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 내가 자라온 동네, 유난히 커보이던 작은 운동장의 초등학교, 우리의 사랑이 싹튼 신혼여행지, 자녀탄생을 기념하여 떠난 여행 등 내 가족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담긴 여행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라.
그 여행지의 감회는 남다르며,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전해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 또는 아내,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족사가 담긴 풍경과 길을 찾아 나서보면 좋다.
해바라기, 그 첫 번째 이야기
해바라기가 있어 아름다운 풍경
내가 해바라기를 처음 본 기억은 내 유년의 고향집 둘레이다.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고물상을 해 온 내림 덕에 우리 집은 언제나 집 안팎으로 천지사방 먼지가 수북히 앉은 고물더미들이 창고마다 쌓여 있었다.
내가 본 해바라기의 모습은 그 고물더미의 곁이었다. 짙은 고동색으로 기억되는 고가구 더미나 빛이 바랜 회색 빛 고물들을 켜켜이 쌓아 놓은 야적장, 녹슨 양철판을 군데군데 누비어 놓은 창고 담벼락의 한 쪽 구석,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간 고물상 간판과도 나란히 잘 어울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기억 속의 해바라기는 여름에만 피어 있던 것 같지 않았고, 일년 내내 빛이 드리운 공간이나 시간의 한 곁에서 언제나 노랗다 못해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해바라기는 그렇게 빛 바랜 풍경에 드리운 한 조각 햇살자리면 어디서 건 모가지를 치켜올리고 서서 고개를 돌리며 사방 음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오지랖이 넓은 꽃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들어설 참이면 담장 너머 옆집의 늙은 암탉과 수다를 떨다가도 이내 고개를 돌려 호들갑스럽게 어린 나를 반기었다.
또 어떤 날은 짝 다리를 짚고 서 있다가 아버지의 으름장에 바짝 군기가 들기도 했고, 해가 몹시도 뜨거운 어느 날인가는 술이 취해 널부러진 아버지의 파랑자전거를 지키느라 비질비질 땀을 흘리면서도 특유의 푼수같은 웃음으로 날 맞기도 했다.
혹여 내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날에는 내 마음을 훔쳐 읽은 냥 허리를 반쯤은 꺽어 내 코 앞으로 그 큰 곰보투성이 얼굴을 들이밀곤 정말 딱한 표정을 짖기도 했다.
여름햇살을 잔뜩 머금은 해바라기는 그렇게 싱싱한 여름의 풍경처럼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마음씨 좋은 먼 친척 아저씨나 속정 깊은 누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어느 들녘에서 또 그들을 만날까
하지만 그 이후 내가 이 땅에서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길목이나 풍경을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땅 어디에서 건 피는 꽃이 분명하고 문뜩 길을 걷다가 혹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해바라기의 모습을 본 적이 있건만, 이 땅에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해바라기 밭을 보기간 쉽지가 않은 터였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화단의 모서리에는 예외 없이 허리가 꺽이거나 군데군데 개구진 아이들의 구박으로 손톱자국이 난 흉물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고, 사춘기 때 갈래머리를 쫓아가 머뭇거리던 어느 논두렁 곁에서 유난 키가 작던 나를 멀쭉이 내려보던 키가 큰 해바라기의 모습은 나를 더욱 주눅 들게 했을 뿐이었고, 끝내는 내 첫 사랑의 아픔으로 기억되는 슬픈 풍경일 뿐이었다. 그렇게 청춘의 여름을 지나면서 내가 보아 온 해바라기래야 기껏 한 송이 또는 두 서너 송이가 키 재기를 하는 정도였고, 그다지 대우를 받는 꽃도 못되어서 천덕꾸러기이거나 외톨박이 신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해바라기는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잘 그려진 어느 천재화가의 이국적인 풍경화로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경을 찾아다니거나 길을 걷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우리 땅에서 해바라기를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아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던 터였다. 혹여 어느 길목에서 해바라기를 맞닥뜨리더라도 잘 생기고 허우대가 멀쩡한 모습보다는 장대비를 흠씬 두르려 맞아 긴 허리둥치를 숙이고 있거나, 씨알을 잔뜩 뽑힌 얽은 얼굴로 뜨거운 볕을 견디어 내는 모습으로 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동네의 비포장 도로 곁에서 잠시 잠깐 여름 한 나절을 힘겹게 버티는 내는 모습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길에서 우연히 첫인상이 잘생긴 해바라기를 만나더라도 외톨박이가 일쑤여서 단지 눈인사 한번쯤으로 아는 체를 하곤 금새 길을 재촉하거나, 잠시잠깐 멈추어 서서 키 크고 속 좋은 풍채에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큼지막한 꽃숭이를 카메라 파인더에 가득 담아 오는 것이 전부였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해바라기
그러다 내가 다시 해바라기를 만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달을 보고 산다는 서울의 어느 달동네였다. 하늘 아래 둥근 달이 떠오르면 집 지붕 위로 바짝 달이 올라앉는다고 해서 달동네라 불리어지던 산동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난곡(蘭谷).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관악구의 신림 7동에서 13동까지의 하늘 아랫터 산동네를 일컫는다. 조선 때 유배를 당한 어느 죄인이 평생 난을 심으며 살기 시작해서 난초골이라 불리어 지던 동네이다.
배고픈 60년대를 지나고 암울한 70년대를 지나며 도시에서 쫓겨난 마지막 유민들이 하나둘씩 보따리를 들고 흘러든 동네였다. 처음에는 30여 가구가 고작이었지만 사람을 몰아내는 가당찮은 도시정화계획에 밀려 한 때는 만 삼 천명까지 식구가 늘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삶에 찌든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가마니를 지붕에 이고 판자를 빗대어 하나 둘 터를 만들었었다. 그렇게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동네였다. 그 서울의 달동네에서 한 구석에서 나는 해바라기를 다시 만났다.
난곡이 철거가 시작되었고, 주민들이 보따리를 하나 둘 꾸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전날 뉴스에는 철거가 시작되었다고들 했고, 아직도 보상비 문제와 이주대책으로 주민들은 생계를 팽개치고 연일 거대한 포크레인과 맞서 목소리를 높이며 손사래를 젖고 있었다.
카메라를 다시 비껴 메고 가파른 언덕바지를 오른다. 여름 삼복더위에 산등성이를 오르니 땀이 밴 바짓가랑이가 자꾸 걸음을 붙잡는다. 잠시 숨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니 집들이 마치 판이 끝난 화투장을 펼쳐 놓은 듯 네 집 내 집 없이 얼기설기 엉켜있다.
지붕 위엔 박도 걸려 있고 손바닥만한 아랫집 지붕에 텃밭도 층층이 일구어 놓았다. 윗집의 텃밭이 아랫집의 지붕인 터. 벌써 '공가'란 표식을 단 빈집들이 눈에 뜨인다. 을씨년스럽게 낡은 살림살이를 쏟아내며 주저앉아 있는 품이다. 좀 더 가파른 언덕바지를 올라서니 꽤 너른 삼거리. 이즈음에서 제일 너른 골목일 터이다.
그 삼거리에 한 갈래 길 모퉁이에 해바라기가 살고 있었다. 다른 갈래 모퉁이에는 '희망'라는 이름의 세탁소가 있었고, 그 세탁소를 마주보는 편에 해바라기 한 가족이 바리케이트를 치듯 서로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산을 내려갈 채비인 듯한 해바라기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녹슬고 기울어진 양철 판자집 담벼락에 버티어 서 있었다. 그 중 키가 제일 큰 해바라기. '아는 얼굴일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굴이 얽어서 알아볼 수가 없네. 누굴까.' 파인더에 줌을 당겨서 그 얽은 얼굴을 찍는다. 다시 해바라기 가족사진과 세탁소 맞은 편의 '희망세탁소'도 함께 담는다.
'아저씨다. 내 아버지의 자전거를 지켜주던 그 마음씨 좋은 해바라기 아저씨. 내가 중학교가 들어가면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다시 보지 못했던 그 해바라기 아저씨.'
나는 철거중인 달동네의 한 뼘 남은 양지 한 켠에서 식구들을 잔뜩 데리고 짐을 꾸리고 선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깊은 눈으로 마음 끝을 잡아주던 교회의 십자가만를 바라보며 쓸쓸히 지켜보며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낮에는 해바라기가 피고 밤에는 달이 뜨던 산동네.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를 먼 발치에서 보고는 허겁지겁 난곡을 내려왔다. (....이어서)
평생 떠나는 여행의 기술 - 테마가 있는 풍경여행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 내가 자라온 동네, 유난히 커보이던 작은 운동장의 초등학교, 우리의 사랑이 싹튼 신혼여행지, 자녀탄생을 기념하여 떠난 여행 등 내 가족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담긴 여행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라.
그 여행지의 감회는 남다르며, 가족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전해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 또는 아내,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족사가 담긴 풍경과 길을 찾아 나서보면 좋다.
해바라기, 그 첫 번째 이야기
해바라기가 있어 아름다운 풍경
내가 해바라기를 처음 본 기억은 내 유년의 고향집 둘레이다.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고물상을 해 온 내림 덕에 우리 집은 언제나 집 안팎으로 천지사방 먼지가 수북히 앉은 고물더미들이 창고마다 쌓여 있었다.
내가 본 해바라기의 모습은 그 고물더미의 곁이었다. 짙은 고동색으로 기억되는 고가구 더미나 빛이 바랜 회색 빛 고물들을 켜켜이 쌓아 놓은 야적장, 녹슨 양철판을 군데군데 누비어 놓은 창고 담벼락의 한 쪽 구석, 받침 하나가 떨어져 나간 고물상 간판과도 나란히 잘 어울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기억 속의 해바라기는 여름에만 피어 있던 것 같지 않았고, 일년 내내 빛이 드리운 공간이나 시간의 한 곁에서 언제나 노랗다 못해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해바라기는 그렇게 빛 바랜 풍경에 드리운 한 조각 햇살자리면 어디서 건 모가지를 치켜올리고 서서 고개를 돌리며 사방 음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오지랖이 넓은 꽃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들어설 참이면 담장 너머 옆집의 늙은 암탉과 수다를 떨다가도 이내 고개를 돌려 호들갑스럽게 어린 나를 반기었다.
또 어떤 날은 짝 다리를 짚고 서 있다가 아버지의 으름장에 바짝 군기가 들기도 했고, 해가 몹시도 뜨거운 어느 날인가는 술이 취해 널부러진 아버지의 파랑자전거를 지키느라 비질비질 땀을 흘리면서도 특유의 푼수같은 웃음으로 날 맞기도 했다.
혹여 내 눈가에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날에는 내 마음을 훔쳐 읽은 냥 허리를 반쯤은 꺽어 내 코 앞으로 그 큰 곰보투성이 얼굴을 들이밀곤 정말 딱한 표정을 짖기도 했다.
여름햇살을 잔뜩 머금은 해바라기는 그렇게 싱싱한 여름의 풍경처럼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마음씨 좋은 먼 친척 아저씨나 속정 깊은 누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어느 들녘에서 또 그들을 만날까
하지만 그 이후 내가 이 땅에서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길목이나 풍경을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땅 어디에서 건 피는 꽃이 분명하고 문뜩 길을 걷다가 혹은 달리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해바라기의 모습을 본 적이 있건만, 이 땅에서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해바라기 밭을 보기간 쉽지가 않은 터였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화단의 모서리에는 예외 없이 허리가 꺽이거나 군데군데 개구진 아이들의 구박으로 손톱자국이 난 흉물스런 모습으로 서 있었고, 사춘기 때 갈래머리를 쫓아가 머뭇거리던 어느 논두렁 곁에서 유난 키가 작던 나를 멀쭉이 내려보던 키가 큰 해바라기의 모습은 나를 더욱 주눅 들게 했을 뿐이었고, 끝내는 내 첫 사랑의 아픔으로 기억되는 슬픈 풍경일 뿐이었다. 그렇게 청춘의 여름을 지나면서 내가 보아 온 해바라기래야 기껏 한 송이 또는 두 서너 송이가 키 재기를 하는 정도였고, 그다지 대우를 받는 꽃도 못되어서 천덕꾸러기이거나 외톨박이 신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해바라기는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잘 그려진 어느 천재화가의 이국적인 풍경화로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경을 찾아다니거나 길을 걷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우리 땅에서 해바라기를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아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던 터였다. 혹여 어느 길목에서 해바라기를 맞닥뜨리더라도 잘 생기고 허우대가 멀쩡한 모습보다는 장대비를 흠씬 두르려 맞아 긴 허리둥치를 숙이고 있거나, 씨알을 잔뜩 뽑힌 얽은 얼굴로 뜨거운 볕을 견디어 내는 모습으로 먼지 폴폴 날리는 시골동네의 비포장 도로 곁에서 잠시 잠깐 여름 한 나절을 힘겹게 버티는 내는 모습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길에서 우연히 첫인상이 잘생긴 해바라기를 만나더라도 외톨박이가 일쑤여서 단지 눈인사 한번쯤으로 아는 체를 하곤 금새 길을 재촉하거나, 잠시잠깐 멈추어 서서 키 크고 속 좋은 풍채에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큼지막한 꽃숭이를 카메라 파인더에 가득 담아 오는 것이 전부였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해바라기
그러다 내가 다시 해바라기를 만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달을 보고 산다는 서울의 어느 달동네였다. 하늘 아래 둥근 달이 떠오르면 집 지붕 위로 바짝 달이 올라앉는다고 해서 달동네라 불리어지던 산동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난곡(蘭谷).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관악구의 신림 7동에서 13동까지의 하늘 아랫터 산동네를 일컫는다. 조선 때 유배를 당한 어느 죄인이 평생 난을 심으며 살기 시작해서 난초골이라 불리어 지던 동네이다.
배고픈 60년대를 지나고 암울한 70년대를 지나며 도시에서 쫓겨난 마지막 유민들이 하나둘씩 보따리를 들고 흘러든 동네였다. 처음에는 30여 가구가 고작이었지만 사람을 몰아내는 가당찮은 도시정화계획에 밀려 한 때는 만 삼 천명까지 식구가 늘어나기도 했다. 그렇게 삶에 찌든 뜨내기들이 모여들어 가마니를 지붕에 이고 판자를 빗대어 하나 둘 터를 만들었었다. 그렇게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동네였다. 그 서울의 달동네에서 한 구석에서 나는 해바라기를 다시 만났다.
난곡이 철거가 시작되었고, 주민들이 보따리를 하나 둘 꾸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전날 뉴스에는 철거가 시작되었다고들 했고, 아직도 보상비 문제와 이주대책으로 주민들은 생계를 팽개치고 연일 거대한 포크레인과 맞서 목소리를 높이며 손사래를 젖고 있었다.
카메라를 다시 비껴 메고 가파른 언덕바지를 오른다. 여름 삼복더위에 산등성이를 오르니 땀이 밴 바짓가랑이가 자꾸 걸음을 붙잡는다. 잠시 숨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니 집들이 마치 판이 끝난 화투장을 펼쳐 놓은 듯 네 집 내 집 없이 얼기설기 엉켜있다.
지붕 위엔 박도 걸려 있고 손바닥만한 아랫집 지붕에 텃밭도 층층이 일구어 놓았다. 윗집의 텃밭이 아랫집의 지붕인 터. 벌써 '공가'란 표식을 단 빈집들이 눈에 뜨인다. 을씨년스럽게 낡은 살림살이를 쏟아내며 주저앉아 있는 품이다. 좀 더 가파른 언덕바지를 올라서니 꽤 너른 삼거리. 이즈음에서 제일 너른 골목일 터이다.
그 삼거리에 한 갈래 길 모퉁이에 해바라기가 살고 있었다. 다른 갈래 모퉁이에는 '희망'라는 이름의 세탁소가 있었고, 그 세탁소를 마주보는 편에 해바라기 한 가족이 바리케이트를 치듯 서로의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산을 내려갈 채비인 듯한 해바라기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녹슬고 기울어진 양철 판자집 담벼락에 버티어 서 있었다. 그 중 키가 제일 큰 해바라기. '아는 얼굴일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굴이 얽어서 알아볼 수가 없네. 누굴까.' 파인더에 줌을 당겨서 그 얽은 얼굴을 찍는다. 다시 해바라기 가족사진과 세탁소 맞은 편의 '희망세탁소'도 함께 담는다.
'아저씨다. 내 아버지의 자전거를 지켜주던 그 마음씨 좋은 해바라기 아저씨. 내가 중학교가 들어가면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다시 보지 못했던 그 해바라기 아저씨.'
나는 철거중인 달동네의 한 뼘 남은 양지 한 켠에서 식구들을 잔뜩 데리고 짐을 꾸리고 선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깊은 눈으로 마음 끝을 잡아주던 교회의 십자가만를 바라보며 쓸쓸히 지켜보며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낮에는 해바라기가 피고 밤에는 달이 뜨던 산동네.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를 먼 발치에서 보고는 허겁지겁 난곡을 내려왔다. (....이어서)
(좀 길어서 나누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