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상품화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상품화김기덕 감독

박창현200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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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상품화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상품화

김기덕 감독 본인도 밝힌 바 있듯이 김기덕 감독 영화의 중요한 소재는 ‘성’이다. ‘섬’, ‘파란 대문’, ‘나쁜남자’에 이어 ‘사마리아’까지 ‘성’이라는 소재의 연장선 상에 있다. ‘김기덕 감독은 창녀영화만 만든다’는 여성단체의 비난과 반발에도 아랑곳 않고 김 감독은 꾸준히 ‘성’소재의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것은 일부 단체에서 주장하는 ‘성의 상품화’와는 오히려 동떨어진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사마리아’는 ‘성을 상품화하지 않겠다는 의식’자체를 상품화한 기이한 영화다. 남성관객을 위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 영화라면 남성인 필자도 얼마든지 유쾌하게, 순수하게 즐기면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잇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 ‘사마리아’는 즐거운 영화를 관람하려는 개인의 소시민적인 생각을 철저히 깨부순다. 김기덕 감독은 그 점이 영화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철저히 의도된 것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를 테면 저예산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 그 자체가 이중적인 광고일 뿐이다. 굳이 헐리우드 식의 블록버스터와 그래픽 일색의 영화를 차치하고라도, 영화는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 상업주의 예술양식이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투자에 비례해 그 이익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고 정상적인 발상인 것이다. 신인 배우를 발굴하거나 무명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시나리오가 다듬어지지 않고 매우 엉성한 것, ‘셋트’라는 개념에 대해 도외시를 넘어서 무시하다시피 한 것 등의 사실이 관객에게 주는 허무함은 가히 엄청난 것이어서, ‘우리 영화계에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다’, ‘저예산으로도 할 수 있다’, ‘열흘 만에 찍었다’와 같은 김기덕 감독의 말은 자신의 천재성과 작가의식을 자화자찬하려는 ‘감독의 변’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그 곳에 있다. 16mm 독립영화를 찍겠다는 것도 아닌데 저예산으로, 짧은 시간 안에 촬영하였음을 강조하여 광고하는 것이다. 그 광고로 인해 영화는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포장되며, 그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감독은 일절 책임을 지지 않는다. 더 나아가 대중성을 따지는 관객과 평론가들의 의식까지 은밀히 비판하려 한다.
이와 같은 감독의 계획의도 덕분에 영화는 계속 일그러진다. 여진의 아버지(이얼 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평균이하를 맴돌고 몇몇 조연들은 TV재연 프로그램 출연자의 연기보다 더 어색함을 버젓이 드러낸다. 특히 음악을 한다는 남자의 연기는 대사를 감정없이 읽는다는 느낌마저 들어 대본을 읽어보는 것이 훨씬 공감이 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내가 더럽니? 내가 더럽구나.” 라고 말하고 차를 몰고 가버리는 장면, 병원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 등) 또한 사건의 전개가 전혀 극적이지 않고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져서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재영(한여름 분)이 남성들과 관계를 맺는 동안 줄기차게 경찰들이 들이닥쳐 결과적으로는 재영이 죽게되기까지 하지만 여진(곽지민 분)이 남성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경찰차 꽁무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남성은 여진의 아버지가 ‘어린 여자 만나러 왔습니까?’라고 묻는 말에 부정하지도 않으며, 재영이 죽었을 때 음악가 남자는 여진 앞에서 아주 어설픈 연기로 확실하게 통화를 한다. 마치 여진이 남자의 전화내용을 당연히 들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여진의 아버지가 딸의 원조교제 장면을 발견하는 대목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위화로움이 발생한다. 살해된 여자가 있던 방과 딸이 관계를 하던 방이 마주보고 있었다는 우연성은 논의에서 빼자. 그렇다고 해도 딸이 잇던 방의 투명창문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살해된 여자가 있던 방의 불투명 창문을 열고 아버지가 내다보니, 반대편에 자신의 딸이 나이든 남자 품에 안겨있는 장면이 투명창문을 통해 엿보인다. 감독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모텔에 의뢰해 불투명 창문을 투명창문으로 바꾸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건과 사건의 인과성이 떨어지고 대단히 ‘작위적’인 점은 소소한 사건을 넘어서 이야기의 중심사건에서도 이어진다. 영화 초반부에서 여진의 가정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더 나아가 화목하다. 어머니가 없는 대신 아버지가 직접 찌개를 끓이고 계란프라이를 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음악을 틀어줌으로써 딸의 아침을 조심스레 깨우며, 학교가는 차 안에서 매일 해외토픽 기사를 외워서 이야기해주는 등 여태까지 다정다감하고 자상하게 딸을 대했을 아버지는 사건 이후 딸과 대화를 하려 하기는커녕 집요한 추적과 활극을 이어가는 사이코로 내비친다. 이것은 이얼의 내면연기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면이 있으며, 아내가 죽은 상황에서 딸만 보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쉽지는 않지만 충격의 수위를 공감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고등학생 딸을 둔 아버지의 투신자살은 어떻게도 공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딸과 관계를 맺고 나오는 남자를 집요하게 따라가 잘못했다는 반성의 말(현실감있게 들린다)을 듣지만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고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집에 쳐들어가 막말을 하고 남자의 따귀를 사정없이 때린다. 이런 왜곡된 인물의 행동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해될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남자의 투신자살은 작위를 넘어선 감독의 폭력이다. 남자는 이얼이 쳐들어올 당시 식사중이었다. 부인과 어머니, 딸과 늦둥이인 듯한 아들까지 있는 가장이 식사 중에 자살을 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감상적‧낭만적 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도 안되는 죽음 앞에서 감독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또한 딸의 방황을 중단시키려는 의지없이 관찰만 하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태도와 집요한 활극은 우발적인 상황에서만 이해되고 공감받을 수 있는 것인데 패턴이 심화되어 반복됨으로써 그의 태도와 행동이 전혀 우발적이지 않고 철저히 계획적이지 않느냐 하는 의심까지 일게 한다. 사랑이라면 모든 걸 용서해줄 수 있다는 태도 하에서도,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살인도 불사하는 아버지의 활극이 등가로 교환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이 영화에서 그나마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두 장면이 죽은 비유로 일관됨은 감독의 참신함에 대한 고민이 그리 길지 않았거나, 감독의 수준이 그 정도에서 머물렀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첫 번째 장면은 아버지가 샤워기의 물을 내리맞는 장면, 이 장면은 처녀성을 잃은 여진이 한 행동과 중첩되는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성서에 나오는 물에 의한 세례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는 물에 의해 씻김을 당함으로써 원죄를 치유받게 되지만 영화 속 아버지는 치유받기는커녕 활극으로 일관한다. 두 번째 장면은 강가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다가 하는 말, ‘아버진 이제 따라가지 않을 거야.’이다. 이것은 딸을 놔두고 가버리는 다음 사건을 암시하는 동시에 운전을 하는 동안뿐 아니라 앞으로도 너는 나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 역시 ‘인생=길’이라는 죽은 비유에 근거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쓸쓸한 눈길이 여운에 남을 뿐 기억에 남을만한 참신한 쇼크는 될 수 없다.
영화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는데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바로 이 영화의 포스터이다. 수녀 코이프만 쓰고 있는 곽지민의 모습이나 속옷만 입고 남자의 손에 몸을 맡긴 한여름의 뒷모습 등은 상당히 선정적이다. 포스터에서는 성의 상품화를 추구하고 영화 안에서는 성의 상품화를 거부하는 아이러니는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하면서 그 논리를 거부하는 척 하는 행동과 같다.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인과 작중의 사마리아는 얼마나 닮았을까, 얼마나 비슷하길래 제목까지 짓고, ‘너희 중에 죄없는 자 이 소녀에게 돌을 던지라’라는 슬로건까지 내걸었을까. 광고전단에는 재영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여진이 바수밀다처럼 남자들을 정화해간다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남자들은 전혀 정화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