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본의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가 1982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40일간에 걸쳐 에게 해를 둘러싼 그리스, 터키 지역의 고대 유적을 답사한 것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그 여행에는 일본 최고의 보도사진가 스다 신타로가 동행하여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7,000장의 고대 유적 사진을 찍었다.
원래는 여행 후 바로 단행본화될 예정이었으나, 실제 여행이 있은 후 20여 년이 지난 2004년 책이 나오게 된다. 그 배경에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1974년 다나카 수상의 범법행위를 고발하는 기사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를 《문예춘추》에 기고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록히드재판이 그즈음 끝날 줄 알았으나, 다나카 측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저자가 록히드재판 관련 작업으로 인해 더욱 바빠지게 된 사정이 있었다(결국 재판은 1986년까지 이어졌다).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단행본으로 정리할 시간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나오게 된 이 책은 그 당시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고자 20년에 걸쳐 만든 책인 셈이다.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고대 유적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1982년(42세) 여행은 대학을 갓 나온 프리랜서 작가 시절인 1972년(32세) 지중해 주변국들의 고대 유적을 찾아다녔던 여행이 단초가 되었다.
고대 유적과의 최초의 충격적인 만남은 한겨울의 시칠리아 섬에 가서 세리눈테를 방문했을 때였다고 한다. 이곳은 카르타고에게 멸망한 그리스의 손꼽히는 식민도시로, 역사적으로는 그리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그곳에서 이름 없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황량한 모습의 신전 유적을 바라보며 저자는 그 감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신전들. 이렇게 훌륭한 신전이 이렇게 멋지게 보존되어 있는데도 이 신전이 어떤 신전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기록된 역사에는 이 신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도 이 신전들은 여기 이렇게 훌륭하게 실물로 존재하고 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155쪽)
에게, 신들이 지배하는 땅
“새 신이 옛 신을 완전하게 말살하는 일은 없다. 신들은 애초에 썩어갈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81쪽)
저자는 1972년 에페소스에서 아르테미스 신상을 만나며 느꼈던 충격과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 10년이 지난 1982년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 에게 해를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 지역에는 그리스 신들의 유적과 유럽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바울이 유대종교에서 세계종교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디뎠던 필리피 유적, 그리스 안에서 기독교의 거점으로 바울과 성모마리아가 죽은 에페소스 유적 등이 있다. 저자는 이곳들을 둘러보며 그리스신화의 신들과 기독교의 신이 어떻게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어갔는지 주목한다.
이곳의 그리스 신들은 예전에 각 지방에 내려오던 고대 민족종교의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성립된 것이다. 이후 그리스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로마의 신들과 그리스의 신들 사이에서, 제우스는 실은 주피터였고, 아프로디테는 실은 비너스였다는 식으로 비슷한 신들을 ‘실은’이란 말로 묶어서 전부 같은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신들을 동일시해서 문화적 동화를 꾀한 것이다. 그때까지 별개의 것이었던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는 그 후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하나의 신화로 묶이게 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이교 신전이 파괴되고, 신상도 우상이라고 하여 파괴되었다. 파괴되지 않은 신전은 기독교 교회로 전용되었다.
결국 이곳에서 신들은 이름만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아시아의 지모신地母神 신앙이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신앙으로 둔갑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의 마리아 신앙으로 모습을 바꾸어갔던 것이다.
에게, 성聖스런 신과 성性스런 신의 땅
고대 그리스에서는 식물의 신이자 포도주의 신, 생식의 신, 연극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음악, 예술, 빛(태양) 등의 신이며 아울러 예언의 신인 아폴론과 함께 받들어졌다. 성聖과 성性이 깊이 연결되고 그 연결에 가치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기독교 교의에서는 원죄와 성이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성은 곧 원죄인 것이다. 인간은 성행위를 통해서 태어난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원죄를 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이다. 그러나 예수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원죄하고는 무관한 성스러운 존재여야 하므로, 태어날 때는 처녀 수태(예수)와 무원죄 수태(마리아)로 원죄에서 벗어나고, 죽은 뒤에는 부활(예수) 내지 피승천(마리아)으로 송장의 부패(원죄의 증거)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모자聖母子는 성性과 철저히 분리됨으로써 성스러움이 지켜진다. 기독교에서 성聖과 성性의 배반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인간성 속에 본래부터 있었던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기독교와 철학이 압살해버려서 인간이 왜소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문명이 강제한 인간성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자는 이러한 니체의 주장을 인용하며 인간에게는 대뇌생리학에서 말하는, 신피질이 지배하는 이성적인 면과 구피질이 지배하는 정서적 면이 공존하고 있으므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사이좋게 협력하고 보완하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에게, 묵시록이 지배하는 땅
저자는 그리스 파묵칼레(고대명 히에라폴리스)에서 죽은 자들을 넣어둔 거대한 석관인 사르코파구스 1,200기가 늘어서 있는 ‘죽음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를 찾아다닌다. 네크로폴리스는 지상 세계에 돌출한 명계요 어둠의 세계였다. 그리스인의 세계관에서 명계는 지상의 현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은 폭과 의미(인간의 어둠의 부분을 지배하는 어둠의 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고대종교의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신전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신전이 파괴됨과 동시에 그리스 신들에 의해 지탱되었던 세계의 관념적인 구조도 무너져 자취를 감추었다.
묵시록적인 세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파묵칼레 근처에 있는 라오디케아 유적은 그러한 묵시록적인 세계를 대표한다. 이곳은 「요한묵시록」의 일곱 수신자 중의 하나였던 교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한데, 묵시록에서 “신의 입에서 뱉어진다”는 저주를 받은 탓인지 494년 무서운 대지진이 이 땅을 엄습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묵시록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세상이 점점 악화 일로를 걷는다는 확신이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진보의 관념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나빠지기만 하므로 당연히 종말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수도원의 발상은 여기에 그 출발점이 있다. 세상의 불의한 자, 더러운 자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들만은 그런 악의 세계를 떠나 의롭고 성스러운 생활을 계속해나가겠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이 아토스 수도원공화국의 존립 근거가 되는 것이다. 수도사들만 살고 여자들은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신의 땅, 그리스 헌법에서도 완전한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이곳을 여행하며 저자는 묵시록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영원회귀한다
저자는 밀레투스 유적에서도 이러한 종말론적인 멸망 이후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란 명제로 철학의 시조가 된 탈레스가 살았고, 막강한 해상통상국가로서 지중해 세계에 군림한 밀레투스에서 만난 황량한 풍경은 그 옛날 세계대전에 패하여 멸망한 옛 강대국이 적국에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당한 황폐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이미 완전히 망각해버린 까마득한 옛날부터 세계대전은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때마다 당대의 강대국이 멸망하여 번영과 영화의 흔적이 무로 돌아가버리기를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기술된 것도 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너머에는 정신이 아뜩해질 만큼 광대한 역사가 기술되지 않은 채 가로누워 있으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역사야말로 가장 정통한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158쪽)
그리고 저자는 이곳에서 명멸해갔던 고대세계의 유적들을 둘러보며 아포칼립스(묵시록)적인 세계의 종말도 머나먼 미래에 딱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일어났던 일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러한 영원회귀 사상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가 이미 도달한 경지로서, 에게 여행 내내 저자의 중요한 정신적 동반자 역할을 한다.(92~99쪽)
모든 찰나에 존재는 비롯된다.
만물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도 그와 함께 회귀한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불가역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원환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원환이라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과거는 곧 미래이고, 미래는 곧 과거다.
현재는 영원히 흘러지나가는 순간순간이 아니라 영원 자체다.
현재는 이미 과거에도 무한하게 반복된 적이 있고, 미래에도 무한하게 반복된다.
사람은 바로 이 순간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살고 있다.
“보라, 이것이 영원인 것이다.”
■ 저자 소개
글/ 다치바나 다카시
1940년 나가사키현 출생. 1964년 도쿄대학 불문과 졸업. 저널리스트, 평론가.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은 수상의 범법 행위를 파헤쳐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인문․사회에 관련된 주제 외에도 우주, 뇌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저서로 『문명의 역설』, 『우주로부터의 귀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원숭이학의 현재』, 『임사체험』, 『뇌를 단련하다』, 『사색기행』 등 다수. 기쿠치 칸상, 고단샤 논픽션상,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신초학예상, 시바료타로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사진/ 스다 신타로
1957년 치바 현 태생. 니혼대학 예술학부 사진학과 졸업. 재학할 때부터 일본보도사진의 선구자 미키 준에게 사사. 1986년 일본사진협회 신인상 수상. 현재 국제사진잡지 《ZOOM Japan》 편집장. 사진주간지 《FOCUS》 창간호의 특종사진을 비롯하여 전 세계 40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촬영한 대작 『인간이란 무엇인가』까지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준, 일본을 대표하는 보도사진가. 저서로 『주일대사의 맨얼굴』, 『80년대―선정적 보도의 시대』, 『고래를 잡다―고래잡이의 후예들』, 『신주쿠 정담』, 『빵의 책』 등이 있다.
옮긴이/ 이규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그동안 인문․역사․문학․과학 등의 여러 분야의 책을 기획․번역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축령산 자락의 수동마을에 자리를 잡고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개인적 체험』, 『왕들의 계곡』, 『뇌를 단련하다』, 『사색기행』,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등이 있다.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존재의 근본을 만드는 것은 책이 아니라 ‘여행’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에게 해 유적에서 바라본 고대문명의 실체!
이 책은 일본의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가 1982년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40일간에 걸쳐 에게 해를 둘러싼 그리스, 터키 지역의 고대 유적을 답사한 것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그 여행에는 일본 최고의 보도사진가 스다 신타로가 동행하여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7,000장의 고대 유적 사진을 찍었다.
원래는 여행 후 바로 단행본화될 예정이었으나, 실제 여행이 있은 후 20여 년이 지난 2004년 책이 나오게 된다. 그 배경에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1974년 다나카 수상의 범법행위를 고발하는 기사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를 《문예춘추》에 기고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록히드재판이 그즈음 끝날 줄 알았으나, 다나카 측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저자가 록히드재판 관련 작업으로 인해 더욱 바빠지게 된 사정이 있었다(결국 재판은 1986년까지 이어졌다).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단행본으로 정리할 시간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나오게 된 이 책은 그 당시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고자 20년에 걸쳐 만든 책인 셈이다.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고대 유적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1982년(42세) 여행은 대학을 갓 나온 프리랜서 작가 시절인 1972년(32세) 지중해 주변국들의 고대 유적을 찾아다녔던 여행이 단초가 되었다.
고대 유적과의 최초의 충격적인 만남은 한겨울의 시칠리아 섬에 가서 세리눈테를 방문했을 때였다고 한다. 이곳은 카르타고에게 멸망한 그리스의 손꼽히는 식민도시로, 역사적으로는 그리 유명한 도시는 아니다. 그곳에서 이름 없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황량한 모습의 신전 유적을 바라보며 저자는 그 감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신전들. 이렇게 훌륭한 신전이 이렇게 멋지게 보존되어 있는데도 이 신전이 어떤 신전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기록된 역사에는 이 신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도 이 신전들은 여기 이렇게 훌륭하게 실물로 존재하고 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155쪽)
에게, 신들이 지배하는 땅
“새 신이 옛 신을 완전하게 말살하는 일은 없다. 신들은 애초에 썩어갈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신들은 끈질기게 살아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81쪽)
저자는 1972년 에페소스에서 아르테미스 신상을 만나며 느꼈던 충격과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 10년이 지난 1982년 다시 이곳을 찾게 된다. 에게 해를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 지역에는 그리스 신들의 유적과 유럽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바울이 유대종교에서 세계종교로 향하는 첫 걸음을 내디뎠던 필리피 유적, 그리스 안에서 기독교의 거점으로 바울과 성모마리아가 죽은 에페소스 유적 등이 있다. 저자는 이곳들을 둘러보며 그리스신화의 신들과 기독교의 신이 어떻게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어갔는지 주목한다.
이곳의 그리스 신들은 예전에 각 지방에 내려오던 고대 민족종교의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성립된 것이다. 이후 그리스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로마의 신들과 그리스의 신들 사이에서, 제우스는 실은 주피터였고, 아프로디테는 실은 비너스였다는 식으로 비슷한 신들을 ‘실은’이란 말로 묶어서 전부 같은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신들을 동일시해서 문화적 동화를 꾀한 것이다. 그때까지 별개의 것이었던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는 그 후 ‘그리스로마 신화’라는 하나의 신화로 묶이게 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황제의 명으로 이교 신전이 파괴되고, 신상도 우상이라고 하여 파괴되었다. 파괴되지 않은 신전은 기독교 교회로 전용되었다.
결국 이곳에서 신들은 이름만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아시아의 지모신地母神 신앙이 그리스의 아르테미스 신앙으로 둔갑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의 마리아 신앙으로 모습을 바꾸어갔던 것이다.
에게, 성聖스런 신과 성性스런 신의 땅
고대 그리스에서는 식물의 신이자 포도주의 신, 생식의 신, 연극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음악, 예술, 빛(태양) 등의 신이며 아울러 예언의 신인 아폴론과 함께 받들어졌다. 성聖과 성性이 깊이 연결되고 그 연결에 가치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된다.
기독교 교의에서는 원죄와 성이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성은 곧 원죄인 것이다. 인간은 성행위를 통해서 태어난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원죄를 지고 태어난다는 것이 성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이다. 그러나 예수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원죄하고는 무관한 성스러운 존재여야 하므로, 태어날 때는 처녀 수태(예수)와 무원죄 수태(마리아)로 원죄에서 벗어나고, 죽은 뒤에는 부활(예수) 내지 피승천(마리아)으로 송장의 부패(원죄의 증거)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모자聖母子는 성性과 철저히 분리됨으로써 성스러움이 지켜진다. 기독교에서 성聖과 성性의 배반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인간성 속에 본래부터 있었던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기독교와 철학이 압살해버려서 인간이 왜소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근대문명이 강제한 인간성의 질곡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저자는 이러한 니체의 주장을 인용하며 인간에게는 대뇌생리학에서 말하는, 신피질이 지배하는 이성적인 면과 구피질이 지배하는 정서적 면이 공존하고 있으므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사이좋게 협력하고 보완하는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다.
에게, 묵시록이 지배하는 땅
저자는 그리스 파묵칼레(고대명 히에라폴리스)에서 죽은 자들을 넣어둔 거대한 석관인 사르코파구스 1,200기가 늘어서 있는 ‘죽음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를 찾아다닌다. 네크로폴리스는 지상 세계에 돌출한 명계요 어둠의 세계였다. 그리스인의 세계관에서 명계는 지상의 현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은 폭과 의미(인간의 어둠의 부분을 지배하는 어둠의 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자 고대종교의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신전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신전이 파괴됨과 동시에 그리스 신들에 의해 지탱되었던 세계의 관념적인 구조도 무너져 자취를 감추었다.
묵시록적인 세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파묵칼레 근처에 있는 라오디케아 유적은 그러한 묵시록적인 세계를 대표한다. 이곳은 「요한묵시록」의 일곱 수신자 중의 하나였던 교회가 있던 곳으로 유명한데, 묵시록에서 “신의 입에서 뱉어진다”는 저주를 받은 탓인지 494년 무서운 대지진이 이 땅을 엄습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묵시록 전편을 관통하는 것은 세상이 점점 악화 일로를 걷는다는 확신이다.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는 진보의 관념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나빠지기만 하므로 당연히 종말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수도원의 발상은 여기에 그 출발점이 있다. 세상의 불의한 자, 더러운 자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자기들만은 그런 악의 세계를 떠나 의롭고 성스러운 생활을 계속해나가겠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발상이 아토스 수도원공화국의 존립 근거가 되는 것이다. 수도사들만 살고 여자들은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신의 땅, 그리스 헌법에서도 완전한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이곳을 여행하며 저자는 묵시록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역사는 영원회귀한다
저자는 밀레투스 유적에서도 이러한 종말론적인 멸망 이후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란 명제로 철학의 시조가 된 탈레스가 살았고, 막강한 해상통상국가로서 지중해 세계에 군림한 밀레투스에서 만난 황량한 풍경은 그 옛날 세계대전에 패하여 멸망한 옛 강대국이 적국에 철저히 유린되고 파괴당한 황폐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저자는 이미 완전히 망각해버린 까마득한 옛날부터 세계대전은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때마다 당대의 강대국이 멸망하여 번영과 영화의 흔적이 무로 돌아가버리기를 반복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기술된 것도 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 너머에는 정신이 아뜩해질 만큼 광대한 역사가 기술되지 않은 채 가로누워 있으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역사야말로 가장 정통한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158쪽)
그리고 저자는 이곳에서 명멸해갔던 고대세계의 유적들을 둘러보며 아포칼립스(묵시록)적인 세계의 종말도 머나먼 미래에 딱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일어났던 일이 또 다시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러한 영원회귀 사상은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가 이미 도달한 경지로서, 에게 여행 내내 저자의 중요한 정신적 동반자 역할을 한다.(92~99쪽)
모든 찰나에 존재는 비롯된다.
만물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도 그와 함께 회귀한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불가역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원환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시간이 원환이라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과거는 곧 미래이고, 미래는 곧 과거다.
현재는 영원히 흘러지나가는 순간순간이 아니라 영원 자체다.
현재는 이미 과거에도 무한하게 반복된 적이 있고, 미래에도 무한하게 반복된다.
사람은 바로 이 순간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살고 있다.
“보라, 이것이 영원인 것이다.”
■ 저자 소개
글/ 다치바나 다카시
1940년 나가사키현 출생. 1964년 도쿄대학 불문과 졸업. 저널리스트, 평론가.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은 수상의 범법 행위를 파헤쳐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인문․사회에 관련된 주제 외에도 우주, 뇌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저서로 『문명의 역설』, 『우주로부터의 귀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원숭이학의 현재』, 『임사체험』, 『뇌를 단련하다』, 『사색기행』 등 다수. 기쿠치 칸상, 고단샤 논픽션상, 마이니치출판문화상, 신초학예상, 시바료타로상 등의 수상 경력이 있다.
사진/ 스다 신타로
1957년 치바 현 태생. 니혼대학 예술학부 사진학과 졸업. 재학할 때부터 일본보도사진의 선구자 미키 준에게 사사. 1986년 일본사진협회 신인상 수상. 현재 국제사진잡지 《ZOOM Japan》 편집장. 사진주간지 《FOCUS》 창간호의 특종사진을 비롯하여 전 세계 40개국 이상을 여행하며 촬영한 대작 『인간이란 무엇인가』까지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준, 일본을 대표하는 보도사진가. 저서로 『주일대사의 맨얼굴』, 『80년대―선정적 보도의 시대』, 『고래를 잡다―고래잡이의 후예들』, 『신주쿠 정담』, 『빵의 책』 등이 있다.
옮긴이/ 이규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그동안 인문․역사․문학․과학 등의 여러 분야의 책을 기획․번역하였다. 현재는 경기도 축령산 자락의 수동마을에 자리를 잡고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개인적 체험』, 『왕들의 계곡』, 『뇌를 단련하다』, 『사색기행』,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