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평범하고 진부한 연애담이 드 보통의 손에서 독창적인 사랑이야기로 돌변. 사랑의 기승전결을 모두 담고 있다.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구애,연인의 이상화,친밀성,서로를 알아가는 기쁨 ,행복이면의 두려움,거부당하는 사랑,갑작스런 이별,비참한 상황에 대처하기까지..
현학적인 면이 있으나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읽는이들에게 위트와 유머를 ,'바로 내 이야기야'라는 공감과 지적체험을 모두 줄 수 있는 책이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
클로이의 휴가이야기는 지루했다.그러나 지루함은 이제 판단기준 이 되지 못했다.그녀의 말의 구문속에서 지적통찰이나 시적진실을 찾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심약함,게으름,부정적,타협성,끔찍한 어리석음 같은거---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느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스스로 사랑받을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그 사랑 때문에 다른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다른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압박으로 느끼게 될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미 기울고 있느 것이 아닌데도,왜 그것을 아쉬워할까?어쩌면 그 답은 사랑에 대한 요구를 해결한다고해서 반드시 갈망에 대한 요구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편치 않은 생각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녁 식사 후에 소파에서 앨리스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어
쩐 일인지 내키지 않아서 그냥 백일몽만 꾸고 있었다. 앨리스의 얼
굴을 보니 내 속의 공허,분명한 범위나 의미가 없는 공허가 떠올
랐다. 어쩐 일인지 클로이에 대한 사랑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공허
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식탁 중앙에 있는 원반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음식 접시들을 올려놓고 빙빙 돌려,이번에는 새우,다음에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잇는 원반 말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은 순환 패턴,좋은 것과 나쁜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패턴을 따르지 않을까? 우리는 다른 경우에는 유동적이면서도, 인간 감정의 고정에는 그릇되게 집착한다. 그래서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은 갈라놓는 난해한 분리선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클로이가 어떤 식으로 앉아있거나 어떤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다 가 갑자기 미치도록 짜증이 날 때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달콤하고 가벼웠는데.나만 그런 것이 아이었다. 클로이도 나한테 갑자기 공격을 쏟아붓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비극은 그것이 시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과거의 사랑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특별히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몇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을 건넌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도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답을 알수 없을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질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느린 헤어짐의 과정이 나타났다. 감정의 석조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당나귀가 노래를 못한다고 당나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나귀는 체질상 콧김을 뿜는 것 외에 다른 기회는 얻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그것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고뇌에 괜찮은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나 자신이 특별하다는 증거(아무리 부당한 증거라고 하더라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왜 내가 이런 엄청난 괴로움을 겪도록 선택되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증거,따라서 어쩌면 그들보다 낫는 증거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의 슬픔에 취하게 되었다. 이 눈물은 이제 뜨거운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 고통이 정점을 넘어버리자 기쁨의 골짜기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기쁨, 예수 콤플렉스의 기쁨이었다.
클로이가 떠나는 것과 더불어 현재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욕망도 사라졌다. 과거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시제가 되었다.미래라는 것은 더욱더 비참한 부재 상태를 의미할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푹 잠겨 있을 때에는 가끔 클로이가 없는 현재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이 계속 미친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지나친 의욕,고통,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식사,죽음,돈에 대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해서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정확하게는 연애에 관한 책이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평범하고 진부한 연애담이 드 보통의 손에서 독창적인 사랑이야기로 돌변. 사랑의 기승전결을 모두 담고 있다. 운명적인 만남에서부터 구애,연인의 이상화,친밀성,서로를 알아가는 기쁨 ,행복이면의 두려움,거부당하는 사랑,갑작스런 이별,비참한 상황에 대처하기까지..
현학적인 면이 있으나 딱딱하지 않고 오히려 읽는이들에게 위트와 유머를 ,'바로 내 이야기야'라는 공감과 지적체험을 모두 줄 수 있는 책이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
클로이의 휴가이야기는 지루했다.그러나 지루함은 이제 판단기준 이 되지 못했다.그녀의 말의 구문속에서 지적통찰이나 시적진실을 찾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그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그리고 내가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심약함,게으름,부정적,타협성,끔찍한 어리석음 같은거---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느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스스로 사랑받을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그 사랑 때문에 다른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다른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압박으로 느끼게 될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미 기울고 있느 것이 아닌데도,왜 그것을 아쉬워할까?어쩌면 그 답은 사랑에 대한 요구를 해결한다고해서 반드시 갈망에 대한 요구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편치 않은 생각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녁 식사 후에 소파에서 앨리스와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어
쩐 일인지 내키지 않아서 그냥 백일몽만 꾸고 있었다. 앨리스의 얼
굴을 보니 내 속의 공허,분명한 범위나 의미가 없는 공허가 떠올
랐다. 어쩐 일인지 클로이에 대한 사랑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공허
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식탁 중앙에 있는 원반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음식 접시들을 올려놓고 빙빙 돌려,이번에는 새우,다음에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잇는 원반 말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똑같은 순환 패턴,좋은 것과 나쁜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패턴을 따르지 않을까? 우리는 다른 경우에는 유동적이면서도, 인간 감정의 고정에는 그릇되게 집착한다. 그래서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은 갈라놓는 난해한 분리선에 대한 관념이 생긴다.
클로이가 어떤 식으로 앉아있거나 어떤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다 가 갑자기 미치도록 짜증이 날 때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달콤하고 가벼웠는데.나만 그런 것이 아이었다. 클로이도 나한테 갑자기 공격을 쏟아붓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비극은 그것이 시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과거의 사랑을 대하는 무관심에는 특별히 잔인한 면이 있다. 오늘은 이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은데,몇달 후에는 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길을 건넌다는 것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도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답을 알수 없을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질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느린 헤어짐의 과정이 나타났다. 감정의 석조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당나귀가 노래를 못한다고 당나귀에게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나귀는 체질상 콧김을 뿜는 것 외에 다른 기회는 얻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그것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고뇌에 괜찮은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나 자신이 특별하다는 증거(아무리 부당한 증거라고 하더라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왜 내가 이런 엄청난 괴로움을 겪도록 선택되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나는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증거,따라서 어쩌면 그들보다 낫는 증거가 된다.
나는 나 자신의 슬픔에 취하게 되었다. 이 눈물은 이제 뜨거운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 고통이 정점을 넘어버리자 기쁨의 골짜기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기쁨, 예수 콤플렉스의 기쁨이었다.
클로이가 떠나는 것과 더불어 현재를 따라가고자 하는 모든 욕망도 사라졌다. 과거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시제가 되었다.미래라는 것은 더욱더 비참한 부재 상태를 의미할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에 푹 잠겨 있을 때에는 가끔 클로이가 없는 현재를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이 계속 미친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지나친 의욕,고통,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식사,죽음,돈에 대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해서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