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페미니즘, 이를 질타한다-

정승리200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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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여자만의 문제란 없거나 지극히 적다. 여성이란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남성이 있어서이고 따라서 여성의 문제란 언제나 남성과 관련된 문제를 뜻한다. 그런데 상대인 남성을 적대 개념으로 다루고 방법을 투쟁만으로 일관한다면 너희 선택의 폭은 너무 좁고 비극적이 된다. 곧 이겨서 포악한 상대를 온전히 제압하거나 져서 이전보다 더 엄혹한 예속과 굴종 속에 떨어지는 길밖에 없다. 있다면 남녀의 철저한 결별로 인류사의 진행이 중단되는 것 정도일까.

너희가 가장 못 견뎌 하는 것으로 보이는 도덕적인 불성실과 이기, 그리고 정신적인 나태는 남성만의 약점이 아니다. 거기서 연유된 단정치 못한 성적 행실, 참기 힘든 이기적인 무리한 요구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무성의도 그렇다. 곰곰이 따져 보면 기회와 여건의 차이일 뿐 너희들도 그 약점을 나누어 가졌고 그래서 너희들 불화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된다. 정도의 차이를 본질의 차이로 몰아대지 말아라.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 약점은 부인하고 오직 남성만을 단죄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지만 진실로 걱정스러운 일은 요즘 들어 부쩍 높아진 목소리, 너희를 충동하고 유혹하는 수상스런 외침들이다. 그들은 이혼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가슴에 걸고 남성들의 위신과 이기와 폭력성과 권위주의를 폭로하고 그들과 싸운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도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 어쨌거나 굳세고 용기 있는 여인들이지만 그들을 시대의 선구자로 인정하기엔 왠지 망설여진다. (중략)

이제 너희 시대가 즐겨 쓰는 말을 비려 얘기해 보자. 내가 알기로 너희를 그 같은 한숨과 넋두리에 빠지게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것은 요즘 들어 부쩍 크게, 그리고 자주 거론되는 ‘여성의 자기 성취’란 말이 아닌가 한다. 언필칭 여성을 위한다는 잡지치고 그걸 떠들어 대지 않은 잡지는 없고 다른 대중 매체들도 여성 상대의 지면과 시간만 나면 질세라 그걸 들고 나와 찧고 까분다.

남자들은 자기의 일을 가지고 있고 나름의 성취도 있다. 자녀들도 나이가 차면 제 일을 가지고 저마다의 성취를 향해 떠난다. 그런데 주부에게는 무엇이 남느냐. 남편 뒷바라지 아이 기르기로 좋은 청춘 다 가고—. 그렇게 나이 든 주부들을 심란케 하다가 한 술 더 떠 가장 여성을 위하는 체 들쑤셔 댄다. 지금이라도 나오너라. 남편과 아이들과 가정에서 해방되거라.

그런데 내게는 그 ‘여성의 자기 성취’란 말과 거기 따른 논의처럼 애매하고 수상쩍은 것도 없다. 애매한 것은 자기 성취란 말의 내용과 그 실현 방식이다. 그리고 수상쩍은 것은 그 애매한 논의로 여성을 충동질하는 저의이다. 자기 성취의 내용을 특수하면서도 그 가치가 사회적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한정짓는다면 남성에게도 그런 자기 성취는 흔한 일이 아니다. 빼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남들이 다 인정할 만한 성취를 이루는 남성은 많아야 백에 하나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기 성취를 못한 것이 불행이라면 그것은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자기 성취의 내용을 겸손하게 낮춰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재능이라도 나름의 성의와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을 때, 그것을 모두 자기 성취로 쳐준다면 이번에는 모두가 자기 성취를 한 셈이 된다. 아무도 노력과 성의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 도대체 이 세상이란 게 그렇게 수월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크건 작건 나름의 자기 성취를 하게 되어 있고 그 점에서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어떤 뜻으로 말하든 여성의 자기 성취에서는 가정에서의 성취가 제외된다는 점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기르는 일은 여성이 가장 오랫동안 해 왔고 또 가장 효율성이 높은 분야인데도 대중적으로 자기 성취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뒷전으로 밀려 버리고 만다. 지금껏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 온 중년의 자랑스런 주부를 갑작스런 허망감과 무력감 속으로 밀어 넣는 해괴한 논의이다.

그렇지만 애매함을 넘어 수상쩍은 느낌까지 주는 것은 이 시대가 다투어 권하는 자기 성취의 방식이다. 앞서보았듯이 너희 논객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기의 일을 가져라. 자아를 되찾아라.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벗어나라. 가정에서 해방되라—. 그런데 내게는 그런 권유들이 마치 자기 성취를 원하는 여성에게는 가정은 감옥이고 남편은 폭군이며 아이들은 족쇄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현모양처란 무능과 불행의 다른 이름이고 재주와 양육은 허송세월의 동의어인 듯하다.

거기다가 더욱 수상쩍은 것은 그렇게 끌여 낸 여성들을 이 시대가 몰아가는 곳이다. 어제까지도 성실한 주부로서 나름의 성취를 이뤄 가고 있던 여성들이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자기 성취의 열정에 휘몰려 걷게 되는 길을 보라. 형편이 좋으면 느닷없이 서투른 예술가 흉내를 내거나 뒤늦게 가망 없는 학문으로 뛰어든다. 그렇지 못한 쪽은 난데없는 여류 사업가 또는 기능인의 꿈에 젖어 사기에 얹히거나 별 소득도 없는 일에 심신이 앙루러 녹초가 된다.

- 이문열,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