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은·이구·이우 등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 일부는 일본인으로 귀화하기도… 의친왕 이강의 3·1운동 배후설과 상하이 망명기도설 있지만 확인은 어려워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따금 언론 보도를 통해 황실 후손들의 근황이 전해질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나라를 말아먹고도 당신들은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냐”는 냉소다. 그 말에 섣불리 토를 달긴 힘들다.
1910년 8월29일 맺어진 한일합방조약 3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와 태황제 폐하와 황태자 폐하 전하와 그 후(后)와 비(妃) 및 그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과 권위와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그것을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고 못박고 있다. 쉽게 말해 “나라는 빼앗더라도, 당신들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해주겠다”는 배려인 셈이다. 이 때문에 ‘반민법안’을 만든 남조선과도입법의회 회의석상에서 의열단 출신 독립투사 박건웅 의원(1990년 독립장 서훈)은 “동경의 이왕은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민족 반역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왕실, 조선 황실에 교제비 지원
해방 이전까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정신적으로는 말 못할 수모를 당해왔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 왕실의 보호 아래 풍족한 생활을 누려온 것은 사실이다. 영친왕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를 혼인시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한 일본 왕실은 ‘이왕가’로 몰락한 옛 조선 황실에 매년 120만엔의 교제비를 지원했다. 일본 방송인 혼다 세쓰코가 1988년 써낸 를 보면 “120만엔의 수입은 천황가에 다음가는 거액의 비용이었다”(그 무렵 총리대신의 연봉이 1만엔가량)며 “그 때문에 많은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은 이왕가를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적었다.
이후 영친왕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는 17살이던 1913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7년 5월 졸업했고 같은 해 12월5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0년 12월7일 일본 군부의 핵심 엘리트가 될 사람들만 가려 뽑는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인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한 죄로 2차 대전 이후 교수당한 홍사익 중장 등 4명뿐이다. 이후 영친왕은 1931년 8월1일 대좌(대령)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으로 부임했고, 1938년 7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39년 8월 근위보병 제2여단장, 1940년 5월 오사카 사단장을 거쳐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이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창씨명으로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 동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사에서 황실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황실재건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종엽(32)씨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황실 변수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황실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다. 이강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한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각별한 사이였다. 3·1운동이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3월3일을 앞두고 계획됐고, 당시 사람들은 고종의 독살설을 대부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만세 사건인 1926년 6·10 만세 사건이 터진 날은 순종의 인산일이었다.) 안천 서울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이강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뒤에서 조종한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시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태화관은 의친왕의 사저였던 사동궁과 담 하나를 끼고 남쪽에 있었습니다. 탑골공원과 태화관은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고, 사동궁과 태화관은 2분 걷는 거리의 담 하나 앞집입니다.”
30여명 자손을 둔 의친왕, 반일 산아투쟁?
3·1운동이 진압된 뒤 이강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대동단 사건’으로 기억한다. 대동단 사건은 1919년 10월10일 조선을 빠져나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구한말 대신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이강을 모셔오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운동가 정정화(작고) 여사는 1987년 펴낸
황실, 친일과 항일 사이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따금 언론 보도를 통해 황실 후손들의 근황이 전해질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나라를 말아먹고도 당신들은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냐”는 냉소다. 그 말에 섣불리 토를 달긴 힘들다.
1910년 8월29일 맺어진 한일합방조약 3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와 태황제 폐하와 황태자 폐하 전하와 그 후(后)와 비(妃) 및 그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과 권위와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그것을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고 못박고 있다. 쉽게 말해 “나라는 빼앗더라도, 당신들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해주겠다”는 배려인 셈이다. 이 때문에 ‘반민법안’을 만든 남조선과도입법의회 회의석상에서 의열단 출신 독립투사 박건웅 의원(1990년 독립장 서훈)은 “동경의 이왕은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민족 반역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 왕실, 조선 황실에 교제비 지원
해방 이전까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정신적으로는 말 못할 수모를 당해왔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본 왕실의 보호 아래 풍족한 생활을 누려온 것은 사실이다. 영친왕과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를 혼인시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천한 일본 왕실은 ‘이왕가’로 몰락한 옛 조선 황실에 매년 120만엔의 교제비를 지원했다. 일본 방송인 혼다 세쓰코가 1988년 써낸 를 보면 “120만엔의 수입은 천황가에 다음가는 거액의 비용이었다”(그 무렵 총리대신의 연봉이 1만엔가량)며 “그 때문에 많은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은 이왕가를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고 적었다.
이후 영친왕은 ‘왕족’이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일본 군부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는 17살이던 1913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17년 5월 졸업했고 같은 해 12월5일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0년 12월7일 일본 군부의 핵심 엘리트가 될 사람들만 가려 뽑는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한국인으로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영친왕 이은, 의친왕 이강의 두 아들 이건과 이우 그리고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한 죄로 2차 대전 이후 교수당한 홍사익 중장 등 4명뿐이다. 이후 영친왕은 1931년 8월1일 대좌(대령)로 진급해 보병 59연대장으로 부임했고, 1938년 7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뒤, 1939년 8월 근위보병 제2여단장, 1940년 5월 오사카 사단장을 거쳐 1940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해방 이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모모야마 겐이치라는 창씨명으로 일본인으로 귀화해 일본에 동화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사에서 황실의 역할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황실재건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종엽(32)씨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황실 변수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한황실의 독립운동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다. 이강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한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각별한 사이였다. 3·1운동이 고종의 인산일(장례일)인 3월3일을 앞두고 계획됐고, 당시 사람들은 고종의 독살설을 대부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만세 사건인 1926년 6·10 만세 사건이 터진 날은 순종의 인산일이었다.) 안천 서울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이강은,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뒤에서 조종한 핵심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민족대표 33인은 당시 유명한 요릿집이었던 태화관은 의친왕의 사저였던 사동궁과 담 하나를 끼고 남쪽에 있었습니다. 탑골공원과 태화관은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고, 사동궁과 태화관은 2분 걷는 거리의 담 하나 앞집입니다.”
30여명 자손을 둔 의친왕, 반일 산아투쟁?
3·1운동이 진압된 뒤 이강이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역사는 이 사건을 ‘대동단 사건’으로 기억한다. 대동단 사건은 1919년 10월10일 조선을 빠져나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한 구한말 대신 동농 김가진(1846~1922)이 이강을 모셔오기 위해 꾸민 사건이었다. 김가진의 며느리인 독립운동가 정정화(작고) 여사는 1987년 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