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철 지난 제국주의에 아시아가 떨고 있다.

최용일200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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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왜곡이 도를 넘고 있다. 동북공정을 통해 한민족사의 대부분을, 그래서 한반도의 대부분을 중국 땅으로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은 이미 역사왜곡을 넘어 침략의 단계로 들어선 듯하다. 동북공정만이 아니라 이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동해공정을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이 '중화'라는 이름으로 추진해온 역사왜곡의 시작이 아니라 각종 역사공정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무리 단계 작업이라는데 심각성이 있으며, 언제든지 중화패권주의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아시아 대다수 국가들이 떨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각종 역사공정을 통해 주변 국가의 역사를 자국 역사에 속속 편입시키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미 중국은 서남공정, 서북공정을 통해 베트남 등 동남아와 몽고, 티벳, 신장 위구르 등의 역사를 모두 중국에 편입시키는 게걸스런 19세기의 제국주의 망령에 빠져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용광로 같은 패권주의가 오늘 중국의 모습이니 조폭 이웃을 잘못 만난 것이 우리만의 고민은 아닌 듯하다.


중국은 이미 80년대 시작부터 티베트, 몽골, 신장 위구르족에 대한 새로운 역사해석에 들어가 독립국가로서의 역사를 말소하고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중국 역사에 편입시켰으며 베트남에 대해서도 분쟁의 소지가 있는 역사해석을 서슴지 않고 있다.


티베트의 중국 역사편입은 서남공정(西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서남공정은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 중국장학연구중심(中國藏學硏究中心)이 주도적으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는데, 지금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동북공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며,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의 모의훈련이기도 했다. 


티베트는 1950년 중국 공산정권의 침략을 받아 이듬해 달라이라마가 국외로 망명하면서 정복됐지만 7세기초 국가를 형성한 이후 원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제외하고는 독립적인 국가형태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1986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에 따라 시작된 서남공정은 티베트가 자고이래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당나라 시절 장안까지 세력을 넓혀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8세기 티베트 역사를 통째로 누락시켰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이민정책으로 티베트 내 한족의 반경이 확대되고 있고 최근에는 칭짱철도의 개통으로 중국에 흡수되는 속도에 가속이 붙고 있다. 티베트의 후손들은 선조의 역사를 상실한 채 중국의 변방 지방정부로 추락했고 티베트는 뿌리마저 침탈당한 채 역사는 말끔히 지워졌다.


몽골은 선조인 칭기즈칸에 대해 당연히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중화의 관점에서 보면 칭기즈칸도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한사람이다. 중국은 지난 1995년 '몽골국통사' 3권을 출판하면서 "몽골의 영토는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몽골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서적출판은 학술활동일 뿐이며 중국 정부의 공식은 아니다"라는 판에 박힌 답변을 듣는데 그쳤다.


그나마 몽골의 경우는 그래도 티벳보다는 나은 편이다. 내몽골은 중국 땅이 되어 있지만 현재 몽골이 독립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광활한 영토위에 세운 원나라가 명나라의 주원장에 밀려 북원으로 웅거하다가 17세기 청나라에 완전히 복속되면서 몽골은 역사에서 한때 사라지는 듯 했으나 청의 멸망과 중화민국 성립을 틈타 1911년 독립을 선언했다. 내몽골은 일본군의 패퇴이후 마오쩌둥이 접수했다. 마오쩌둥은 내몽골을 접수하면서 자치구로 인정하겠다고 약속, 1947년 중국에서 첫 자치구가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재 몽골공화국인 당시의 외몽골이 소련의 힘을 등에 업고 1924년에는 몽골인민공화국 독립을 선언, 세계에서 두 번 째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는 점이다. 중국은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향력 때문에 몽골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으나 덩샤오핑 이후 역사편입이라는 방식으로 몽골에 대해 입질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의 몽골 역사 편입은 몽골이 현재 몽골공화국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로 분할돼 있어 언제든지 영토분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80년대부터 신장(新疆) 위구르족을 대상으로 한 역사 및 지리에 대한 종합연구인 서북공정(西北工程)을 진행해왔다. 돌궐이라는 명칭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위구르족은 583년 수나라에 패해 동서 돌궐로 나뉘어 이용당하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실패로 멸망하면서 잠시 부흥하는 듯 했으나 다시 당나라에 의해 반세기동안 지배를 받는 등 파란만장한 굴곡을 갖고 있다. 당나라는 발해를 공략하기 위해 돌궐을 동원하기도 했다. 당나라 지배에서 벗어난 위구르족은 후돌궐을 세웠으나 부족간 내분으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후 돌궐제국을 출범시키는 등 중앙아시아 역사의 주역을 담당해왔으나 1755년 청나라 건륭제가 이 지역에서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 돌궐족 영토는 `새로운 영토(新疆)'로 중국사에 편입됐다.


중국은 신장지역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한나라 시기부터 신장지역이 월씨(月氏)족, 강(羌)족, 흉노, 한족이 섞여 살던 다민족 지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나라가 기원전 60년에 신장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한 이후 중국 역대 왕조가 신장을 군사 정치적으로 관할했다고 소개하면서 신장이 원래 중국 영토였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측은 역대 통치권의 강약에 따라 신장에 대한 장악력도 다소 강약이 있긴 했으나 신장의 각 부족은 중국 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왔고 `중화민족 대가정(大家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모나 언어, 문자, 종교가 완전히 중국과는 다른 전혀 다르면서도 `중국의 일부'로 교육받고 있는 게 현재 위구르족의 현실이며 중국 정부의 정책에 따라 한족들이 빠르게 서쪽으로 이동, 신장 자치구의 한족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 1949년 신장에서 위구르족 비율은 76%였으나 2000년엔 59%로 떨어졌다.


중국 영토가 된지 불과 250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위구르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강하다. 최근에도 위구르족 일부는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명의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혈족 국가를 옆에 두고 있고 멀리는 터키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민족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날조가 어렵고 또한 집요하다.


티베트와 같이 중국에 복속된 소수민족은 역사날조에 ‘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민정책에 의해 역사 속으로 흩어지면서 쉽게 역사날조 공정이 마무리되고 있다. 그러나 몽골, 위구르 등은 그 민족이 여전히 중국 밖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저항하고 있다. 마치 동북아의 조선족처럼 중국 안에 남은 민족의 일부는 어쩔 수 없이 그 역사를 날조 당하는데 이용당하고 사민정책에 의해 흩어지는 비운을 겪고 있지만 티벳과는 달리 중국의 역사날조에 연대할 뿌리가 남아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인 듯해 보이지만 바람 앞에 등불 격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이 고대사부터 왜곡을 시도하면서 적지 않은 역사 분쟁 소지를 남기고 있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중국은 베트남 역사에 대해 초기부터 개입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기원전 2879년 송코이강(紅河) 델타지역에 건립된 반랑(文郞) 왕국을 촉(蜀)의 왕자 반(泮)이 현지 부족민들을 이끌고 굴복시키고 아우락 왕조를 건립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208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남비엣(南越)의 수도는 지금의 광저우(廣州)인 피언응우였는데 남비엣은 기원전 196년 중국에 대한 조공관계를 인정했다가 기원전 112년 이를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남비엣]의 성격인데, 베트남은 [남비엣]이 자주독립 국가였다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은 독립 국가가 아닌 중국 남방지역에 할거한 지방정권이었다고 각종 역사책에 기술하고 있다. 남비엣 건국 이전에도, 남비엣 멸망 이후에도 영토 대부분이 중국영토의 한 부분이었다는 게 그 이유다. 남비엣이 한나라에 반기를 든 기원전 112년 한무제는 10만대군으로 남비엣 정벌에 나서 1년만에 수도를 점령하고 남비엣 정권을 평정했다. 이후 베트남은 1천년 이상을 중국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 전래의 모계적 가족체제가 유교적인 부계적 가족체계로 변하는 등 중국화가 이뤄졌다.


베트남은 당나라 쇠퇴시기인 939년에서야 응오퀴엔(吳權) 장군이 박당강 전투로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독립국인 다이비엣(大越)을 세웠으며 다이비엣은 1804년 베트남으로 개칭됐다. 중국 학자들이 펴낸 `동아사(東亞史)'는 "한나라 문화는 베트남 초기 고대문화를 형성한 주류이자 독립 후에도 문화발전의 기초가 됐으며 정치제도, 건축, 예술 방면에서도 중국 문화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은 것이 사실인 베트남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지만, 독립국가인 베트남의 고대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베트남이 후세에라도 광둥(廣東), 광시(廣西)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가능성에 대비, 역사적 명분을 축적하자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이 통일후 만주의 영유권을 주장하는데 대비한다는 동북공정의 배경과도 일치한다.


중국이 지금 하고 있는 각종 역사공정은 땅의 역사다. 현재 땅을 가진 자가 그 땅의 역사와 문화를 가지며, 그 후손의 역사와 문화도 가져야 한다는 점유권적 발상 내지는 노예제에 기초하는 야만적 역사관이다. 현재 차지하고 있는 땅에서 이뤄진 모든 역사를 '중화'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다. 현재의 중국 땅을 조금이라도 밟고 일어서 깃발을 올린 모든 국가의 역사는 자국 역사라는 주장은 유사 이래 세계 어느 망나니 국가도 시도한 바 없는 역사날조 방식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이러한 어거지 사관과 역사만들기를 통해 모든 아시아 국가를 중국에 편입시킨다는 중화사관이 제국주의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요, 금, 원, 청 등 유사이래 타민족이 중국 땅을 더 오래 차지했던 쓰라린 역사, 그리고 근대에 들어오면서 유럽 각국과 일본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했던 종이 호랑이가 맛본 제국주의의 쓰라린 맛까지... 창세 이래 수없이 당했던 중국의 콤플렉스가 자기를 짓밟았던 민족을 말살하고 그 역사를 자기 역사로 왜곡하는 것을 보면서 머슴이 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훔쳐 양반행세를 하는 도적사를 본다. 거기에 피비린내와 젖비린내가 어우러져 소아병적인 역사보복 코믹드라마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서 요나라도, 금나라도, 원나라도, 청나라도 모두 중국인의 역사여야 하는 것이 중국식 사관인 것이다. 한맺힌 피정복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역사 콤플렉스의 극복방법인데 그에 대응하는 주변국들의 감정적 반응이 가미될 경우 아시아 역사는 철저히 소설이 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런 이웃을 가진 우리만이 이른바 실증사관에 입각하여 우매한 역사과학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순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무식한 인간처럼 성적표를 날조할 필요는 없지만 아시아 연대를 통해 중국의 역사날조에 조목조목 대응할 필요가 있다.


탁록대전의 치우천왕에서 보듯이 중국 서남의 묘만족과 동북의 동이족은 어쩜 같은 역사적 시조를 공유하는지도 모른다는 점을 공동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돌궐과 몽골은 고구려 이전까지는 같은 땅에 같은 나라를 일구며 살던 같은 민족일 수도 있다. 금이나 청 역시 숙신, 읍루, 말갈, 여진으로 이어지는 같은 지역을 공유하던 같은 민족일 수 있다. 그러니 동아시아사를 통해 서로의 공유된 역사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2004년에 정치권 일각에서 나왔던 한몽 국가연합론이 다시 논의되어야 할 시점이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집을 불려야 한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역시 2004년에 아시아 인터넷을 떠돌던 중국의 8등분 음모에 적극 동참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언제나 작은 나라,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로만 남아 있다가 중국사 속으로 사라져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의 철지난 제국주의적 만행에 아시아가 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의 제 무덤 파기가 아니라고 누가 보증할 것인가?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