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국] 고구려ㆍ발해사 충돌

송철민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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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의 시각차가 분명히 있다. 최근 동북공정이 표면화 됨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한국과 중국의 시각차이가 무엇인지 알아본다.(조금길지만 그래도 읽어두자)

 

중국 “한국사와 무관한 중국사 일부… 민족분열 책동 봉쇄”
한국 “우리 조상인 예맥족의 역사인 동시에 만주 지역사”

[한국·중국] 고구려ㆍ발해사 충돌 ▲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장군총 내부에 그려진 수렵도.

최근 일부 역사학자들이 압록강 이북(만주)에 있는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유적지를 답사하려다 중국 정부에 의해 현장 접근을 저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수년 전부터 이같은 접근 제한조치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조치에는 ‘압록강 이북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한국(북한 포함)과 중국 역사학계의 시각차가 내포돼 있다. 동시에 중국의 민족문제와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ㆍ발해사를 둘러싼 한ㆍ중 갈등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중국의 시각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ㆍ발해 유적지에 대한 접근 제한을 통해 중국 정부가 한국에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민족분열주의자들의 활동을 사전에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기본적으로 ‘중국 내 각 민족이 단결해야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중국 내 각 민족의 평등과 단결을 중시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계층·지역간 빈부 격차가 확대되면서 일부 소수민족 지구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 정부와 학계는 ‘서방의 적대세력이 중국을 서구화 혹은 분화(分化)시키기 위해 민족과 종교문제를 이용하려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한국인을 고구려·발해 유적지에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당면 현실에 부합하는 정치논리가 학문 영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국사란 ‘중화인민공화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민족(중화민족)이 그 영토 안에서 이루어온 모든 역사’로 변했다. 따라서 중국 내 소수민족과 그들과 뿌리가 같은 주변 민족국가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정치적·학문적으로 설 땅을 잃었다.

이러한 중국 내 현실 인식은 역사적으로 만주에 거주했던 여러 민족의 역사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예로 고구려는 ‘중원(中原) 한문화(漢文化)의 영향을 받은 한제국(漢帝國)의 번속지방정권(藩屬地方政權)’(寧夢辰, ‘東北地方史’)이다.

●“고구려·발해는 소수민족 지방정권”

또 중국의 시각에서 발해는 ‘말갈족을 주체로 한 민족 정권인 동시에 당나라 중앙 정권의 책봉을 받아 당왕조에 예속된 지방 정권’ 혹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다.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국정교과서에서도 ‘당현종(唐玄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임명한 속말부(粟末部)의 수령(首領)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지방 정권’(중국역사, 초급중학교과서)이다.

또 고구려인은 ‘부여(夫餘)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肅愼)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인도 여진족과 동일한 족속’(왕건군, 고구려족속탐원·高句麗族屬探源)이다. 발해도 ‘고구려족(高句麗族)의 별종(別種)도 아니고 고구려의 후예도 아닌 중국 동북지방에 예로부터 생활해 온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인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김향, 발해국의 일부 민족문제에 대하여)이다.

중국에서의 고구려사 및 발해사는 한국사와는 무관한 중국사의 일부다. 철저하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관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재단(裁斷)하고 왜곡함으로써 자칫 학문 영역에서 불거질지도 모르는 영토(領土·혹은 역사영역) 관련 분쟁거리나 민족단결에 해로운 논조를 송두리째 잘라내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더 이상 한국에서 사용하는 만주(滿洲)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 중국인들도 만주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 예로 만주에서의 중국공산당 조직 명칭이 ‘중공만주성위(中共滿洲省委)’였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는 만주라는 용어를 사실상 폐기 처분했다. 그 이유는 만주라는 단어가 일본의 만주국(滿洲國)을 연상하도록 만든다는 점, 또 만주라는 단어가 그 지역이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는 과거의 일을 연상하도록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중국은 현재 만주라는 용어 대신 ‘중국 동북지구(東北地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명칭은 ‘만주가 중국의 확고 부동한 동북지구’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만주가 ‘고구려·발해의 고토(故土)’로서 한국 영토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유적지를 찾는 한국인들은 중국인의 눈에 ‘민족분열주의자의 전형’으로 비친다. 게다가 중국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만일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만주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만주에 대한 한국인들의 애틋한(?) 감정은 분명 중국 당국의 신경을 거스를 것임에 틀림없다.

(윤휘탁 동아대 연구교수ㆍ동양사)

◆한국의 시각

고구려나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영토로 삼았던 나라들이다. 만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특징인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가 흥기(興起)한 압록강 중상류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일찍부터 주변 여러 나라나 족속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4~6세기에는 중국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유목민인 거란족, 대흥안령산맥에 거주하던 족속, 그리고 본래 수렵족이던 물길(말갈) 등을 거느리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만주와 그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면서 한반도의 나라와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문화나 신분제 운영은 신라에 비해 훨씬 개방적이고 유연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발해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발해는 말갈 등 다양한 족속을 거느렸으며 당(唐), 신라, 일본, 거란 등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최근에는 시베리아를 통해 멀리 중앙아시아와 교통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 문화의 개방성과 국제성이 그대로 발해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만주에서 흥기한 다른 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가령 고구려 성곽은 대부분 돌이나 돌·흙을 섞어서 쌓은 산성(山城)인데 비해 요(遼)나 금(金)의 성곽은 흙으로 쌓은 평지토성(平地土城)이다. 다같이 만주에서 흥기한 나라인데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을까.

고구려는 고조선이나 부여와 마찬가지로 예맥(濊貊) 계통이다. 예맥족은 일찍부터 돌로 무덤을 조영하였는데 고구려인들도 적석묘(積石墓)를 조영하였다. 또한 압록강 중상류는 만주 대평원이나 초원지대와 구별되는 산간지대로서 고구려인들은 압록강변의 크고 작은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고구려·발해 뿌리는 예맥문화

이에 고구려인들은 만주 곳곳으로 진출한 다음에도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하여 대평원 안쪽의 산지에 성곽을 쌓고 그 주변의 하곡(下谷)평지를 다스렸다. 광활한 만주 대평원을 발판으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한 요나 금과 뚜렷이 대비되는 면모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한 다음에도 요동평원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한반도 남쪽 깊숙이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어디까지나 우리 조상인 예맥족의 문화를 밑바탕으로 삼아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문화 기반과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에 중국 대륙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전통적인 지배이념이나 정치제도를 바탕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특히 추모왕(동명성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라는 건국 설화를 바탕으로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신성하며 주변국을 복속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독자적 천하관을 확립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사의 이러한 면모는 발해사에서도 상당 부분 확인된다. 특히 산성을 쌓거나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조영하던 전통은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천손국(天孫國) 의식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다만 발해가 자리잡은 지역은 고구려 중심지가 아니고 주민도 말갈족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이에 발해는 점차 당의 정치제도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말갈계 주민의 문화도 면면히 이어졌다.

발해는 분명 고구려사를 계승하였고 발해 지배층도 고구려 계승국임을 표방하였지만 점차 고구려 문화 요소는 희석되고 당의 선진문화나 말갈의 토착문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인들은 다양한 문화를 아울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의 소아병적 태도를 비판하기에 앞서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한국사에만 가두어두려 했던 우리의 관점도 진지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사나 발해사는 기본적으로는 우리 조상인 예맥족의 역사이지만 여러 족속이 어우러져 삶을 영위하였던 만주지역사의 일부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ㆍ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