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그리고 내일

문근식2006.09.19
조회28


순 우리말로 아침, 저녁은 있다. 그러나 점심(點心)은 없다. 가까운 말로 새참 정도밖에는 없다. 왜 일까?

 

별로 이상한 이유도 아니다. 5천년 어쩌구 하는 한국 역사 속에서 하루에 세끼 씩이나 먹고 살았던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끼를 다 챙겨먹은건 잘 쳐봐도 100년이 못되는 기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 민족이다.

 

역시 우리말에 어제와 오늘은 있다. 그러나 내일(來日)은 없다.

 

평균 4년마다 한번 있었다는 전란 속에서, 또 기껏 평화로운 시절에도 탐관오리들의 들볶임 속에서, 서민들의 삶에는 지나간 '어제'와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은 있을지 몰라도, 올지 안 올지 불분명한 '내일'의 존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죽으면 내일은 의미가 없으니깐...

 

점심 잘먹고,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의 칼로리가 얼마나 되며, 그 칼로리를 연소시키려면 얼마나 운동을 해야되는지 잠깐 머리 굴리다가 우리에게 점심이란 단어와 내일이란 단어가 허락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란걸 새삼 깨닫는다.

 

지금 이 시간, 둔촌동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가고, 슈퍼 아줌마는 늘어지게 하품하고, 부동산 할아버지는 친구랑 바둑두고, 건너편 둔촌고 남학생들은 농구하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오늘 내가 보는 이 풍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점심과 내일이 없는 날들을 보내며 조국을 일궈냈겠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선조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울러 오고오는 내 후손들에게는 무엇을 남겨줄지를 잠시 돌아본 배부른 오후에 끄적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