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끝난 경기장을 청소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가끔씩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지금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길게 잡아 보름 전에는 누구나 그것에 관해 얘기를 했었다. 제국의 광풍처럼 그것에 관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마 그것은 한달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에 관해 답을 찾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혹여 아는가. 게임 끝난 경기장을 청소하다보면 관람객석 아래에서 구형 오천원 짜리 지폐라도 한다발 줍게 될런지.
처음에 나는 그것을 24시간 개봉관에서 반쯤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보았다.
관객동원 천만명을 목도에 둔 무렵이었으므로, 남들보다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리게 본 셈이다.
가슴이 먹먹했고, 이틀 뒤 정성일의 영화평을 보았다.
반쯤은 동의하고, 반쯤은 동의하지 않았다.
숱한 영화평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것들은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괴물의 세계관을 편협하게 나누었고(심영섭의 반미영화로 단순화시키는 작업), 어떤 것들은 장르 컨벤션 운운하며,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유치한 듀나의 영화평들)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 읽혔던 정성일의 글을 숙주삼아 그 글에서 기생하되 유성생식에 의한 별개의 생명체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물론, 이 글은 봉준호의 괴물과 별개의 어떤 무언가다. 그 이전의 평론가들이 괴물을 등에 업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했던 것처럼. 나 역시 다만 괴물의 외피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한다.
뻐꾸기 둥지 삼아.
그리고, 나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주는 함의를 따라 이 영화를 유영할 것이다. 왜 Monster나, alien이거나, goblin이거나, beast가 아니고, Host일까. 그 물음에서 출발해서 그 물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얼개와 가장 흡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강호의 눈빛으로 시작해서, 혹은 한강의 난동으로 시작해서, 혹은 현서의 귀환으로 시작해서, 송강호의 눈빛으로, 한강의 난동으로, 현서의 귀환으로 끝나는 영화의 반복적 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1. Host
봉준호가 밝히고 있는 대로 Host는 두가지 의미-숙주와 (게스트의 반대말로서의) 주인-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 보건적인 의미에서 바이러스의 감염원은 soruce of infection이지, host 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Host라고 표현되는 것은 체내 기생충과 인간, 쥐벼룩과 토끼등에서 인간이나 토끼들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기생관계의 핵심은 절대 기생생물은 피기생생물을 잡아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고두고 빨아 먹어야 하므로. 절대로 포식/피식 관계와는 틀리다.포식/피식 관계는 직접적으로 잡아 먹지 두고두고 빨아 먹지 않는다.
괴물은 생물학적 의미로서의 Host인가.
결코 아니다.
절대로 봉준호 영화속의 괴물은 숙주도 기생 생물도 아니다. 다만 바이러스의 감염원일 뿐이요, 인간에 대한 포식동물일 따름이다.
결코 괴물은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숙주(Host)가 아니다. ( 잡아 놓은 사냥감들은 에이리언처럼 종족번식의 숙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닌, 그저 짱 박아놓은 도시락에 불과하다.) 말했다시피, 결코 숙주는 기생생물을 잡아 먹지 않는다. 또한 바이러스에 관해서는 그는 다만 감염원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물어보자. 왜 봉준호는 Host를 강조했는가. 굳이 Host의 이중적인 의미-주인장/숙주-에 대해 강조했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Host는 과연 누구인가.
첫번째 Host- 한강 매점의 Host
박희봉(변희봉 분)은 시골 어딘가-충청도로 추정되는-에서 상경했고, 상계동에 정착했다(아시겠지만, 상계동은 88올림픽 당시에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경로에 판자촌이 있는 것이 보기 싫음을 염려한 높으신 분들에 의해 철거된 대표적인 판자촌되시겠다. 그 판자촌 철거민들이 이주의 댓가로 받은 것이 한강 매점 운영권 되시겠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박강두(송강호 분)은 아버지의 인생 경로를 따라, 시골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가, 상계동에 정착했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박현서(고아성 분)는 그 아버지의 인생 경로를 따라, 서울 어딘가에서 '툭 싸질러'졌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그네 가족 3대는 누구나 Guest로 놀러 오는 한강 매점의 Host로 살아 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일탈이나 휴식의 공간인 한강을 생계와 삶의 공간으로 삼아 살아 가고 있다. 그네 Host는 아비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의붓아버지의 운명에서조차 그네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한강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그들의 운명에서 그네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의 비극이 생겨 난다. 그 땅을 떠날 수 없는(혹은 이 땅의 아비들의 운명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노동자로 태어나 노동자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이 땅의) 존재들. 이 영화의 진정한 비극은 그 모든 상황들이 발생했음(곰곰히 생각해 보시라.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고 딸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 땅을 떠날 수 밖에 없는 박강두의 심경을)에도-더불어 아직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총을 들고 지킬지 언정) 그 한강 매점에서 떠날 수 없는 박강두의 현실이다.
.(박남주가 금메달을 죽은 현서에게 바치는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서해 씨랜드 참사 때 자식을 잃은 전직 핸드볼 선수는 금메달을 반납하고, 더 이상 이 땅의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싫다며, 이 땅을 떠났지만, 그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지긋지긋한 박강두는 결코 한강 매점을 떠날 수 없다.
같은 의미에서 이미 비극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한강의 어쩔 수 없는 Host로 살아가는 계급적 운명이 지워진 현서는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한강에서 출현한 괴물에 의해 납치된다.
그것이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그들의 자연스러운 운명의 궤적이다.
그것이 한강에서 매점의 주인-Host-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고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모든 숙주-Host-의 운명이다. (숙주와 기생생물은 결코 생명체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기생생물은 숙주가 살아 갈 수 있게끔 생명을 유지하면서, 숙주가 만들어 낸 유기물을 섭취한다. 생명을 유지하도록 노동력에만 지불하면서, 노동의 댓가를 섭취하는 자본처럼)
두번째 Host-미국
미군에 의해 한강에 포름알데히드가 방류되었다./4년 뒤 한강에서 낚시꾼이 무언가 특이하지만, 알 수 없는 물고기를 발견한다./그 2년 뒤, 투신자살하는 누군가가 한강 다리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타이틀. -괴물-
위 세가지 사건은 전혀 별개의 시각에 일어난, 전혀 별개의 사건에 관한 화면이다. 그 별개의 사건에 관객의 장르적 관습이 동원된 순간,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인 첫 장면으로 회귀한다. 마치, 비행교본을 소지하고 다녔고, 비행교습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테러리스트는 쌍둥이 빌딩으로 들이 받았다고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의 습관으로 묶어 버리는 FBI의 발표를 통해 모든 사태가 테러로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듯이 괴물에서는 모든 사태가 미국에 의해 촉발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괴물'의 기본 얼개이다.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 것. 관람자들 자신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방백이 생략된 방백. 또한 그것이 봉준호의 기본적인 영화적 태도이기도 하다. 제국은 소리를 내지 않고 지배한다. 전작 살인의 추억을 상기시키시길. 그 영화에서 미국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종이 한 장 혹은 "유전자 불일치"라고 하는 단어 하나 만으로 개입하고 판별한다.
개입하고 판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신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관객의 그것과 같다. 도입부의 세 씬의 이어붙임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미국이 제국을 유지하는 힘은 피지배자들이 가지는 어떤 신념-그들은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더 나은 자본을, 더 나아가 더 나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에 근거하고 있다. 그 신념이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 신념에 기생할 때 제국은 유지된다. 지배자는 지배한다. -현대 국가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이 다만 테크노크라시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고 지배자는 지배한다.-
그러므로, 동시에 미국은 지배하되, 피지배자의 신념에 기생한다.
또한, Host이면서, Host에 의해 선택된다.
세번째 Host-괴물
봉준호의 불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괴물은 달팽이과 어딘가에 속하는 골뱅이 비슷한 생명체다. 물이끼를 뜯어 먹고, 고작해야 식물성 플랑크톤이나 거둬 먹는 그냥 그런 생명체다. 그 생물이 오래된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되어, 괴생명체로 변화해서, 한강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탄생한 거대한 괴물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는 기본 줄거리에서 주어를 바꿔 보시길. 인간의 연대기에서 벗어나 괴물의 연대기로 바꿔 보시길. 괴물은 플랑크톤을 먹고, 물이끼를 뜯어 먹듯 인간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시길. 다만 축적형 본성을 가진 괴물이 그저 우연히 여중생을 납치했다고 생각하시길.
인간에 의해 반우연, 반강제적으로 투입된 인공 화합물에 의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괴물은 더이상, 자신의 큰 덩치에 적합한 단백질 공급원을 찾을 수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인간을 섭취하기로 결정하고, 한강에 나타난다.
고지라 류의 괴수영화들을 떠올려 보시길. 왜 핵에 노출되어(6,70년대에는) 탄생한 괴수들이 종국에 가서는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는가. 왜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가. 왜 에이리언은 리플리와 동일시되는가.
그들 괴수들은 현실적 부조리를 동시에 떠안고 탄생한 상징/상상계의 경계에선 존재들이다. 그들에게서는 부조리가 거울을 따라 드러난다. 우리들의 부조리에 기생하고 있기에 모든 괴수들은 슬프다.
다시 한 번, 한강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의 Host로서의 골뱅이는 인간에 의해 괴물로서 명명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몸에 붙어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들이 접근하지 않음으로 평화를 얻는 듯 했으나,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일가족에게 복수를 감행하고 한 인간을 감정적인 이유로(유일하게) 죽인다. 다시 짧은 평화는 찾아 오지만, 더 이상 단백질 공급원을 찾을 수 없는 괴물은 단백질 공급원을 찾아 한강둔치로 올라 온다. 그 때 인간들은 큰 이유없이 노란색 살충제로 자신을 공격하고, 괴물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것이 괴물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중적이다. 이 이야기에 미국이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괴물은 이중적인 존재가 된다. 그곳에 박강두 일가가 개입하는 순간, 괴물은 이중에 이중을 더한 존재가 된다. 미국의 희생양이면서, 박강두와 다름없는 한강의 Host면서, 투쟁의 대상. 이중, 삼중의 그것이 괴물에게 덧씌워진다.
괴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Host면서, 식민지반국가독점자본주의의 대한민국의 기생체요, 가해자요, 희생양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토익책과 강철서신이, 혹은 부자아빠 가난한아빠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이 나란히 놓여있는 서재처럼. 우리들의 제국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Host면서 동시에 Guest요, 숙주면서 동시에 기생체다.
그리고, The host
왜 host인가. 주인과 숙주는 거의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그 동시에 거의 반대말같은 언어를 그 속에 가지고 있다. 그 이중적 의미가 바로 우리 모두에 정치적으로 적용된다. 미국은 (식민지 반국가독점 자본주의에서의) 제국으로서, Host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기생하고 있다. 이 땅에 살아 가는 우리도, Host면서, 동시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문화에 기생하고 있다. 둘은 상반되게 우리들 모두에게 투영되어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 서로에게 기생하면서, 동시에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Host가 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Host가 Monster가 아니고, Beast가 아니고, Goblin이 아니라 선택된 이유이다.
The Host-괴물- 묵묵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끝난 경기장을 청소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가끔씩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 게, 지금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길게 잡아 보름 전에는 누구나 그것에 관해 얘기를 했었다. 제국의 광풍처럼 그것에 관해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마 그것은 한달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에 관해 답을 찾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혹여 아는가. 게임 끝난 경기장을 청소하다보면 관람객석 아래에서 구형 오천원 짜리 지폐라도 한다발 줍게 될런지.
처음에 나는 그것을 24시간 개봉관에서 반쯤 얼큰히 취한 상태에서 보았다.
관객동원 천만명을 목도에 둔 무렵이었으므로, 남들보다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리게 본 셈이다.
가슴이 먹먹했고, 이틀 뒤 정성일의 영화평을 보았다.
반쯤은 동의하고, 반쯤은 동의하지 않았다.
숱한 영화평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것들은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떤 것들은 지나치게 괴물의 세계관을 편협하게 나누었고(심영섭의 반미영화로 단순화시키는 작업), 어떤 것들은 장르 컨벤션 운운하며,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유치한 듀나의 영화평들)
그리고, 가장 탁월하게 읽혔던 정성일의 글을 숙주삼아 그 글에서 기생하되 유성생식에 의한 별개의 생명체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물론, 이 글은 봉준호의 괴물과 별개의 어떤 무언가다. 그 이전의 평론가들이 괴물을 등에 업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들을 했던 것처럼. 나 역시 다만 괴물의 외피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한다.
뻐꾸기 둥지 삼아.
그리고, 나는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주는 함의를 따라 이 영화를 유영할 것이다. 왜 Monster나, alien이거나, goblin이거나, beast가 아니고, Host일까. 그 물음에서 출발해서 그 물음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얼개와 가장 흡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강호의 눈빛으로 시작해서, 혹은 한강의 난동으로 시작해서, 혹은 현서의 귀환으로 시작해서, 송강호의 눈빛으로, 한강의 난동으로, 현서의 귀환으로 끝나는 영화의 반복적 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1. Host
봉준호가 밝히고 있는 대로 Host는 두가지 의미-숙주와 (게스트의 반대말로서의) 주인-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 보건적인 의미에서 바이러스의 감염원은 soruce of infection이지, host 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Host라고 표현되는 것은 체내 기생충과 인간, 쥐벼룩과 토끼등에서 인간이나 토끼들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기생관계의 핵심은 절대 기생생물은 피기생생물을 잡아 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고두고 빨아 먹어야 하므로. 절대로 포식/피식 관계와는 틀리다.포식/피식 관계는 직접적으로 잡아 먹지 두고두고 빨아 먹지 않는다.
괴물은 생물학적 의미로서의 Host인가.
결코 아니다.
절대로 봉준호 영화속의 괴물은 숙주도 기생 생물도 아니다. 다만 바이러스의 감염원일 뿐이요, 인간에 대한 포식동물일 따름이다.
결코 괴물은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숙주(Host)가 아니다. ( 잡아 놓은 사냥감들은 에이리언처럼 종족번식의 숙주로 사용하는 것도 아닌, 그저 짱 박아놓은 도시락에 불과하다.) 말했다시피, 결코 숙주는 기생생물을 잡아 먹지 않는다. 또한 바이러스에 관해서는 그는 다만 감염원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부터 물어보자. 왜 봉준호는 Host를 강조했는가. 굳이 Host의 이중적인 의미-주인장/숙주-에 대해 강조했는가.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Host는 과연 누구인가.
첫번째 Host- 한강 매점의 Host
박희봉(변희봉 분)은 시골 어딘가-충청도로 추정되는-에서 상경했고, 상계동에 정착했다(아시겠지만, 상계동은 88올림픽 당시에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경로에 판자촌이 있는 것이 보기 싫음을 염려한 높으신 분들에 의해 철거된 대표적인 판자촌되시겠다. 그 판자촌 철거민들이 이주의 댓가로 받은 것이 한강 매점 운영권 되시겠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박강두(송강호 분)은 아버지의 인생 경로를 따라, 시골 어딘가에서 태어났다가, 상계동에 정착했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박현서(고아성 분)는 그 아버지의 인생 경로를 따라, 서울 어딘가에서 '툭 싸질러'졌다가, 한강 매점으로 흘러 들어 온다.
그네 가족 3대는 누구나 Guest로 놀러 오는 한강 매점의 Host로 살아 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일탈이나 휴식의 공간인 한강을 생계와 삶의 공간으로 삼아 살아 가고 있다. 그네 Host는 아비의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심지어 의붓아버지의 운명에서조차 그네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한강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그들의 운명에서 그네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의 비극이 생겨 난다. 그 땅을 떠날 수 없는(혹은 이 땅의 아비들의 운명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는. 노동자로 태어나 노동자외에는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이 땅의) 존재들. 이 영화의 진정한 비극은 그 모든 상황들이 발생했음(곰곰히 생각해 보시라.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고 딸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그 땅을 떠날 수 밖에 없는 박강두의 심경을)에도-더불어 아직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그 땅에서 (총을 들고 지킬지 언정) 그 한강 매점에서 떠날 수 없는 박강두의 현실이다.
.(박남주가 금메달을 죽은 현서에게 바치는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서해 씨랜드 참사 때 자식을 잃은 전직 핸드볼 선수는 금메달을 반납하고, 더 이상 이 땅의 말도 안 되는 현실이 싫다며, 이 땅을 떠났지만, 그 모든 상황이 끔찍하게 지긋지긋한 박강두는 결코 한강 매점을 떠날 수 없다.
같은 의미에서 이미 비극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한강의 어쩔 수 없는 Host로 살아가는 계급적 운명이 지워진 현서는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한강에서 출현한 괴물에 의해 납치된다.
그것이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그들의 자연스러운 운명의 궤적이다.
그것이 한강에서 매점의 주인-Host-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고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모든 숙주-Host-의 운명이다. (숙주와 기생생물은 결코 생명체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기생생물은 숙주가 살아 갈 수 있게끔 생명을 유지하면서, 숙주가 만들어 낸 유기물을 섭취한다. 생명을 유지하도록 노동력에만 지불하면서, 노동의 댓가를 섭취하는 자본처럼)
두번째 Host-미국
미군에 의해 한강에 포름알데히드가 방류되었다./4년 뒤 한강에서 낚시꾼이 무언가 특이하지만, 알 수 없는 물고기를 발견한다./그 2년 뒤, 투신자살하는 누군가가 한강 다리 위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타이틀. -괴물-
위 세가지 사건은 전혀 별개의 시각에 일어난, 전혀 별개의 사건에 관한 화면이다. 그 별개의 사건에 관객의 장르적 관습이 동원된 순간,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인 첫 장면으로 회귀한다. 마치, 비행교본을 소지하고 다녔고, 비행교습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 테러리스트는 쌍둥이 빌딩으로 들이 받았다고 별개의 사건들을 하나의 습관으로 묶어 버리는 FBI의 발표를 통해 모든 사태가 테러로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듯이 괴물에서는 모든 사태가 미국에 의해 촉발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괴물'의 기본 얼개이다. 보여주되 설명하지 않는 것. 관람자들 자신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방백이 생략된 방백. 또한 그것이 봉준호의 기본적인 영화적 태도이기도 하다. 제국은 소리를 내지 않고 지배한다. 전작 살인의 추억을 상기시키시길. 그 영화에서 미국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종이 한 장 혹은 "유전자 불일치"라고 하는 단어 하나 만으로 개입하고 판별한다.
개입하고 판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신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것은 관객의 그것과 같다. 도입부의 세 씬의 이어붙임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미국이 제국을 유지하는 힘은 피지배자들이 가지는 어떤 신념-그들은 더 나은 테크놀로지를, 더 나은 자본을, 더 나아가 더 나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에 근거하고 있다. 그 신념이 공기처럼 스며들어, 그 신념에 기생할 때 제국은 유지된다. 지배자는 지배한다. -현대 국가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이 다만 테크노크라시들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고 지배자는 지배한다.-
그러므로, 동시에 미국은 지배하되, 피지배자의 신념에 기생한다.
또한, Host이면서, Host에 의해 선택된다.
세번째 Host-괴물
봉준호의 불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괴물은 달팽이과 어딘가에 속하는 골뱅이 비슷한 생명체다. 물이끼를 뜯어 먹고, 고작해야 식물성 플랑크톤이나 거둬 먹는 그냥 그런 생명체다. 그 생물이 오래된 포름알데히드에 노출되어, 괴생명체로 변화해서, 한강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유전자 변이를 일으켜 탄생한 거대한 괴물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는 기본 줄거리에서 주어를 바꿔 보시길. 인간의 연대기에서 벗어나 괴물의 연대기로 바꿔 보시길. 괴물은 플랑크톤을 먹고, 물이끼를 뜯어 먹듯 인간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시길. 다만 축적형 본성을 가진 괴물이 그저 우연히 여중생을 납치했다고 생각하시길.
인간에 의해 반우연, 반강제적으로 투입된 인공 화합물에 의해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괴물은 더이상, 자신의 큰 덩치에 적합한 단백질 공급원을 찾을 수 없어서, 세상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인간을 섭취하기로 결정하고, 한강에 나타난다.
고지라 류의 괴수영화들을 떠올려 보시길. 왜 핵에 노출되어(6,70년대에는) 탄생한 괴수들이 종국에 가서는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는가. 왜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가. 왜 에이리언은 리플리와 동일시되는가.
그들 괴수들은 현실적 부조리를 동시에 떠안고 탄생한 상징/상상계의 경계에선 존재들이다. 그들에게서는 부조리가 거울을 따라 드러난다. 우리들의 부조리에 기생하고 있기에 모든 괴수들은 슬프다.
다시 한 번, 한강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이 땅의 Host로서의 골뱅이는 인간에 의해 괴물로서 명명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몸에 붙어 있는 바이러스로 인해, 인간들이 접근하지 않음으로 평화를 얻는 듯 했으나,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일가족에게 복수를 감행하고 한 인간을 감정적인 이유로(유일하게) 죽인다. 다시 짧은 평화는 찾아 오지만, 더 이상 단백질 공급원을 찾을 수 없는 괴물은 단백질 공급원을 찾아 한강둔치로 올라 온다. 그 때 인간들은 큰 이유없이 노란색 살충제로 자신을 공격하고, 괴물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것이 괴물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중적이다. 이 이야기에 미국이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괴물은 이중적인 존재가 된다. 그곳에 박강두 일가가 개입하는 순간, 괴물은 이중에 이중을 더한 존재가 된다. 미국의 희생양이면서, 박강두와 다름없는 한강의 Host면서, 투쟁의 대상. 이중, 삼중의 그것이 괴물에게 덧씌워진다.
괴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Host면서, 식민지반국가독점자본주의의 대한민국의 기생체요, 가해자요, 희생양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토익책과 강철서신이, 혹은 부자아빠 가난한아빠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이 나란히 놓여있는 서재처럼. 우리들의 제국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Host면서 동시에 Guest요, 숙주면서 동시에 기생체다.
그리고, The host
왜 host인가. 주인과 숙주는 거의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그 동시에 거의 반대말같은 언어를 그 속에 가지고 있다. 그 이중적 의미가 바로 우리 모두에 정치적으로 적용된다. 미국은 (식민지 반국가독점 자본주의에서의) 제국으로서, Host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기생하고 있다. 이 땅에 살아 가는 우리도, Host면서, 동시에 미국식 자본주의와 문화에 기생하고 있다. 둘은 상반되게 우리들 모두에게 투영되어 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 서로에게 기생하면서, 동시에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Host가 된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Host가 Monster가 아니고, Beast가 아니고, Goblin이 아니라 선택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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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곁가지가 많아서, 다 쳐내고, Host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을 유영했다. 엉성하게나마, 쓰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하다만. 결국 이것은 괴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
설마, 여기까지 읽어 본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어찌 되었건, 마음이나 편하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