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삼인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내세의 개인구원보다 현세의 나라주권에 더 중점을 뒀던 것이다. 이는 군부독재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 쟁취에 온 뜻을 모았다.
그러한 역사를 움직인 수레바퀴가 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와 북간도의 '명동학교'가 그곳이다. 두 곳 모두 설립 이념과 지향하는 목표가 비슷했다. 기독교계 학교로서 학생들의 신앙심을 비롯하여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 투쟁에 온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지금껏 잘 알려진 곳은 오산학교와 그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남강 이승훈을 비롯하여 함석헌, 한경직, 주기철 목사가 그들이다. 그만큼 그들처럼 당대를 뒤흔든 인물들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북간도의 '명동학교'와 그곳 출신들도 만만치만은 않다. 규암 김약연을 비롯하여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김재준, 문재린,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강원룡, 이상철이 그곳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토록 위대한 영향을 미친 곳이 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는 역사적인 기록물이 나오지 않았던지 또는 적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산학교와 그곳 출신들에 대한 기록물들은 많이 쏟아졌지만, 명동학교에 관한 책들은 희귀했다.
손녀들이 풀어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 한민족의 이야기
문영금·문영미가 엮은 (삼인·2006)은 바로 명동학교를 주축으로 한 북간도의 교육운동과 독립운동, 사회참여를 위한 기독교운동이 어떻게 활발히 진행되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기린갑이'란 문재린 목사의 한자 이름을 풀어쓴 것이고, '고만녜'는 그의 아내 김신묵 여사의 이름을 풀어쓴 것이다. 문영금과 문영미는 문재린 목사의 두 아들인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교수의 딸들이다. 그렇기에 이 회고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직접 기록하여 남긴 글과 녹화된 영상물, 녹취록 등 원자료들을 가지고 그의 손녀들이 직접 집필한 것이다.
회고록 하면 보통 엮은이들의 주관적인 해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곤 한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그들 집안의 문중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함북과 만주 간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생생한 한민족의 이야기이며, 그야말로 세계 각지로 흩어진 한민족의 이민사와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사, 그리고 70∼80년대의 국내외 민주운동사를 담고 있다.
1899년 2월, 두만강 이남의 함북 지방에 살던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는 부모님 세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만주 화룡현 명동촌으로 집단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유학자 문병규, 남종구, 김약연, 김하규 등이 이끄는 스물두 집의 식구들을 포함하여 모두 142명이었다. 실학의 바탕 아래 자립과 개척정신을 지녔고, 자녀 교육과 민족의 독립정신을 가지고 도강했던 것이다. 실로 창조적인 소수였다.
그렇지만 1940년대 초에 일어난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용정 지역의 일반 주민들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명동학교도 한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었고, 급기야 폐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니 문재린과 김신묵 여사에게는 일본이 짐승이요,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문재린 목사는 해외에 유학을 떠났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김신묵 여사가 도맡았다. 그녀는 북간도에 남아 교회 일과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잔다르크'란 별명까지 얻었고, 훗날 토론토 한인회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재린 목사가 귀국하게 되고,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하자, 1946년 5월 28일 용정을 떠나 6월 16일에 남한 땅 서울에 도착한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고 60년대를 지나면서, 두 부부는 꿋꿋하고 올곧은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그가 행한 설교들은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유신시대 캐나다 한인회의 뒤에는...?
1971년 12월 21일, 나이가 들어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는 고국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 이른바 이민사회 속에 살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두 부부는 한국의 격변기를 알리는 통로가 되었다. '토론토 한국노인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한 것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친목단체의 성격이었으나 차츰 민주화 투쟁을 위한 성격으로 바꾸어 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박정희가 평생 독재를 위해 이미 나라 안팎의 여러 사람들을 매수해 놨기 때문이다.
"멀먼 책임관도 이런 사업은 교회보다 한인회가 하는 것이 옳다면서 한인회 편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한인회 쪽의 생각은 결국 조국 민주화 운동을 하는 연합교회가 이 사업을 주동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싸움은 날로 비열하게 되어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한인회 뒤에 박정희 정부의 정보기관이 개입했다고 한다." (책 298쪽)
그렇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투쟁운동을 자녀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두 아들인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교수는, 1976년 3월 나라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곳에서 수일 동안을 단식으로 투쟁하기도 했다.
그때 함께 구속된 역사적인 인물로는 서남동, 안병무, 김대중, 이문영, 이해동, 윤반웅,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등 민주 인사 11명이었고, 문익환 목사의 처 박용길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수모를 당했다. 그 구속자 중에서도 문익환과 김대중, 그리고 함세웅 신부는 주동자로 낙인찍혀 더욱 큰 고통을 당했다.
1978년 4월 7일 한국에 도착한 문재린 목사는 옥고를 치른 아들 익환과 동환을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9일부터는 한빛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고국에 머무는 7개월 동안 여러 교회와 민주 인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재판을 받는 법정에도,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각종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격려했다. 이른바 일선에서 발로 뛰는 투쟁은 청년들에게 맡겼고, 그는 당대의 원로로서 큰 틀을 가지고 민족의 미래를 설계해 줬던 것이다.
그토록 평생토록 신앙심을 바탕으로 교육운동과 독립운동, 민주화투쟁운동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까닭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것을 곧 '천국운동'이라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사안이지 않나 싶다.
"일선에 나서지는 못해도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을 뒤에서 돕고 격려하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 국민운동은 곧 천국 국민운동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324쪽)
"민주 국민운동은 곧 천국 국민운동이라"
"민주 국민운동은 곧 천국 국민운동이라"
[오마이뉴스 2006-09-09 16:28]
[오마이뉴스 권성권 기자]
ⓒ2006 삼인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하여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내세의 개인구원보다 현세의 나라주권에 더 중점을 뒀던 것이다. 이는 군부독재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의 핍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민주주의 쟁취에 온 뜻을 모았다.
그러한 역사를 움직인 수레바퀴가 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와 북간도의 '명동학교'가 그곳이다. 두 곳 모두 설립 이념과 지향하는 목표가 비슷했다. 기독교계 학교로서 학생들의 신앙심을 비롯하여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 투쟁에 온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지금껏 잘 알려진 곳은 오산학교와 그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남강 이승훈을 비롯하여 함석헌, 한경직, 주기철 목사가 그들이다. 그만큼 그들처럼 당대를 뒤흔든 인물들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북간도의 '명동학교'와 그곳 출신들도 만만치만은 않다. 규암 김약연을 비롯하여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김재준, 문재린,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 강원룡, 이상철이 그곳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토록 위대한 영향을 미친 곳이 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는 역사적인 기록물이 나오지 않았던지 또는 적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오산학교와 그곳 출신들에 대한 기록물들은 많이 쏟아졌지만, 명동학교에 관한 책들은 희귀했다.
손녀들이 풀어낸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 한민족의 이야기
문영금·문영미가 엮은 (삼인·2006)은 바로 명동학교를 주축으로 한 북간도의 교육운동과 독립운동, 사회참여를 위한 기독교운동이 어떻게 활발히 진행되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기린갑이'란 문재린 목사의 한자 이름을 풀어쓴 것이고, '고만녜'는 그의 아내 김신묵 여사의 이름을 풀어쓴 것이다. 문영금과 문영미는 문재린 목사의 두 아들인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교수의 딸들이다. 그렇기에 이 회고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직접 기록하여 남긴 글과 녹화된 영상물, 녹취록 등 원자료들을 가지고 그의 손녀들이 직접 집필한 것이다.
회고록 하면 보통 엮은이들의 주관적인 해석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곤 한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그들 집안의 문중 역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함북과 만주 간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생생한 한민족의 이야기이며, 그야말로 세계 각지로 흩어진 한민족의 이민사와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사, 그리고 70∼80년대의 국내외 민주운동사를 담고 있다.
1899년 2월, 두만강 이남의 함북 지방에 살던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는 부모님 세대와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만주 화룡현 명동촌으로 집단 이주했는데, 여기에는 유학자 문병규, 남종구, 김약연, 김하규 등이 이끄는 스물두 집의 식구들을 포함하여 모두 142명이었다. 실학의 바탕 아래 자립과 개척정신을 지녔고, 자녀 교육과 민족의 독립정신을 가지고 도강했던 것이다. 실로 창조적인 소수였다.
그렇지만 1940년대 초에 일어난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용정 지역의 일반 주민들은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더욱이 명동학교도 한글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었고, 급기야 폐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니 문재린과 김신묵 여사에게는 일본이 짐승이요,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문재린 목사는 해외에 유학을 떠났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김신묵 여사가 도맡았다. 그녀는 북간도에 남아 교회 일과 독립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잔다르크'란 별명까지 얻었고, 훗날 토론토 한인회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중 문재린 목사가 귀국하게 되고,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하자, 1946년 5월 28일 용정을 떠나 6월 16일에 남한 땅 서울에 도착한다. 그때부터 한국전쟁이 끝나고 60년대를 지나면서, 두 부부는 꿋꿋하고 올곧은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그가 행한 설교들은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유신시대 캐나다 한인회의 뒤에는...?
1971년 12월 21일, 나이가 들어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는 고국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 갔다. 이른바 이민사회 속에 살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비록 몸은 늙었지만 두 부부는 한국의 격변기를 알리는 통로가 되었다. '토론토 한국노인회'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한 것이 그것이었다. 처음에는 친목단체의 성격이었으나 차츰 민주화 투쟁을 위한 성격으로 바꾸어 갔다.
그러나 그것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박정희가 평생 독재를 위해 이미 나라 안팎의 여러 사람들을 매수해 놨기 때문이다.
"멀먼 책임관도 이런 사업은 교회보다 한인회가 하는 것이 옳다면서 한인회 편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한인회 쪽의 생각은 결국 조국 민주화 운동을 하는 연합교회가 이 사업을 주동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싸움은 날로 비열하게 되어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한인회 뒤에 박정희 정부의 정보기관이 개입했다고 한다." (책 298쪽)
그렇지만 그의 민주화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투쟁운동을 자녀들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두 아들인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교수는, 1976년 3월 나라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그곳에서 수일 동안을 단식으로 투쟁하기도 했다.
그때 함께 구속된 역사적인 인물로는 서남동, 안병무, 김대중, 이문영, 이해동, 윤반웅, 함세웅, 문정현, 신현봉 등 민주 인사 11명이었고, 문익환 목사의 처 박용길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수모를 당했다. 그 구속자 중에서도 문익환과 김대중, 그리고 함세웅 신부는 주동자로 낙인찍혀 더욱 큰 고통을 당했다.
1978년 4월 7일 한국에 도착한 문재린 목사는 옥고를 치른 아들 익환과 동환을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9일부터는 한빛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고국에 머무는 7개월 동안 여러 교회와 민주 인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재판을 받는 법정에도,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각종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격려했다. 이른바 일선에서 발로 뛰는 투쟁은 청년들에게 맡겼고, 그는 당대의 원로로서 큰 틀을 가지고 민족의 미래를 설계해 줬던 것이다.
그토록 평생토록 신앙심을 바탕으로 교육운동과 독립운동, 민주화투쟁운동에 온 힘을 기울일 수 있었던 까닭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것을 곧 '천국운동'이라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사안이지 않나 싶다.
"일선에 나서지는 못해도 하느님의 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이들을 뒤에서 돕고 격려하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민주 국민운동은 곧 천국 국민운동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3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