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녀를 맞이했던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이었다. 이리하여 4년의 유럽 체류 뒤 귀국한 송경령의 1930년대 활동은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국민 저항운동과 국제적 반제.반전.반파시즘 활동과 연계되면서 반장反蔣ㆍ민권운동과 항일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주력하였다.
송경령의 생애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빛나는 1930년대를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송경령은 일제의 계속되는 화북침략에 대한 장개석의 시종일관한 타협적인 양보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함과 동시에 거국적 항일구국운동을 펴나갔다.
장개석은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를 내걸고 철저한 ‘초공剿共’과 대일타협의 내전정책을 계속 고수함으로써 반장운동은 전국적 민중적 연합의 수준으로까지 고조되어 갔다. 특히 장개석의 등연달 살해와, 9⋅18사변 이후 학생의 항일요구를 철저하게 탄압한 장개석정권에 대해서 송경령은 그것을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붙여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또한 그녀는 상해사변 이후 직접 모금운동, 병원 건립, 부상병 치료 및 전선 방문과 같은 물심양면에 걸친 항일전 지원에 나섰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그녀는 군대의 항일의지가 곧 민중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고, 민중의 애국적 무장동원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민중의 민족의식을 토대로 장개석정권의 내전정책에 대한 저항력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또한 송경령은 중국민권보장동맹을 결성하여 정치적 이념과 당파를 떠나서 한 시민으로서 민권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초기 국민혁명의 이념에서 벗어나 극우적 권위주의적 정치성향을 띠면서 남의사, CC단 등의 비밀폭력집단을 동원하여 항일구국의 진보적 인사를 탄압하였다.
이에 대항한 송경령의 민권 또는 민주화운동은 혁명적 정치범을 보호하는 제도적 조직이었고, 민중이 벌이는 항일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또한 장개석정권의 독재강화에 제동을 거는 반정부 민간여론을 대표하고 있었다.
민권운동은 민주주의를 위한 독자적 의미를 갖는 운동이었음에도 당시 제국주의 침략 아래서 항일민족운동과 대중적 사회혁명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민권운동의 정신인 자유주의⋅박애주의적인 요소는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송경령은 1930년대 초기에 국제적으로 추진되던 반제⋅반파시즘운동에도 가담하였다. 즉 ‘혁명적 계급에 대한 억압을 배제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적으로 ‘파쇼적’ 정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35년에 접어들어 화북을 상실할 위기의 상황에서 중국 민중의 항일구국의지가 전국에 팽배하여 마침내 전국각계구국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자 송경령은 이 운동에 앞장섰다.
국민당은 ‘안내양외安內攘外’를 내걸고 대일 부不저항정책으로 일관하고, 오히려 민중의 항일운동을 탄압하였다. 공산당 중앙은 소비에트 건설과 계급혁명에 급급하여 일본침략으로 인한 민족모순에 대처하지 못한 채, 국민당의 초공작전에 대항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상황 속에 확대되는 민중의 항일 역량을 끌어내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송경령을 비롯한 재야의 중간파 또는 좌경 민주세력(민족자산계급을 포함한 좌파 인텔리겐치아)이었다.
12⋅9항일학생운동의 파장은 거국적 구국회운동으로 번져가, 마침내 ‘전국각계구국연합회’(1936)가 성립되어 구국전선이 형성되고, 항일과 민주를 목표로 한 항일구국회를 통하여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이 구국회 7인을 체포하자(7군자君子사건) 송경령은 그들이 감금된 소주감옥소로 가서 “구국이 죄라면 나도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항의하였다. 사실 제2차 민족통일전선(국공합작)의 성공은 이들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한 일반민중의 항일구국운동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국민당과 공산당을 항일구국운동이라는 민족공동의 과제 속으로 끌어들인 세력이 바로 이들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항전기간 동안 송경령은 항일통일전선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먼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송경령은 상해에서 20여 개의 부녀단체를 불러 모아 항일 구망救亡 단체를 영도하였고 국민당의 구국채권 모집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영⋅미의 대일불간섭 중립정책을 비판하고 국민정부에 대해 손문의 삼대정책을 실행하고 항일통일전선 구축을 촉구하는 한편, 국공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오랜 동안 끊어져 있던 국공 양당의 관계개선에 다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뒤 송경령의 구망활동 가운데 ‘보위중국동맹’은 중국 항일전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려서 항일전을 지지하게 함과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원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가 조직한 단체였다.
이 ‘보위중국동맹’은 항일전의 전 기간에 걸쳐 국제적인 중국원조기구와 해외 화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들의 국제적 지원으로 아동⋅부녀⋅부상병⋅난민⋅유격대전사를 도울 수 있었다.
이어서 일본군이 천진⋅상해⋅광동 등 주요 항구를 함락시킴에 따라 중국 공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자 레위 알리,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등 외국인이 발안하여 ‘공업합작사’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바로 운동전(게릴라전)에 적합하게 이동 가능한 조직 형태(소규모 공장설립과 산재한 노동력의 결합 형태)를 취하는 공업으로서 난민구제 수단으로도 유효하였고, 노동자의 경영참가 원칙으로 운영되는 민주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송경령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더구나 그녀는 이 운동을 더욱 발전시킬 목적에서 ‘중국공업합작사국제위원회’(1939)를 발족시켜 국내외의 많은 인사가 참가함으로써 ‘공업합작사’운동은 정부 통제에서 벗어난 대중운동으로서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다음 송경령은 항일통일전선의 유지를 위해 어떠한 정치적 논평도 삼갔다. 뿐만 아니라 헤어졌던 세 자매는 다시 단결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들 세 자매가 단결한 모습은 국공합작의 굳건한 상징으로 보였다.
그러나 환남사변皖南事變(1941) 이후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자 그녀는 장개석정권을 거세게 비난하였다. 이 사변에서 중간 입장에 섰던 많은 단체와 개인이 내전 반대를 외치고 공산당 지지로 나섰다. 그녀는 끝까지 항일․단결․민주를 고수하고, 손문의 신삼민주의와 3대정책의 실행을 주장하였다. 중일전쟁의 끝남과 함께 국공연합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던 송경령의 노력도 무산되고, 국공내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녀는 점차 중공으로 기울어져, 내전이 끝나자 결국 중공정권과 합류하였다.
5. 인민공화국 참여와 사회주의 사상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에는 인민공화국 출범을 알리는 모택동 옆에 송경령은 부주석으로 서 있었다. 인민공화국에 합류한 송경령은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라는 지위와 함께 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 인민구제총회 주석, 중소우호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송경령이 중공을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시 중국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좌우의 양자택일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공이 국민정부보다 대중적 반제 사회혁명에 더 접근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무한정부가 무너지고 그녀는 이미 국민당과 결별하였고, 등연달 살해 이후 장개석의 독재체제 구축을 위한 정치운용 방식, 정권구조의 비민주성, 부패, 무능에 그녀는 크게 실망하여 ‘국민당은 이미 정치세력이 아니다’라는 ‘송경령선언’을 발표한 바 있었다. 특히 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 장개석의 비민중적 투쟁방식은 효과가 없었다.
곧 민중을 무장동원 하는 항일투쟁은 항일전쟁시기 같은 아주 심각한 제국주의적 침략 아래서는 불가피한 전략이라고 송경령은 이해하였고, 중공이 이 전략에 성공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국민당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송경령을 비롯한 각 민주당파로 하여금 중공에 합류시킨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정치적 권리나 인권 및 민권의 개념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는, 이런 것들을 지녀 온 송경령을 비롯한 재야 민주세력에게는 이상적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비록 전략적인 면에서 중공의 대중운동을 지지하고, 인도적인 면에서 중공을 지원하긴 했지만, 국민당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시기에 와서 그들은 결국 중
공으로 가야만 했다
1956년 북경에서 장문천 모택동 주은래 진의와 함께(좌로부터)
사회주의는 송경령의 꿈 가운데 일부는 충족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시행착오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과연 만족하였으며, 그녀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모택동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부르짖은 다음 이어 불어 닥친 반우파투쟁의 암흑기에 그는 방관자로서 있었다. 그때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까?
그녀는 장개석의 일당독재를 맹렬하게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손문이 남긴 유산의 한 본질로서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송경령은 공산당 치하에서는 국민당 치하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행동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현상인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공산주의는 생사를 건 투쟁이 불가피하고 공산당을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세 번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었다.
공산주의자들 송경령을 손문혁명의 계승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 편으로 합류했다. 토법제철운동이나 인민공사화化의 대약진운동 때도 송경령은 협력하였다. 팽덕회와 유소기가 우익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어도, 미친 듯한 문화대혁명 때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사회는 그런 것이었다.
송경령에 대해 중공정부는 그녀의 공헌을 인정하고 세심하게 보답하였다. 한편, 그녀는 정치적으로 모든 헌신을 다 했지만, 정책입안에는 관여치 않았다. 그녀의 역할을 더 명예로우며 상징적인 것에 있었다.
그녀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명성은 그녀가 공산당 측에 서서 함께 싸운 것에 대한 하나의 선물이었다. 또한 그녀가 중국 본토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산주의자들에게 손문혁명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보증을 해준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직위는 저절로 그녀에게 붙어 다녔다.
1981년 5월 29일, 88세의 나이로 송경령은 북경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하였고, 곧 그녀는 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의 칭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공에 합류한 송경령의 사상적 측면, 곧 손문주의의 계승과 좌경화, 그리고 그녀가 지닌 민족주의, 박애주의의 성향과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경령은 손문이 그의 혁명에서 절정기에 이른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한 국민혁명을 고수하기 위해 손문주의 이념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그것을 이른바 신삼민주의, 3대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우파는 물론 국민당 좌파마저 이 노선을 포기한 다음에도 송경령은 새로운 상황에 따라 손문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점차 좌경화해 갔다.
다시 말해 그녀는 손문보다 더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적 원칙성, 보편성을 고집하여 손문주의를 반제․사회혁명의 필요성에 더욱 철저히 결합하도록 재해석함으로써 국공합작에 따른 대중적 민족혁명노선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다. 그녀와 손문 사이에 일정한 사상적 굴절이나 변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손문의 혁명적 낙관주의에 따른 애국적 혁명의지만은 장개석이나 국민당 좌파의 그 누구보다 송경령에게서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손문주의에는 민족주의(구국주의)를 중심으로 불평등조약의 폐지, 점진적 사회정책적 요소를 포함한 국가자본주의적 지향성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송경령이 이를 더욱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적 반제․사회혁명의 이념으로 변용시켰던 것은, 그녀가 손문의 만년, 가변적인 전략지침이었던 이른바 3대정책을 삼민주의의 본질로 규정하고, 일정한 연속성이 있는 구삼민주의와 신삼민주의를 단절된 것으로 구분한 점에 잘 집약되어 있다.
송경령이 손문주의를 계승하는 방식은, 모든 혁명은 본질적으로 사회혁명이라는 그녀의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노농대중은 혁명동원의 주체로서 더욱 절대시되었던 것이다.
송경령은 이처럼 손문주의를 좌경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구별되지만 결국 국민당 좌파로서 민주주의․국가자본주의의 요소를 갖는 사회주의 사상에 도달하였다. 송경령이 손문의 혁명운동에 참여한 것은 손문의 만년,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과정에서 본격화되었으며, 또 국민당 좌파가 주도하던 국민혁명 초기까지 좌파의 일원으로서 그녀의 사상은 사회주의화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송경령의 좌경화가 확인되고 좌파의 시각에서 손문주의와 국민혁명을 이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은 1927년이었다. 바로 국민당의 반제⋅사회혁명노선 포기와 국공분열의 사태에 직면하여 당의 현실노선과 혁명의 과제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진보적 계급연합과 대중적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다 보니 반장反蔣․연공聯共의 입장을 지탱하게 되었다. 결국 만주사변 이후 항일구국운동의 격화 과정에서 실질적 무력을 갖춘 국공 두 세력 가운데 송경령은 국민혁명 이념에 더욱 가까운 중공 쪽으로 다가가는 오랜 과정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송경령의 이상주의 국제주의적 경향은 민주적인 반제⋅사회혁명의 국제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송경령의 사상 경향이야말로 그녀를 기타의 국민당 좌파와도 구별짓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일제의 9⋅18사변과 그와 같은 시기의 국민당 좌파 등연달 처형사건을 계기로 송경령의 사회주의화와 반장투쟁은 더욱 확고한 현실적 기초를 갖게 되었다. 그녀의 민권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이 국제적 반제⋅반파쇼 논리와 맞물리며 펼쳐짐에 따라 그녀의 민주적 사회주의 지향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주요한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송경령은 손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좌경화하였는데, 사실 이 두 서로 다른 사상을 결합시킨 기본 사고는 청년시기부터 만년까지 그녀 사상의 밑바탕이 되었던 민족주의와 민주․박애사상이었다. 이 두 가지 사상 요인은 그녀의 손문주의 해석이나 사회주의 사상을 꿰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여성운동, 사회복지활동까지 포괄하고 있다.
송경령 사상의 출발점은 언제나 민족주의(구국주의)로서, 이것은 반제⋅반파시즘⋅항일운동을 꿰는 대전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그녀의 민주⋅박애사상은 바로 민족과 국가의 구원을 핵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민주⋅박애사상은 청년기의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하여 그 뒤의 민권, 여성, 사회주의운동과 사회복지활동을 포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의 민족주의, 기독교사상, 자유주의에서부터 반제, 사회주의 사상으로 전개되어 가는 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중국이 놓인 제국주의 아래의 반식민지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국민정부의 비민중적 정책과 아울러, 이 시대 청년지식층의 사고를 특징짓는 국제주의․이상주의라는 보편적 진보적 사고의 틀이었다고 생각된다.
6. 중국혁명에서 송경령의 위치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으로, 또 송씨 가족의 일원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는 1920, 1930년대 중국혁명에서 독자적 노선을 지켜가며 크게 영향을 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 혁명정치가였고 사회활동가였으며, 인류의 평화와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한 국제적 명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90년 가까이 살면서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안주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혁명운동에 몸을 바쳤다. 송경령이 추구한 반제 민족해방운동은 민주⋅박애주의의 이상과 결합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당시 반식민지 반봉건적 시대상황에서 노동자⋅농민 및 여성의 해방을 사회혁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다.
송경령은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혁명의 무대로, 미국 유학에서 애국혁명의 길로 크게 변신하면서, 신해혁명 이래로 손문 곁에서 그를 따라 혁명에 발을 들여놓았다. 또한 송경령은 손문의 아내이자 비서, 동지로서 반원反袁투쟁, 호법護法운동, 북벌, 국민당 개조 등 혁명사업에 함께 참가하였다.
1920년대 손문 사후에 송경령은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정치적 사상적으로 독자 위치를 확립하였다. 혁명이 발전함에 따라 그녀는 또한 손문주의에 대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내렸고, 국공분열 이후에는 국민당의 지도권을 장악한 장개석정권의 정치노선에 끝까지 저항한 국민당 좌파 인물로서도 유명하다.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구국운동 시기에는 세계 반제⋅반파시즘 운동과 중국민권보장동맹을 통해 반장⋅항일노선을 지켜가고 그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항일통일전선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종전 뒤 내전을 거치면서 그녀는 끝내는 중공정권 건설에 합류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여러 정부요직을 맡는 한편 여성과 아동을 위한 평화⋅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송경령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다만 중국 현대여성사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중국현대사의 주도세력으로 국민정부와 중공의 양대세력이 표출되어 가는 과정에서 민주적 중간파나 국민당 좌파의 존재이유,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모색과 정치적 선택을 연구하는 데서도 중요한 사례연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손문의 부인으로서 상징적인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 역사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이나 중공과의 특수관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현대사에서 송경령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같은 송경령의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민족과 조국에 끼친 업적들을 간추려 보아야 할 것이다.
송경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주의자였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녀의 미국 유학도 단순한 것이 아니고 목표가 명확히 정해져 있었음은 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송경령이 27세나 나이 차이 나는 아버지의 친구인 손문과 결혼하는 동기를 살펴볼 때, 그녀의 애국심을 능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부모나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웅으로 숭배하던 손문과 대담하게 결혼한 것은 “진정한 혁명운동의 중심으로 접근하기 위한 것이며, 손문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떠올릴 때, 그것은 그녀의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의 열정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송경령의 애국적 공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1, 2차 국공합작에 기울인 노력을 들 수 있다. 송경령이 손문 생전에 그의 국공합작사업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밀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의 사후 무한정부 붕괴시기까지의 위기에서 국공분열을 반대하여 합작, 단결, 통일을 옹호한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문의 국공합작정책의 알맹이라고 본 것은 이른바 신삼민주의와 3대정책이었다. 송경령이 국민당 우파와 좌파가 차례로 포기한 국공합작을 끝까지 지켜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녀의 처지에서 국공합작이 깨져서는 당시의 정세에서 사회혁명과 반제혁명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경령이나 중공이 말하는 이른바 3대정책에, 공농대중운동 말고도 용공容共과 연소聯蘇가 있는데, 이 둘은 국공합작을 가능케 하는 한 조건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점차 거세지는 일본 침략 속에서 송경령은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에는 ‘국민어모자구회’를 조직하고 ‘중화인민대일작전기본강령’을 발표하였으며, 1934년에는 ‘중화민족무장자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산당의 ‘항일구국 6대강령’을 지지하였으며, 12․9운동(1935) 이후 1936년에는 ‘전국각계구국연합회’의 성립에 참여하여 광범한 구국전선을 형성하였다.
1931년에서 1937년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송경령은 상해에서 재야의 입장에서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에 심신을 바쳤다. 아울러 전 민족을 동원한다는 발상, 곧 계급과 정당을 초월한 전 민족의 동원이라는 방법을 씀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정당에 매몰되지 않고, 혁명에 동원시킬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다 동원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송경령은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송경령의 애국주의․구국주의는 일제침략 아래서 민권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을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통합시켜 나간 혁명적 민족주의였다.
다음으로, 송경령은 사회활동가였음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
그녀는 중국의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빈민구제와 복지사업에 몰두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난민과 고아의 구제에 헌신하였으며, 신중국 성립 뒤에는 모자건강과 아동교육에 애착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38년에 그녀는 항일전의 참된 정황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아울러 중국항전에 얼마나 원조가 절실한가를 이해시켜 국제적으로 더 많은 전시물자를 얻어 항일무장 근거지를 원조하기 위해 ‘보위중국동맹’을 만들었다. 송경령의 활동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항일전이 끝난 뒤 그녀는 내전기간 동안에는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로 바꾸어 부녀와 아동위생과 전쟁고아를 위한 문화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0년에는 중국복리기금회를 다시 중국복리회로 개조하고 부녀아동보건과 소년아동문화교육사업에 힘썼으며, 아울러 국가적으로는 중국인민구제총회 집행위원회 주석에 선임되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회의 복지증진에 헌신하였다.
또한 송경령은 여성해방의 제창자였다. 그녀는 한평생을 하루같이 여성해방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큰 공헌을 하였다.
그녀는 청년시절부터 “하늘의 반쪽을 지탱하는 여성을 소외시킨 인류사회의 발전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인류의 반쪽 여성을 높이는 것 없이는 또 다른 반쪽인 남성을 높일 수 없다”는 기본적인 남녀 천부인권의 평등을 전제한 사상을 제기하였다. 우선 송경령은 여성과 혁명의 관계를 불가분의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각 시기마다 그 시기의 혁명주체로서 여성을 인식시키고 혁명대열에 참여시키고자 노력하고, 혁명의 완성이 바로 여성해방을 가능케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은 혁명운동의 한 부분이므로 국민혁명에 참여해야 하며, 국가의 자유․독립 획득은 바로 여성 자신의 해방을 얻는 길이며, 여성은 바로 국민의 한 부분이라 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을 다만 내용이 빈곤한 여권주의의 기치 아래서가 아닌 민주운동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경령은 세계평화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로맹 롤랑, 조지 버나드쇼, 앙리 바르뷔스,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막심 고리끼, 앨버트 아인슈타인 등 반전, 반파시즘연합전선조직을 제창한 세계 각국의 우호적인 인사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세계반제대동맹의 명예주석으로 있으면서 국제적 반제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지키는 데 힘썼다.
이 같은 국제적 활동과 구제복리사업을 함으로써 평화를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한 공로로 1950년 송경령은 ‘스탈린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송경령이 일생 동안 벌인 혁명활동은 노동자․농민과 같은 피억압 기층대중과 여성대중의 해방에 일관된 역점을 두고 있는데, 이 같은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것은 그녀의 박애주의(휴머니즘)의 발전형태라 할 수 있겠다.
송경령의 삶 속에 흐르고 있는 민족주의와 박애주의적인 면에 그녀는 국내외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친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에드가 스노우는 “송경령은 중국의 미완성 혁명의 양심이며 항구적 핵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님 웨일즈(Nym Wales, Helen F. Snow)는 “어떤 사람도 정치에서는 성인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정치의 한가운데서 상처를 안고 있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정치에서 물러나 있는 송경령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중국의 양심이며 인간 본성의 승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빈센트 쉬언(Vincent Sheean)은 “그녀는 순전히 개성의 힘과 동기의 순수성과 최고의 정직에 힘입어 영웅이 되었다. 중국혁명의 좌절 속에서 이 같은 현상은 가장 비범한 일 가운데 하나다” 라고 하였다.
로맹 롤랑은 “우리의 탁월한 부주석 송경령 여사는 그저 세계에서 향기를 내는 아름다운 꽃일 따름인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둘러쳐진 철조망을 물어뜯어 버리려는 용맹스런 사자다” 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인도의 네루 수상은 “지나간 세월 동안 어떠한 폭풍과 비바람이 중국을 뒤흔들었어도 그녀의 신념은 결코 비틀거리지 않았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평화를 위해 울려 퍼졌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 송경령은 내면의 순수성과 강직성에 뒷받침된 이상주의자로서, 세속적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적 원칙을 순수하게 고집해 나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경령은 단지 손문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홀로 자립한 혁명정치가이며 사회활동가이며 여성해방운동의 제창자이며 세계평화운동가이며 아울러 애국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도덕심이 높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과 가치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단호하고 용기 있게 밀고 나갔다. 반면에 감성적이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섬세한 성품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송경령은 많은 글을 썼는데, 그녀의 문장은 절도가 있고 간결하고도 논쟁적이었으며, 90세 가까이 살면서 그녀는 중국과 중국민족을 사랑하고 대중 편에 선 많은 글을 펴냈다.
등소평鄧小平은 송경령이 죽은 뒤 추도사에서 “송경령은 세상에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애국주의.민주주의.국제주의.공산주의의 위대한 전사이며, 세계평화와 인류의 진보사업에 헌신하여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다 바친 위대한 여성으로, 어떠한 정황에서도 정치의 원칙성을 굳게 지키며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 부단히 전진하여 혁명민주주의자에서 위대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필자는 송경령이 민주주의자였으며 국제주의적 우호와 평화옹호자였으며 민족주의자였음에는 동의하지만 공산주의자였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송경령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과제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박애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로서, 그녀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은 진정 대중 편에 선, 다 함께 잘사는 사회, 자유⋅평등⋅박애의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을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있을 수 있다면 송경령은 바로 그것을 지향하는 민주 사회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지조 있는 여성혁명가, 송경령<2>
[ 지조 있는 여성혁명가, 송경령 ]
4. 반장反蔣, 항일시기의 활동
송경령은 1931년 어머니 예계진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다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녀를 맞이했던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이었다. 이리하여 4년의 유럽 체류 뒤 귀국한 송경령의 1930년대 활동은 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국민 저항운동과 국제적 반제.반전.반파시즘 활동과 연계되면서 반장反蔣ㆍ민권운동과 항일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주력하였다.
송경령의 생애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빛나는 1930년대를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송경령은 일제의 계속되는 화북침략에 대한 장개석의 시종일관한 타협적인 양보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함과 동시에 거국적 항일구국운동을 펴나갔다.
장개석은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를 내걸고 철저한 ‘초공剿共’과 대일타협의 내전정책을 계속 고수함으로써 반장운동은 전국적 민중적 연합의 수준으로까지 고조되어 갔다. 특히 장개석의 등연달 살해와, 9⋅18사변 이후 학생의 항일요구를 철저하게 탄압한 장개석정권에 대해서 송경령은 그것을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붙여 격렬하게 규탄하였다.
또한 그녀는 상해사변 이후 직접 모금운동, 병원 건립, 부상병 치료 및 전선 방문과 같은 물심양면에 걸친 항일전 지원에 나섰다.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그녀는 군대의 항일의지가 곧 민중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깨닫고, 민중의 애국적 무장동원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민중의 민족의식을 토대로 장개석정권의 내전정책에 대한 저항력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또한 송경령은 중국민권보장동맹을 결성하여 정치적 이념과 당파를 떠나서 한 시민으로서 민권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초기 국민혁명의 이념에서 벗어나 극우적 권위주의적 정치성향을 띠면서 남의사, CC단 등의 비밀폭력집단을 동원하여 항일구국의 진보적 인사를 탄압하였다.
이에 대항한 송경령의 민권 또는 민주화운동은 혁명적 정치범을 보호하는 제도적 조직이었고, 민중이 벌이는 항일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또한 장개석정권의 독재강화에 제동을 거는 반정부 민간여론을 대표하고 있었다.
민권운동은 민주주의를 위한 독자적 의미를 갖는 운동이었음에도 당시 제국주의 침략 아래서 항일민족운동과 대중적 사회혁명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민권운동의 정신인 자유주의⋅박애주의적인 요소는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송경령은 1930년대 초기에 국제적으로 추진되던 반제⋅반파시즘운동에도 가담하였다. 즉 ‘혁명적 계급에 대한 억압을 배제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적으로 ‘파쇼적’ 정권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1935년에 접어들어 화북을 상실할 위기의 상황에서 중국 민중의 항일구국의지가 전국에 팽배하여 마침내 전국각계구국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자 송경령은 이 운동에 앞장섰다.
국민당은 ‘안내양외安內攘外’를 내걸고 대일 부不저항정책으로 일관하고, 오히려 민중의 항일운동을 탄압하였다. 공산당 중앙은 소비에트 건설과 계급혁명에 급급하여 일본침략으로 인한 민족모순에 대처하지 못한 채, 국민당의 초공작전에 대항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상황 속에 확대되는 민중의 항일 역량을 끌어내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송경령을 비롯한 재야의 중간파 또는 좌경 민주세력(민족자산계급을 포함한 좌파 인텔리겐치아)이었다.
12⋅9항일학생운동의 파장은 거국적 구국회운동으로 번져가, 마침내 ‘전국각계구국연합회’(1936)가 성립되어 구국전선이 형성되고, 항일과 민주를 목표로 한 항일구국회를 통하여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이 구국회 7인을 체포하자(7군자君子사건) 송경령은 그들이 감금된 소주감옥소로 가서 “구국이 죄라면 나도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항의하였다. 사실 제2차 민족통일전선(국공합작)의 성공은 이들 진보적 지식인을 비롯한 일반민중의 항일구국운동에서 말미암은 것이고, 국민당과 공산당을 항일구국운동이라는 민족공동의 과제 속으로 끌어들인 세력이 바로 이들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항전기간 동안 송경령은 항일통일전선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먼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송경령은 상해에서 20여 개의 부녀단체를 불러 모아 항일 구망救亡 단체를 영도하였고 국민당의 구국채권 모집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영⋅미의 대일불간섭 중립정책을 비판하고 국민정부에 대해 손문의 삼대정책을 실행하고 항일통일전선 구축을 촉구하는 한편, 국공합작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오랜 동안 끊어져 있던 국공 양당의 관계개선에 다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뒤 송경령의 구망활동 가운데 ‘보위중국동맹’은 중국 항일전의 진상을 전 세계에 알려서 항일전을 지지하게 함과 동시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원조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가 조직한 단체였다.
이 ‘보위중국동맹’은 항일전의 전 기간에 걸쳐 국제적인 중국원조기구와 해외 화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들의 국제적 지원으로 아동⋅부녀⋅부상병⋅난민⋅유격대전사를 도울 수 있었다.
이어서 일본군이 천진⋅상해⋅광동 등 주요 항구를 함락시킴에 따라 중국 공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자 레위 알리,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등 외국인이 발안하여 ‘공업합작사’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바로 운동전(게릴라전)에 적합하게 이동 가능한 조직 형태(소규모 공장설립과 산재한 노동력의 결합 형태)를 취하는 공업으로서 난민구제 수단으로도 유효하였고, 노동자의 경영참가 원칙으로 운영되는 민주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송경령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더구나 그녀는 이 운동을 더욱 발전시킬 목적에서 ‘중국공업합작사국제위원회’(1939)를 발족시켜 국내외의 많은 인사가 참가함으로써 ‘공업합작사’운동은 정부 통제에서 벗어난 대중운동으로서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된 다음 송경령은 항일통일전선의 유지를 위해 어떠한 정치적 논평도 삼갔다. 뿐만 아니라 헤어졌던 세 자매는 다시 단결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들 세 자매가 단결한 모습은 국공합작의 굳건한 상징으로 보였다.
그러나 환남사변皖南事變(1941) 이후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자 그녀는 장개석정권을 거세게 비난하였다. 이 사변에서 중간 입장에 섰던 많은 단체와 개인이 내전 반대를 외치고 공산당 지지로 나섰다. 그녀는 끝까지 항일․단결․민주를 고수하고, 손문의 신삼민주의와 3대정책의 실행을 주장하였다. 중일전쟁의 끝남과 함께 국공연합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던 송경령의 노력도 무산되고, 국공내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그녀는 점차 중공으로 기울어져, 내전이 끝나자 결국 중공정권과 합류하였다.
5. 인민공화국 참여와 사회주의 사상
1949년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에는 인민공화국 출범을 알리는 모택동 옆에 송경령은 부주석으로 서 있었다. 인민공화국에 합류한 송경령은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라는 지위와 함께 전국부녀연합회 명예주석, 인민구제총회 주석, 중소우호협회 회장 등을 맡았다.
송경령이 중공을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시 중국의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라는 좌우의 양자택일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공이 국민정부보다 대중적 반제 사회혁명에 더 접근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무한정부가 무너지고 그녀는 이미 국민당과 결별하였고, 등연달 살해 이후 장개석의 독재체제 구축을 위한 정치운용 방식, 정권구조의 비민주성, 부패, 무능에 그녀는 크게 실망하여 ‘국민당은 이미 정치세력이 아니다’라는 ‘송경령선언’을 발표한 바 있었다. 특히 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 장개석의 비민중적 투쟁방식은 효과가 없었다.
곧 민중을 무장동원 하는 항일투쟁은 항일전쟁시기 같은 아주 심각한 제국주의적 침략 아래서는 불가피한 전략이라고 송경령은 이해하였고, 중공이 이 전략에 성공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국민당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송경령을 비롯한 각 민주당파로 하여금 중공에 합류시킨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정치적 권리나 인권 및 민권의 개념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는, 이런 것들을 지녀 온 송경령을 비롯한 재야 민주세력에게는 이상적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비록 전략적인 면에서 중공의 대중운동을 지지하고, 인도적인 면에서 중공을 지원하긴 했지만, 국민당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시기에 와서 그들은 결국 중
공으로 가야만 했다
1956년 북경에서 장문천 모택동 주은래 진의와 함께(좌로부터)
사회주의는 송경령의 꿈 가운데 일부는 충족시켰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시행착오가 나타났을 때 그녀는 과연 만족하였으며, 그녀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모택동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부르짖은 다음 이어 불어 닥친 반우파투쟁의 암흑기에 그는 방관자로서 있었다. 그때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까?
그녀는 장개석의 일당독재를 맹렬하게 공격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손문이 남긴 유산의 한 본질로서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송경령은 공산당 치하에서는 국민당 치하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행동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현상인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공산주의는 생사를 건 투쟁이 불가피하고 공산당을 선택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세 번째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었다.
공산주의자들 송경령을 손문혁명의 계승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 편으로 합류했다. 토법제철운동이나 인민공사화化의 대약진운동 때도 송경령은 협력하였다. 팽덕회와 유소기가 우익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어도, 미친 듯한 문화대혁명 때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사회는 그런 것이었다.
송경령에 대해 중공정부는 그녀의 공헌을 인정하고 세심하게 보답하였다. 한편, 그녀는 정치적으로 모든 헌신을 다 했지만, 정책입안에는 관여치 않았다. 그녀의 역할을 더 명예로우며 상징적인 것에 있었다.
그녀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명성은 그녀가 공산당 측에 서서 함께 싸운 것에 대한 하나의 선물이었다. 또한 그녀가 중국 본토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산주의자들에게 손문혁명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보증을 해준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직위는 저절로 그녀에게 붙어 다녔다.
1981년 5월 29일, 88세의 나이로 송경령은 북경에서 백혈병으로 사망하였고, 곧 그녀는 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의 칭호를 받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공에 합류한 송경령의 사상적 측면, 곧 손문주의의 계승과 좌경화, 그리고 그녀가 지닌 민족주의, 박애주의의 성향과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송경령은 손문이 그의 혁명에서 절정기에 이른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한 국민혁명을 고수하기 위해 손문주의 이념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그것을 이른바 신삼민주의, 3대정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장개석의 국민당 우파는 물론 국민당 좌파마저 이 노선을 포기한 다음에도 송경령은 새로운 상황에 따라 손문주의를 재해석함으로써 점차 좌경화해 갔다.
다시 말해 그녀는 손문보다 더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적 원칙성, 보편성을 고집하여 손문주의를 반제․사회혁명의 필요성에 더욱 철저히 결합하도록 재해석함으로써 국공합작에 따른 대중적 민족혁명노선을 견지해 나갔던 것이다. 그녀와 손문 사이에 일정한 사상적 굴절이나 변용이 있다고 할지라도, 손문의 혁명적 낙관주의에 따른 애국적 혁명의지만은 장개석이나 국민당 좌파의 그 누구보다 송경령에게서 연속성을 찾을 수 있다.
손문주의에는 민족주의(구국주의)를 중심으로 불평등조약의 폐지, 점진적 사회정책적 요소를 포함한 국가자본주의적 지향성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송경령이 이를 더욱 이상주의적 국제주의적 반제․사회혁명의 이념으로 변용시켰던 것은, 그녀가 손문의 만년, 가변적인 전략지침이었던 이른바 3대정책을 삼민주의의 본질로 규정하고, 일정한 연속성이 있는 구삼민주의와 신삼민주의를 단절된 것으로 구분한 점에 잘 집약되어 있다.
송경령이 손문주의를 계승하는 방식은, 모든 혁명은 본질적으로 사회혁명이라는 그녀의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노농대중은 혁명동원의 주체로서 더욱 절대시되었던 것이다.
송경령은 이처럼 손문주의를 좌경시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구별되지만 결국 국민당 좌파로서 민주주의․국가자본주의의 요소를 갖는 사회주의 사상에 도달하였다. 송경령이 손문의 혁명운동에 참여한 것은 손문의 만년,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과정에서 본격화되었으며, 또 국민당 좌파가 주도하던 국민혁명 초기까지 좌파의 일원으로서 그녀의 사상은 사회주의화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송경령의 좌경화가 확인되고 좌파의 시각에서 손문주의와 국민혁명을 이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은 1927년이었다. 바로 국민당의 반제⋅사회혁명노선 포기와 국공분열의 사태에 직면하여 당의 현실노선과 혁명의 과제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위기 상황에 대처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국민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진보적 계급연합과 대중적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다 보니 반장反蔣․연공聯共의 입장을 지탱하게 되었다. 결국 만주사변 이후 항일구국운동의 격화 과정에서 실질적 무력을 갖춘 국공 두 세력 가운데 송경령은 국민혁명 이념에 더욱 가까운 중공 쪽으로 다가가는 오랜 과정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송경령의 이상주의 국제주의적 경향은 민주적인 반제⋅사회혁명의 국제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송경령의 사상 경향이야말로 그녀를 기타의 국민당 좌파와도 구별짓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일제의 9⋅18사변과 그와 같은 시기의 국민당 좌파 등연달 처형사건을 계기로 송경령의 사회주의화와 반장투쟁은 더욱 확고한 현실적 기초를 갖게 되었다. 그녀의 민권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이 국제적 반제⋅반파쇼 논리와 맞물리며 펼쳐짐에 따라 그녀의 민주적 사회주의 지향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주요한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송경령은 손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좌경화하였는데, 사실 이 두 서로 다른 사상을 결합시킨 기본 사고는 청년시기부터 만년까지 그녀 사상의 밑바탕이 되었던 민족주의와 민주․박애사상이었다. 이 두 가지 사상 요인은 그녀의 손문주의 해석이나 사회주의 사상을 꿰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여성운동, 사회복지활동까지 포괄하고 있다.
송경령 사상의 출발점은 언제나 민족주의(구국주의)로서, 이것은 반제⋅반파시즘⋅항일운동을 꿰는 대전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그녀의 민주⋅박애사상은 바로 민족과 국가의 구원을 핵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한편 민주⋅박애사상은 청년기의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하여 그 뒤의 민권, 여성, 사회주의운동과 사회복지활동을 포괄하고 있다. 그렇다면 초기의 민족주의, 기독교사상, 자유주의에서부터 반제, 사회주의 사상으로 전개되어 가는 계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중국이 놓인 제국주의 아래의 반식민지 상황과 이에 대처하는 국민정부의 비민중적 정책과 아울러, 이 시대 청년지식층의 사고를 특징짓는 국제주의․이상주의라는 보편적 진보적 사고의 틀이었다고 생각된다.
6. 중국혁명에서 송경령의 위치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으로, 또 송씨 가족의 일원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는 1920, 1930년대 중국혁명에서 독자적 노선을 지켜가며 크게 영향을 준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 혁명정치가였고 사회활동가였으며, 인류의 평화와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한 국제적 명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90년 가까이 살면서 파란만장한 중국현대사 속에서 평범한 여성으로 안주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혁명운동에 몸을 바쳤다. 송경령이 추구한 반제 민족해방운동은 민주⋅박애주의의 이상과 결합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당시 반식민지 반봉건적 시대상황에서 노동자⋅농민 및 여성의 해방을 사회혁명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다.
송경령은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혁명의 무대로, 미국 유학에서 애국혁명의 길로 크게 변신하면서, 신해혁명 이래로 손문 곁에서 그를 따라 혁명에 발을 들여놓았다. 또한 송경령은 손문의 아내이자 비서, 동지로서 반원反袁투쟁, 호법護法운동, 북벌, 국민당 개조 등 혁명사업에 함께 참가하였다.
1920년대 손문 사후에 송경령은 국민혁명의 과정에서 정치적 사상적으로 독자 위치를 확립하였다. 혁명이 발전함에 따라 그녀는 또한 손문주의에 대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내렸고, 국공분열 이후에는 국민당의 지도권을 장악한 장개석정권의 정치노선에 끝까지 저항한 국민당 좌파 인물로서도 유명하다.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의 항일구국운동 시기에는 세계 반제⋅반파시즘 운동과 중국민권보장동맹을 통해 반장⋅항일노선을 지켜가고 그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항일통일전선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종전 뒤 내전을 거치면서 그녀는 끝내는 중공정권 건설에 합류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는 여러 정부요직을 맡는 한편 여성과 아동을 위한 평화⋅복지사업에 헌신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송경령의 사상과 정치활동은 다만 중국 현대여성사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중국현대사의 주도세력으로 국민정부와 중공의 양대세력이 표출되어 가는 과정에서 민주적 중간파나 국민당 좌파의 존재이유,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모색과 정치적 선택을 연구하는 데서도 중요한 사례연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본다.
손문의 부인으로서 상징적인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 역사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이나 중공과의 특수관계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현대사에서 송경령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 같은 송경령의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민족과 조국에 끼친 업적들을 간추려 보아야 할 것이다.
송경령은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주의자였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녀의 미국 유학도 단순한 것이 아니고 목표가 명확히 정해져 있었음은 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송경령이 27세나 나이 차이 나는 아버지의 친구인 손문과 결혼하는 동기를 살펴볼 때, 그녀의 애국심을 능히 가늠해 볼 수 있다.
부모나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웅으로 숭배하던 손문과 대담하게 결혼한 것은 “진정한 혁명운동의 중심으로 접근하기 위한 것이며, 손문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을 떠올릴 때, 그것은 그녀의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의 열정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송경령의 애국적 공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1, 2차 국공합작에 기울인 노력을 들 수 있다. 송경령이 손문 생전에 그의 국공합작사업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밀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의 사후 무한정부 붕괴시기까지의 위기에서 국공분열을 반대하여 합작, 단결, 통일을 옹호한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문의 국공합작정책의 알맹이라고 본 것은 이른바 신삼민주의와 3대정책이었다. 송경령이 국민당 우파와 좌파가 차례로 포기한 국공합작을 끝까지 지켜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녀의 처지에서 국공합작이 깨져서는 당시의 정세에서 사회혁명과 반제혁명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경령이나 중공이 말하는 이른바 3대정책에, 공농대중운동 말고도 용공容共과 연소聯蘇가 있는데, 이 둘은 국공합작을 가능케 하는 한 조건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점차 거세지는 일본 침략 속에서 송경령은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에는 ‘국민어모자구회’를 조직하고 ‘중화인민대일작전기본강령’을 발표하였으며, 1934년에는 ‘중화민족무장자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산당의 ‘항일구국 6대강령’을 지지하였으며, 12․9운동(1935) 이후 1936년에는 ‘전국각계구국연합회’의 성립에 참여하여 광범한 구국전선을 형성하였다.
1931년에서 1937년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송경령은 상해에서 재야의 입장에서 장개석과 국민당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에 심신을 바쳤다. 아울러 전 민족을 동원한다는 발상, 곧 계급과 정당을 초월한 전 민족의 동원이라는 방법을 씀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정당에 매몰되지 않고, 혁명에 동원시킬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다 동원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송경령은 제2차 국공합작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송경령의 애국주의․구국주의는 일제침략 아래서 민권운동과 항일민족운동을 항일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 통합시켜 나간 혁명적 민족주의였다.
다음으로, 송경령은 사회활동가였음을 높게 평가하여야 한다.
그녀는 중국의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빈민구제와 복지사업에 몰두하였으며, 전쟁 중에는 난민과 고아의 구제에 헌신하였으며, 신중국 성립 뒤에는 모자건강과 아동교육에 애착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1938년에 그녀는 항일전의 참된 정황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아울러 중국항전에 얼마나 원조가 절실한가를 이해시켜 국제적으로 더 많은 전시물자를 얻어 항일무장 근거지를 원조하기 위해 ‘보위중국동맹’을 만들었다. 송경령의 활동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항일전이 끝난 뒤 그녀는 내전기간 동안에는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로 바꾸어 부녀와 아동위생과 전쟁고아를 위한 문화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0년에는 중국복리기금회를 다시 중국복리회로 개조하고 부녀아동보건과 소년아동문화교육사업에 힘썼으며, 아울러 국가적으로는 중국인민구제총회 집행위원회 주석에 선임되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사회의 복지증진에 헌신하였다.
또한 송경령은 여성해방의 제창자였다. 그녀는 한평생을 하루같이 여성해방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큰 공헌을 하였다.
그녀는 청년시절부터 “하늘의 반쪽을 지탱하는 여성을 소외시킨 인류사회의 발전은 존재할 수 없으며, 인류의 반쪽 여성을 높이는 것 없이는 또 다른 반쪽인 남성을 높일 수 없다”는 기본적인 남녀 천부인권의 평등을 전제한 사상을 제기하였다. 우선 송경령은 여성과 혁명의 관계를 불가분의 것으로 보았다.
그녀는 각 시기마다 그 시기의 혁명주체로서 여성을 인식시키고 혁명대열에 참여시키고자 노력하고, 혁명의 완성이 바로 여성해방을 가능케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여성운동은 혁명운동의 한 부분이므로 국민혁명에 참여해야 하며, 국가의 자유․독립 획득은 바로 여성 자신의 해방을 얻는 길이며, 여성은 바로 국민의 한 부분이라 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을 다만 내용이 빈곤한 여권주의의 기치 아래서가 아닌 민주운동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경령은 세계평화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녀는 로맹 롤랑, 조지 버나드쇼, 앙리 바르뷔스,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막심 고리끼, 앨버트 아인슈타인 등 반전, 반파시즘연합전선조직을 제창한 세계 각국의 우호적인 인사들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세계반제대동맹의 명예주석으로 있으면서 국제적 반제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지키는 데 힘썼다.
이 같은 국제적 활동과 구제복리사업을 함으로써 평화를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한 공로로 1950년 송경령은 ‘스탈린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송경령이 일생 동안 벌인 혁명활동은 노동자․농민과 같은 피억압 기층대중과 여성대중의 해방에 일관된 역점을 두고 있는데, 이 같은 사회혁명을 강조하는 것은 그녀의 박애주의(휴머니즘)의 발전형태라 할 수 있겠다.
송경령의 삶 속에 흐르고 있는 민족주의와 박애주의적인 면에 그녀는 국내외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친지들이 증언하고 있다.
에드가 스노우는 “송경령은 중국의 미완성 혁명의 양심이며 항구적 핵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님 웨일즈(Nym Wales, Helen F. Snow)는 “어떤 사람도 정치에서는 성인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정치의 한가운데서 상처를 안고 있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정치에서 물러나 있는 송경령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중국의 양심이며 인간 본성의 승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빈센트 쉬언(Vincent Sheean)은 “그녀는 순전히 개성의 힘과 동기의 순수성과 최고의 정직에 힘입어 영웅이 되었다. 중국혁명의 좌절 속에서 이 같은 현상은 가장 비범한 일 가운데 하나다” 라고 하였다.
로맹 롤랑은 “우리의 탁월한 부주석 송경령 여사는 그저 세계에서 향기를 내는 아름다운 꽃일 따름인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둘러쳐진 철조망을 물어뜯어 버리려는 용맹스런 사자다” 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인도의 네루 수상은 “지나간 세월 동안 어떠한 폭풍과 비바람이 중국을 뒤흔들었어도 그녀의 신념은 결코 비틀거리지 않았으며,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평화를 위해 울려 퍼졌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 송경령은 내면의 순수성과 강직성에 뒷받침된 이상주의자로서, 세속적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적 원칙을 순수하게 고집해 나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경령은 단지 손문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홀로 자립한 혁명정치가이며 사회활동가이며 여성해방운동의 제창자이며 세계평화운동가이며 아울러 애국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도덕심이 높으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과 가치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단호하고 용기 있게 밀고 나갔다. 반면에 감성적이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섬세한 성품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송경령은 많은 글을 썼는데, 그녀의 문장은 절도가 있고 간결하고도 논쟁적이었으며, 90세 가까이 살면서 그녀는 중국과 중국민족을 사랑하고 대중 편에 선 많은 글을 펴냈다.
등소평鄧小平은 송경령이 죽은 뒤 추도사에서 “송경령은 세상에 널리 그 이름이 알려진 애국주의.민주주의.국제주의.공산주의의 위대한 전사이며, 세계평화와 인류의 진보사업에 헌신하여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다 바친 위대한 여성으로, 어떠한 정황에서도 정치의 원칙성을 굳게 지키며 역사의 발걸음을 따라 부단히 전진하여 혁명민주주의자에서 위대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필자는 송경령이 민주주의자였으며 국제주의적 우호와 평화옹호자였으며 민족주의자였음에는 동의하지만 공산주의자였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송경령은 그녀가 살던 시대의 과제에 따라 민족주의, 민주⋅박애주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자로서, 그녀가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은 진정 대중 편에 선, 다 함께 잘사는 사회, 자유⋅평등⋅박애의 사회를 추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을 위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있을 수 있다면 송경령은 바로 그것을 지향하는 민주 사회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