.
우리는 가끔 지나간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나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 현재와 만날 수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적에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학교 공중전화를 거꾸로 해서 동전을 빼는 식이었는데
이후 DDD전화기가 나오면서 장비가 필요하게 되어서 힘들었다. (웃음) 그런데 그때는 그게 죄인지 몰랐다.
나는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지했다.
하지만 지나간 나를 욕해도 그건 이미 과거다.
변명하고 싶으면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으면 합리화를 하라고 하고 싶다.
단
지금,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다.
미리(김민희)와 호철(이재룡)
민호(천정명)와 미영 할머니(나문희)
“우린 남에게보다 늘 자신에게 더 가혹하다.
당연히 힘든 일인데
자신을 바보 같다고 미쳤다고 미워하고,
남들도 욕한 나를
내가 한번 더 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는 가슴에,
누군가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 우리가 얻으려 하는 건
대체 뭘까?
사랑?
이해?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 미리의 내레이션
노희경 작가의 캐릭터 사랑을 넘어선 배우에 대한 애정은
시절, 주인공들의 사진을 집 벽에 붙여놓고
“잘 잤니? 재호야, 밥먹었어? 신영아” 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상상 가능할 것이다.
‘만학도’ 노희경의 단짝 학우인
나문희, 배종옥, 이재룡은 물론이고
천정명, 윤소이, 이한 등
제 몫 하는 어린 배우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김민희,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 윤유선까지
역시 실로 배우들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
미영 할머니 역의 나문희는 대사 한마디 없이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휼륭하게 지켜낸다. 말갛게 쳐다보는 눈빛이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 하나만으로도 완전 무장해제 당할 정도로.
나문희 선생님과의 인연은
데뷔작 부터 시작되었는데
건강할 때의 우리 어머니 모습하고 너무 비슷하신 분이다.
이 배우가 사랑스러운 건
그 경력에도 여전히 생짜라는 거다.
아직 매 순간순간이 서투르다.
나는 귀신같이, 무당같이 연기하는 배우가 무섭다.
그래서 나문희 선생님의 설익은 모습이 좋다.
농염하고 완숙하면 곪아버리는 단계밖에 안 남은 거니까.
대부분 그 나이쯤 된 배우들은 어느 정도 이야기하면
“그래, 무슨 말인 줄 딱 알겠어”라고 하지만
나문희 선생님은 한결같이
“고민할게, 연구할게”라고 말하신다.
이 역을 제안했을 때도
“이 사람 말간 느낌이 나야 하는데 내가 너무 탁해졌어.
그래도 고민할게”라고 하셨다.
배역의 집중도가 너무 심해서
미영 할머니처럼 현장에서 거의 말을 안 하신다고
스탭들이 걱정할 정도다.
김민희는 ‘이정재의 여자친구’라든지, 패셔너블한 연예인으로서는 인식됐지만, 어느 순간 배우로서는 암묵적인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처럼 보였다. 는 김민희란 배우만 놓고 봤을 땐 실로 ‘부활’ 혹은 ‘탄생’의 드라마다.
처음엔 이 배우를 잘 몰랐다.
우연히 모임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참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기민수 PD와 캐스팅을 놓고 고민하던 중 이름이 거론되었고
그럼 한번 만나는 보자, 고 해서 봤는데
솔직히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라.
두 번째 봤을 때 한 시퀀스 정도 준 것뿐인데
혼자 미리라는 캐릭터를 연구해서 왔더라.
정형화된 연기는 아닌데 날것의 느낌이 신선했다.
그러던 어느 밤
김민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우가 먼저 전화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용기를 냈을 것이다.
미안하게도 당시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남자배우 캐스팅 때문에 보류상태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기다려야겠네요. 하하.” 분명 웃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김민희는 전화기 너머 그전부터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천정명이 캐스팅되면서 김민희가 합류하게 되었다.
10회에서 호철(이재룡)이 딴 여자와 혼인신고한 것을 듣고
처음으로 분노하는 장면을 편집실에서 보면서
이제 이 녀석 배우 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이제 민희 얼굴 보기 힘들겠네”라고 농담을 했더니
부끄러워하더라. (웃음)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다.
한 남자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람도 있다.
왜 우린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못할까?
그래서 왜 이 순간의 행복을 끝없이 방해받을까?”
- 수희의 내레이션
또 하나의 드라마를 세상에 내놓았다. 품고 있던 자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만감이 교차 할 것 같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작가적 한계를 많이 느꼈다.
더이상 대본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일단 1차 대본 마무리를 하고 나서는
내가 나를 칭찬하고 있다.
대본은 안 밀리고 줬고(웃음)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의 열정을 쓰다듬어주었다.
가진 거 퍼먹은 게 아니라
공부해서 먹고산 것 같아서 뿌듯하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건 늘 고통스러운데,
질문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스스로 칭찬하는 거다.
이번엔 이 정도밖에 안 됐지만 다음에 더 잘할 거다.
대신 실수한 건 잊지 말고 기억할 테고.
오랜 파트너였던 표민수 감독이 현재 MBC에서 를 연출 중이다. 서로 모니터를 해주고 있나.
표 감독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이다.
지금은 한창 바쁘니까 주로 표 감독 부인과 통화를 한다.
다시 함께 작업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일단
올 겨울에 데뷔작인 을 연출해주셨던
박복만 PD와 단막을 한편 할 계획이고,
이후엔 표 감독과 미니시리즈를 할 예정이다.
2년 뒤쯤?
어쩌면 더 이후가 될 수도 있다.
작가가 방송 전에 100% 완작을 해야 연출도,
배우도 고민할 시간이 있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미완성의 작품을 내놓기에는
이제 핑곗거리가 떨어졌다. (웃음)
적게 먹고, 소박하게 살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7년 전 이 끝나고 처음 보았던 모습보다 더 야위긴 했지만 훨씬 편안해 보인다.
가족 때문일 거다.
10년을 혼자 살다가
처음 아홉 식구에 편입되고 나서는 힘들었다.
초반에는 만날 짜증나서 울었다. (웃음)
하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정말 행복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특히 중·고등학교 다니는 조카 녀석들에게
많이 배우고 산다.
마냥 애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녀석들에게 고민 상담을 할 정도다.
얼마 전에 시청률이 잘 안 나오는 게 맘 상해서
조카에게 “속상하다”고 했더니 그 녀석이 이러더라.
“음… 먼저 고모가 시청률에 연연해한다는 사실이 정말 의외야.
그런데 일단, 자요, 자고 얘기해….”
나는 예전에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무시했다.
5살만 어려도 그 배우하고는 말도 안 하고
‘애들은 다 빠가(바보)야’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내가 바보였고,
그렇게 빠가 같았던 나를 미워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 역시도 치졸한 부분이 있고
그 아이들 역시 완숙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나도 나이 들고 싶다,
나이 들면 누나처럼 그렇게 명쾌해지나?”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
- 민호와 영숙의 대화 중
는
20대 젊은 연인부터 중년의 남녀 그리고 노년의 어머니까지
여러 세대의 주인공들이 고루 이야기의 키를 쥐고 간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른의 입장이 되어 충고하기보다는
아이가 되어 계속 질문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 보인다.
10여년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이야기하던
애늙은이 서른살 작가는
이제
“흔들릴까?” “다리냐 흔들리게?”
“수희가 택배도 아니고 보내긴 어딜 보내”
“지켜? 감기로부터 지켜?”처럼
흔히 쓰는 단순한 대사들이 왜 시작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신인 같은 마흔살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묻고,
우리는 그 순진무구한 물음에 대답을 찾지 못해
번번이 멍하니 맥을 놓고야 만다.
지금 노희경의 드라마는 무덤이 아니라 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완숙한 어른이 아니라 점점 더
‘생짜’가 되어간다.
이 동행길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비단 당신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글//백은하 기자
출처 : http://blog.naver.com/111audals/120024202849
CINE21 - 드라마작가 <노희경> 인터뷰
CINE21 - 드라마작가 인터뷰
“거기 떡볶이 집이 아직 있으려나?”
의 대본을 마치고 이 있는 마포로
노희경 작가를 불러냈을 때만 해도
우리의 발걸음이 공덕시장 어딘가를 어슬렁거리게 될지는 몰랐다.
“예전에 이 동네에 배가 들어왔거든요.”
의 배경이 되었던 마포의 선술집 언덕,
선원들을 상대했다는 ‘삐어홀’(맥주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그 공간엔 이제 고층 아파트들만이 빽빽하게 서 있다.
“지독하게도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와
“너무 순해서 가슴이 아팠던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고 응석을 부렸던 마포 토박이 소녀는
“오랜만에 왔더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며
옛 동네를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짧은 머리에 마냥 소년 같은 모습이지만
그러고보니 노희경 작가도 이제 마흔이다.
그녀가 마흔 나이에 써내려간 는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같은
따로 액자를 해놓아도 좋을 선언적인 대사는 줄었지만,
극 안에서 오가는 생기있는 대사의 호흡은
그 어느 작품보다 찰지다.
다중인물을 내세우고 추리 형식을 더한
는 기존 노희경의 팬에게나 보통의 시청자에게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다.
봄이 오는 마포,
연기 자욱하게 깔린 시장통 생선구이집에서
낡은 호텔 커피숍으로 이어졌던
에 대한 혹은 작가 노희경에 관한 이야기.
나는 외국드라마를 거의 안 보던 사람이다.
예전에 를 잠시 보고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섹스만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다
쉬는 동안 와 등 외국드라마를 챙겨보면서
솔직히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연애를 하면서도 수사를 하면서도,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철학을 하고 있었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진지했다.
물론 드라마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다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단지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와 삶의 본질을 기막히게 비벼내더라.
저 작가에 저 감독에 저 배우에 저 시청자라니!
문화적 충격을 넘어
드라마가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멸감에 빠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봤다.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심리학책, 철학책을 파기 시작했다.
드라마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질에 다가가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판이 그동안 가진 것 없는 노희경을 먹여살렸으니
계속 공부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날 잊어줘”, “이해해줘” 같은,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썼던 대사들까지
혼란스러웠다.
그게 내가 잊어달란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간 포장을 하느라 본질을 이야기할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역시 할 수 있는 대사,
아름다운 대사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작가는 인상적인 대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지.
그런데 어느 날 TV를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 드라마에서 온갖 아름다운 대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나는 저렇게는 못 쓰겠다, 느낄 만큼 휼륭한 대사들이었다.
그런데 그 눈부신 대사를 듣는데 이상하게 쓸쓸하고 허전했다.
예전에 선배 PD들이 날 보고
“넌 오만방자해, 넌 테크니컬해, 넌 자아도취야, 너는 마스터베이션하고 있는 거야”라며 충고했을 때는
흥, 했던 말들이
희미하게 무엇인지 알겠더라.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요즘은 그냥 지나가는 대사가 좋아졌다.
대신 배우나 연출에 훨씬 많이 기대게 되고, 그런 여유가 더 좋은 연기나 연출을 끌어내는 것 같아 기쁘다.
수희가 계속 받게 되는 정체 모를 문자메시지처럼 추리 요소도 긴장감을 주고, 영숙의 환영이나 과거의 플래시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추리 요소는 나 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고 좋은 외국드라마 그대로 베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웃음)
내 색깔과 내 방식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추리’라는 사고 전개는
결국 무언가가 일어난 심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경우를 볼 때
성격이 고집불통에 교만해진 이유에는
어린 시절 무시받았던 상처가 있었던 식으로.
그렇다면 나는 사건의 추리가 아니라
심리의 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멜로에 다중스토리로 얼개를 짜게 되었다.
물론 반응(시청률)을 보면서 여전히 멀었구나 했지만. (웃음)
대신 1년 공부해서 안 해본 거 해보려고 한 거니까,
앞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은 생겼다.
“첫사랑은 처음이란 뜻밖에 없는 건데,
텔레비전 보면 온통 첫사랑 때문에 목매는 거
비현실적이라 싫었거든.
두번, 세번 사랑한 사람들은 헤퍼 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이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 영숙과 미리의 대화 중
총 16회로 이제 막 반환점을 돈 KBS 미니시리즈 는
주인공들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꽉 차는 드라마다
설치미술가에 바텐더, 건설회사 직원에 밥집 아줌마까지
그들을 직업군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힘들고,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한 청년과
하자투성이 ‘나쁜 놈’을 조건없이 사랑하게 된 아가씨와
젊은 날 준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한 채 시체처럼 살아가는 중년 여자의 애절한 러브스토리
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는 그보다
저마다 “죽어도 말 못할” 과거에,
저마다 하나씩의 거짓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힘들게 시작한 고해성사 같은 드라마다.
화해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숙이는 길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먹고 도둑질을 하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거를 잊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소문난 효녀였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간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내가 어떻게 밥을 먹어’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엄마보다 오래 살고 있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죽은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살아 나왔을 때
모든 가족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던 표정은
‘아, 또 시작이구나’였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엄마가 죽기를 바랐다.
내가 진짜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건
거로 돌아가 그 순간의 나와 대면했을 때였다.
여전히 그 시절의 나는 부끄럽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것이 합리화가 될지라도.
우리는 가끔 지나간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나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 현재와 만날 수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적에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학교 공중전화를 거꾸로 해서 동전을 빼는 식이었는데
이후 DDD전화기가 나오면서 장비가 필요하게 되어서 힘들었다. (웃음) 그런데 그때는 그게 죄인지 몰랐다.
나는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지했다.
하지만 지나간 나를 욕해도 그건 이미 과거다.
변명하고 싶으면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으면 합리화를 하라고 하고 싶다.
단
지금,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다.
미리(김민희)와 호철(이재룡)
“우린 남에게보다 늘 자신에게 더 가혹하다. 당연히 힘든 일인데 자신을 바보 같다고 미쳤다고 미워하고, 남들도 욕한 나를 내가 한번 더 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는 가슴에, 누군가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 우리가 얻으려 하는 건 대체 뭘까? 사랑? 이해?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 미리의 내레이션 노희경 작가의 캐릭터 사랑을 넘어선 배우에 대한 애정은 시절, 주인공들의 사진을 집 벽에 붙여놓고 “잘 잤니? 재호야, 밥먹었어? 신영아” 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상상 가능할 것이다. ‘만학도’ 노희경의 단짝 학우인 나문희, 배종옥, 이재룡은 물론이고 천정명, 윤소이, 이한 등 제 몫 하는 어린 배우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김민희,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 윤유선까지 역시 실로 배우들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
“지금, 이 순간, 이 인생이 두 번 다시 안 온다는 걸 알게 되지.”
- 민호와 영숙의 대화 중 는 20대 젊은 연인부터 중년의 남녀 그리고 노년의 어머니까지 여러 세대의 주인공들이 고루 이야기의 키를 쥐고 간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른의 입장이 되어 충고하기보다는 아이가 되어 계속 질문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 보인다. 10여년 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이야기하던 애늙은이 서른살 작가는 이제 “흔들릴까?” “다리냐 흔들리게?” “수희가 택배도 아니고 보내긴 어딜 보내” “지켜? 감기로부터 지켜?”처럼 흔히 쓰는 단순한 대사들이 왜 시작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신인 같은 마흔살 작가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묻고, 우리는 그 순진무구한 물음에 대답을 찾지 못해 번번이 멍하니 맥을 놓고야 만다. 지금 노희경의 드라마는 무덤이 아니라 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완숙한 어른이 아니라 점점 더 ‘생짜’가 되어간다. 이 동행길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는 생각은, 비단 당신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글//백은하 기자
출처 : http://blog.naver.com/111audals/120024202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