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처음 들은 것은 영화 동네에서였다. 오래 전 영화 아카데미에서 연출 수업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영화를 보고 난 뒤 가진 토론에서 막판에 ‘된장을 풀기’ 때문에 잘나가던 영화가 지겨워진다고 한 동료가 말했다. 뭔가 잘못된 점을 비웃는 표현이겠거니, 하고 감을 잡았지만, 자세한 뜻을 몰라 나중에 그 동료에게 물어보니 답인즉, ‘관객도 그만하면 다 알았는데 촌스럽게 질질 끌면서 감정 낭비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 때도 왜 하필 ‘된장’을 거기 쓰는지 의아했는데, 최근 ‘된장녀’ 논란을 보니 그 때 풀지 못한 의혹이 다시 되살아난다.
된장은 전통적인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발효식품으로, 특히 최근 들어 웰빙 음식의 기본 양념으로 사랑을 받고 있건만, 왜 된장을 나쁘게 사용하는 자기폄하적 관습이 생겨났는지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보니 ‘엽전의식’이니 ‘바지 저고리’처럼 우리에게 속한 지역적 상징물을 스스로를 폄하하는 표현으로 쓰는 일련의 징후가 감지된다.
‘된장녀’란 ‘외국의 고급 명품이나 문화를 좇아 허영심이 가득 찬 삶으로 일관하여 한국 여성의 정체성을 잃은 여자’로, 스타벅스에서 한 끼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뉴요커인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논란은 ‘된장녀의 하루’라는 인터넷 글에서 시작됐다. 라면 값도 제대로 없는 남자 선배에게 아양을 떨어 점심을 얻어먹으면서도 명품을 사주는 부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꼬집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못 가진 남자들이 가진 여자를 비난하는 계급과 성차가 겹치는 논란으로 발전된 것은 유감이다. 그 밑에 도사린 허위의식에 가득 찬 자아분열 문제가 비단 일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학력에 양성평등적 법과 제도로의 점진적 개선으로 여자도 자기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이건만, 자기보다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꿈인 요즘 여자들의 이중적 행태에서 드러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하필이면 토종적 냄새가 나는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그래서 비록 그 말이 ‘젠장’의 점진적 변형에서 나온 기표의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그 근원을 풀어볼 만한 퍼즐이다.
일단 명품 코드부터 풀어보자. 루이비통 측에 따르면, 그들의 최고 고객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부 아시아국가의 졸부들이라고 한다. 구찌나 샤넬, 페라가모 등, 온 몸을 휘감는 명품들은 급성장하는 경제 속에서 이뤄낸 부와 계급 상승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며, 이는 자아를 대신하는 대외 과시용이기에 비쌀수록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품에 집착하는 이들(특히 연예인)을 대상으로 수십억 대를 챙긴 ‘빈센트앤코’라는 가짜 명품 시계 사건은 새겨볼 만하다. 사용가치에 비해 턱없이 높은 가격에, ‘유럽 왕실용’이라는 선전 문구를 두르고 잘나가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부인 같은 상층부를 겨냥하는 동시에 이들을 다시 홍보용으로 사용한 빈센트앤코의 수법은 명품을 찾는 이들의 허영심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 사기극이 보여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명품족이 의외로 명품을 알아보는 세련됨은 없는 대신, 단지 ‘명품’이라는 말에 혹하는 무지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시계는 시계판이 유난히 커서 눈에 쉽게 들어온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자, 연예인이 차고 있는 것이 이 시계임을 대번 알아볼 수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데도 그 시계를 사거나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이들은 또 뭔가? 모두 합성사진이라는 것일까? 그런 연예인이 차고 있으니 그게 진짜 대단한 명품이라고 믿고 사는 이들은 또 어떤 이들일까?
국제영화제 파티에 샤넬 로고가 명확하게 찍힌 (그래서 서양 배우라면 안 입을 유치한 명품선전용인) 옷을 입고 등장하는 한국 여배우, 특유의 체크무늬로 유명한 버버리 원피스나 셔츠를 입고 기자회견 자리에 나오는 정치인도 상당수 있으니 ‘명품 자아’ 현상은 연예인, 정치인 할 것 없이 이 나라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명품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진품 같아 보이는 ‘짝퉁’을 한국에서나 중국여행에서 사오기도 한다. 과연 그런 옷, 가방, 시계를 걸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진짜 명품을 든 사람은 그걸 들 수준인 명품 자아에 만족 할 것이고, 짝퉁을 든 사람은 자신도 명품족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돈이라도 번 기분까지 더해져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은 그게 가짜인 줄 아는데도 떨떠름해 하지 않는 건 왜일까?
물건을 살 때, 이게 ‘어떤 명품의 카피’라고 유혹하는 상인을 만나면 나는 모욕감과 서글픔을 느낀다. 가짜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권하는 상술이 횡행하는 이 병든 사회가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짝퉁을 거느린 이런 명품족을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서글픈 일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어떤 첼리스트는 한국에 돌아온 후,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된장을 담그며 사는데, 그녀는 사랑스러운 괴짜 ‘된장녀’라고 불린다, 여기서 된장은 실제적이며, 긍정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짝퉁까지 포함한 명품을 밝히는 여자를 ‘된장녀’라고 비하해 부르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문화 식민주의의 폐해를 드러내 준다.
문화 식민주의가 낳은 최악의 범죄는 비서구권 사람들이 가진 건강하고 존엄한 자긍심을 폄하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이유에서건 서구 문화, 서구적 가치, 서구적 기술이 자신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세이두 셀의 지적(남-남 관계를 다룬 「도시와 개발」이라는 보고서)은 자기 정체성을 서구명품으로 대체하는 한국인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고유한 것, 즉 ‘된장’을 명품과 연관시키면서 자기폄하적 표현을 하는 이중성도 이와 연관된다. 그런데도 ‘된장녀’ 담론이 계급차이를 깐 남녀논쟁으로 비화된 것은 엉뚱하다. 서구 명품을 향한 선망과 연결되는 문제가 내부로 돌려지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서글픈 식민적 약자의 자기공격성이 이런 식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문화식민주의라는 문맥에서 ‘명품 연예인’이나 ‘버터녀’ 논쟁으로 풀어나가야 그 허한 허영기의 본질이 폭로될 것이다.
된장녀와 연예인, 그리고 명품 자아 증후군
‘된장’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을 처음 들은 것은 영화 동네에서였다. 오래 전 영화 아카데미에서 연출 수업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영화를 보고 난 뒤 가진 토론에서 막판에 ‘된장을 풀기’ 때문에 잘나가던 영화가 지겨워진다고 한 동료가 말했다. 뭔가 잘못된 점을 비웃는 표현이겠거니, 하고 감을 잡았지만, 자세한 뜻을 몰라 나중에 그 동료에게 물어보니 답인즉, ‘관객도 그만하면 다 알았는데 촌스럽게 질질 끌면서 감정 낭비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 때도 왜 하필 ‘된장’을 거기 쓰는지 의아했는데, 최근 ‘된장녀’ 논란을 보니 그 때 풀지 못한 의혹이 다시 되살아난다.
된장은 전통적인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발효식품으로, 특히 최근 들어 웰빙 음식의 기본 양념으로 사랑을 받고 있건만, 왜 된장을 나쁘게 사용하는 자기폄하적 관습이 생겨났는지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보니 ‘엽전의식’이니 ‘바지 저고리’처럼 우리에게 속한 지역적 상징물을 스스로를 폄하하는 표현으로 쓰는 일련의 징후가 감지된다.
‘된장녀’란 ‘외국의 고급 명품이나 문화를 좇아 허영심이 가득 찬 삶으로 일관하여 한국 여성의 정체성을 잃은 여자’로, 스타벅스에서 한 끼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뉴요커인양 착각하며 살아간다. 논란은 ‘된장녀의 하루’라는 인터넷 글에서 시작됐다. 라면 값도 제대로 없는 남자 선배에게 아양을 떨어 점심을 얻어먹으면서도 명품을 사주는 부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꼬집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못 가진 남자들이 가진 여자를 비난하는 계급과 성차가 겹치는 논란으로 발전된 것은 유감이다. 그 밑에 도사린 허위의식에 가득 찬 자아분열 문제가 비단 일부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학력에 양성평등적 법과 제도로의 점진적 개선으로 여자도 자기 능력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이건만, 자기보다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게 꿈인 요즘 여자들의 이중적 행태에서 드러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하필이면 토종적 냄새가 나는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그래서 비록 그 말이 ‘젠장’의 점진적 변형에서 나온 기표의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그 근원을 풀어볼 만한 퍼즐이다.
일단 명품 코드부터 풀어보자. 루이비통 측에 따르면, 그들의 최고 고객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일부 아시아국가의 졸부들이라고 한다. 구찌나 샤넬, 페라가모 등, 온 몸을 휘감는 명품들은 급성장하는 경제 속에서 이뤄낸 부와 계급 상승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며, 이는 자아를 대신하는 대외 과시용이기에 비쌀수록 가치가 있을 것이다.
국제영화제 파티에 샤넬 로고가 명확하게 찍힌 (그래서 서양 배우라면 안 입을 유치한 명품선전용인) 옷을 입고 등장하는 한국 여배우, 특유의 체크무늬로 유명한 버버리 원피스나 셔츠를 입고 기자회견 자리에 나오는 정치인도 상당수 있으니 ‘명품 자아’ 현상은 연예인, 정치인 할 것 없이 이 나라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명품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진품 같아 보이는 ‘짝퉁’을 한국에서나 중국여행에서 사오기도 한다. 과연 그런 옷, 가방, 시계를 걸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진짜 명품을 든 사람은 그걸 들 수준인 명품 자아에 만족 할 것이고, 짝퉁을 든 사람은 자신도 명품족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돈이라도 번 기분까지 더해져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자신은 그게 가짜인 줄 아는데도 떨떠름해 하지 않는 건 왜일까?
물건을 살 때, 이게 ‘어떤 명품의 카피’라고 유혹하는 상인을 만나면 나는 모욕감과 서글픔을 느낀다. 가짜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권하는 상술이 횡행하는 이 병든 사회가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짝퉁을 거느린 이런 명품족을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서글픈 일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어떤 첼리스트는 한국에 돌아온 후,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된장을 담그며 사는데, 그녀는 사랑스러운 괴짜 ‘된장녀’라고 불린다, 여기서 된장은 실제적이며, 긍정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짝퉁까지 포함한 명품을 밝히는 여자를 ‘된장녀’라고 비하해 부르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문화 식민주의의 폐해를 드러내 준다.
문화 식민주의가 낳은 최악의 범죄는 비서구권 사람들이 가진 건강하고 존엄한 자긍심을 폄하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이유에서건 서구 문화, 서구적 가치, 서구적 기술이 자신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라는 세이두 셀의 지적(남-남 관계를 다룬 「도시와 개발」이라는 보고서)은 자기 정체성을 서구명품으로 대체하는 한국인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자신의 고유한 것, 즉 ‘된장’을 명품과 연관시키면서 자기폄하적 표현을 하는 이중성도 이와 연관된다. 그런데도 ‘된장녀’ 담론이 계급차이를 깐 남녀논쟁으로 비화된 것은 엉뚱하다. 서구 명품을 향한 선망과 연결되는 문제가 내부로 돌려지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서글픈 식민적 약자의 자기공격성이 이런 식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문화식민주의라는 문맥에서 ‘명품 연예인’이나 ‘버터녀’ 논쟁으로 풀어나가야 그 허한 허영기의 본질이 폭로될 것이다.
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유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