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오해 (2)

이성도200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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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대통령과 유신에 관해서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흔히 유신이 장기 집권을 위한 획책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박대통령은 마지막 임기 초에 후계자를 물색하고 유신헌법의 개정 작업을 지시했다'는 게 지난번 인터뷰의 주요 골자였습니다.

 

그때의 상황과 유신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증언을 바랍니다.

' 첫 질문은 그랬다. 

 

"저는 정치가는 아니지만 아버지 곁에서 유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또 사회 일각 에서 유신에 대해서 상당히 매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더욱 관심을 갖고 알려고 노력 한 바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유신과 지금 흔히 사회에서 얘기되고 있 는 유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유신문제는 제가 이야기할 성격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신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국내외에 그 배경과 정당성을 외치고 다녔 던 요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구해 버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유신이 마치 큰 '범죄'인 것 같이 인식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왜곡을 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저라도 제가 알고 있는 유신에 대해 서 아는대로 이야기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먼저 아버지가 유신을 단행하시게 된 70년대 초의 국내외 정세와 당시 북한의 동향을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얘기는 새로운 게 아니고 그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관해 관심이 있었던 분은 모두 잘 아시는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시대적 상황이 전혀 얘기가 안되고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망각된 상 태에서 '다른 방향'으로만 거론되는 경향이 있어요." 

 

박근혜씨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구상하게 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남긴 청와대 집무 메모 및 일기와 각종 서류 그리고 기타 간행물을 통해 연대 등 을 확인한 것들이라고 한다. 

 

"60년대까지의 국제 정치 조류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자 유, 공산 양대 진영이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자국의 이익보다도 자기 나라가 소속된 진영의 이익을 우선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6.25사변때 유엔의 16개국이 참전한 것도, 월남전쟁때 미국이나 서방 여러 나라가 우리 나라를 도와준 것도 그런 이념하 에서 '우리 진영의 일은 우리가 돕겠다'고 나선 것일 겁니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이념, 명분이 둔화되고 모든 강대국들은 자기 나라의 이 익과 실리를 위주로 하는 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

 

데탕트(긴장 완화)니 뭐니 하는 정치용어가 나오면서 이념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가 자국 의 이익 우선 주의로 변했던 겁니다." 

 

근혜씨는 데탕트의 주요 요인은 미소양국이 서로 과다한 핵무기를 보유해 위기감이 고조됐 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은 잘 알려져 있죠. 때문에 다량의 핵을 보유한 국가끼리 싸워봤자 쌍방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는 인식 아래 이념은 뒤로하고 공존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죠." 

 

핵무기의 위력이 국제 정치의 흐름을 전환시켰다는 이야기다.

 

이 시기에 약소국들은 강대 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벌이는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 자기 나라 운명이 어떻 게 돼 가는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그 시대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수십년 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나라들 끼리 갑자기 국교를 끊고 적이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시대였습니다." 

 

근혜씨는 '닉슨 독트린'이 한국 정세에 끼치는 영향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 독트린의 요지는 그때까지 아시아의 평화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철수한다, 또 앞으로는 아시아에 전쟁이라든가 혹은 어떤 군사분쟁이 일어나더라도 미국은 말려들지 않겠 다, 아시아 지역의 일은 아시아인들끼리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지역의 군 사 및 경제원조를 1975년까지는 모두 끝내겠다는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말뿐이 아니고 가시적인 움직임으로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1969년 경에는 아시아에 주둔했던 미군 74만명이 그 3년뒤인 72년에는 11만명 정도로 감축이 되었 어요." 

 

국제 정세가 그렇게 급변하기 시작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세력이라는 북한과 대 치하고있던 한국은 만일의 무력도발시 자력 방어를 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워야 했다.

 

그것 도 단시일 내에 '북한을 능가할 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일념에서 유신체제가 선택됐 다는 것이다.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한 나라의 운명은 


박근혜씨는 긴박감이 감돌던 그 무렵의 국제 정세를 다시 소상하게 설명했다. 

'월남전에서 손을 떼려고 미국이 69년 여름부터 월맹과 비밀회담을 벌인 일과(미군은 그 얼마 뒤 월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미국이 적대시했던 당시의 중공과 밀월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했었던 일'등을 예로 들었다. 

 

"72년 2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공을 방문해 공동성명을 발표했었지요.  '미국은 대만을 중 국의 일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보다 앞서 6.25사변 때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했던 유엔이 대만을 '내쫓고' 71년 10월에는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킨 정도가 아니라 안보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였지요.

 

그 중공은 북한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70년 여름 미국은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어요. 아 버지는 이 즈음에 더욱 자주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자 주국방의 개념은 소련과 중공등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지 않는 상태의 북한과 미국 등의 도 움 없이 우리나라가 일대 일로 부딪혀도 그들(북한)을 능히 격퇴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그게 어림없는 일이었어요. 70년대 중반에도 북한의 군사 도발을 제압 할 힘이 배양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때 80년까지는 자주국방의 힘을 키워놓겠다고 노력하고 계셨어요. 그러니 당시 의 주한미군 철수 소식이 얼마나 황당한 얘기였겠어요.

 

70년대 초라면 우리의 경제력이 '보 릿고개'가 완전히 없어진 상태도 아니고 주한 미군주둔의 견제력으로 북한의 침략욕망을 간 신히 억제,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당시 아버지는 미국측에게 미군 철수에 앞서 한가지 보장을 하라고 외교 교섭을 하셨어요. 소련과 중공의 비호 아래 북한이 쳐내려올 때는 미국이 즉각 개입하겠다는 보장을 한 후에 미군의 철수를 하더라도 하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미국은 '우리의 군대를 감축시키는데 한국의 동의가 무엇 때문에 필요하느냐'며 우 리측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71년에 주한 미군2만명을 일차적으로 철수시켰어요.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미국과 소련 양극으로 나뉘어졌던 국제 사회가 중공과 일본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해 다원화하는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특히 한반도는 소련 중공 일본 미국 등 네 나라의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됐어요.

 

그런데 당 시 자유 진영의 세력이던 일본도 중공과 국교를 맺으며(72년9월)북한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쳤고 미국은 주한 미군을 일방적 통고만으로 빼기는 상황이었으니 말 할 것도 없고 소련 과 중공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북한을 돕고 있는 판이었으니 당시 우리 나라가 국제적으로 어떤 위치에 처해 있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한반도의 운명에 더욱더 먹구름이 돌게 한 것은 역시 북한의 움직임이었다고. 

"70년대에 새로 노동당 규약을 채택한 북한은 '노동당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를 공산화로 통 일시키는 것' 이라고 못을 박았어요. 그해 11월에 전당대회를 연 그들은 '우리들은 전쟁 준 비를 완료했다'고 공언했구요 이 공언은 그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당시 신뢰도 높은 소식통 이 북한을 직접 둘러보고 북한측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었어요. 

 

 

당시 일본의 좌익계통의 지지를 얻어 동경 도지사에 당선된 '미노베 료오기찌'씨는 71년 평 양을 방문하고 일본에 귀국하자마자 북한측의 동향에 대해 발표를 했어요.

 

'오늘날 북한은 전쟁의 준비단계가 아니고, 준비를 완료하고 임전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라는 내용이 었어요. 그 사람은 좌익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호전성에 놀라 전 세계를 향해 한반도에 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환기시켰던 것이죠. 

 

 

더욱 놀라운 일은 북한의 전쟁 계획이 입수됐다는 겁니다.

 

그 내용은 71년 우리나라의 선 거를 틈타 남침을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나라는 71년 5월에 국회의원 총선을 치렀어요. 그 전에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었구요. 북한은 총선이 끝나고 한국이 극도로 혼란해질 시기에 남침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그 계획에는 북한군이 상륙할 지점까지 지정해 놓았어요. '경기도 평택만을 상륙 지점으로 하고 그 다음에 기습적으로 북한의 육해공군을 한꺼번에 투입시킨다'는 것이었어요. 입체적, 일시적, 다량적, 속결적이라는 전법을 구사해 한국을 제2의 월남으로 만들자라는 게 그들의 계획이었어요." 

 

박근혜씨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암담한 시절의 국제 정세였 다'며 말을 이었다. 닉슨 독트린이 북한을 오판하게 할 위험성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근혜씨는 지난 50년에 당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에치슨 라인'을 발표해 북한의 남침 야욕에 불을 붙인 결과를 낳게 했던 점을 들었다. 에치슨은 '미국의 방위선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일본 오끼 나와와 필리핀을 중심으로 펼치겠다'고 말했었다. 

 

"에치슨 라인을 발표한 시기가 50년 1월이었는데 불과 5개월후에 6.25사변이 터진 겁니다. 그래서 당시 에치슨은 미국 국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은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닉슨 독 트린'같은 발표에 북한은 얼마나 고무되었겠어요.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는 형편없었지요. 전쟁을 바꿔 말하면 경제력의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70년 초의 우리나라 GNP는 북한에 비해 낮았어요. 이것이 70년대 중반(75년)에 들 어서야 간신히 북한을 웃돌 수 있게 됐구요. 

그리고 지금은 국내 방위산업체 기술진에 의해 탱크도 만들고 하지만 그때는 소총 공장도 없었어요. 71년에야 소총공장 건설계약을 겨우 했을 정도였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어떻게든 독자적인 우리 기술로 무기를 개발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하 게 느꼈던 시기는 '1.21사태'를 맞고 난 직후라고 알려져 있다.

 

북한 124군 특공대원 31명이 휴전선을 뚫고 서울의 청와대 5백미터 지점까지 침투했던 사 건이 68년 1월21일 저녁에 일어났는데 이것이 1.21사태. 그해 1.21사태 바로 이틀 뒤 북한은 동해안에서 임무 수행중이던 미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해갔다. 

 

미국은 납치된 승무원의 무사 귀환을 위해 북한과 굴욕적인 비밀협상을 벌였었다. 1.21사태 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미국이 그런 식으로 나오자 한국 정부는 '미국정책에 반대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강도 높은 반발을 보였다.

 

워낙 그 기세가 드높자 미국은 1억달러의 추가 군사원조, M16 소총공장의 건설 등을 제의 해 한국의 반감을 무마했다.

 

 

당시 주한유엔군 사령관은 1.21사태의 보복으로 한국군이 단독 군사행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유류공급의 중지등 사전 조치를 취하기도 했 다. 

 

 

자주 국방체제를 염원하던 박대통령의 결심은 훗날 주한미 제7사단 철수 및 닉슨 독트린으 로 더욱 굳어졌다.

 

"이건 한가지 일화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무기 제조기술은 형편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1.21사태후 4대 핵심 공장에서 대포와 수류탄 등의 국산 무기개발에 착수해 곧이어 시범 사격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도 참관을 하러 가셨는데 목표 지점인 앞산으로 날아갔어야 할 포탄이 아버지 가 앉아 계신 관망대 바로 앞으로 떨어진 희극으로 끝났답니다.

 

그럴 정도로 낙후된 군사기술, 북한의 GNP보다 낮은 경제력,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어제 의 적과도 하루 아침에 친구가 되는 강대국 틈새에서 후진 한국은 어떤 길을 걸어야 했을까 요." 

 

'역사를 잊는 자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

이어 박근혜씨는 그 즈음의 한반도 정세의 흐름에 대해 말했다. 
"사태 후에도 계속적인 북한의 무력 도발 및 후방 침투사건이 일어났어요. 70년 12월 북한군이 서부전선에 침입해 8시간동안 국군과 교전했고 71년 1월 KAL기 납북 미수사건(범인은 기내에서 사살 됨), 그해 5월 묵호에 나타난 간첩선 격침, 6월 남해상으로 북한 무장선이 나타나 츨동했던 우리나라 군 비행기가 추락돼 8명이 전사한 일 등이 연속적 으로 터져나왔어요. 

 

더구나 그들이 세균전까지 획책해 한때 국가안보회의를 소집, 그 대처방안을 세우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거친 행동'을 경계하려고 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아버지는 북한측 에 '전쟁이 아닌 선의의 방법으로 경쟁을 해보자. 과연 어떤 체제가 국민을 복되게 할 수 있 는가'라는 제의를 하시기도 했어요.

 

이런 정신에 입각해서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 선언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반도에서 전쟁을 피하고 남북간의 불신을 풀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자 는 것이었지요. 

 

 

사실 이 7.4공동선언이 나오기 전에는 한반도의 어느 시기에 어느 곳에서 어떤 형태로 전 쟁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을 하지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는 이민갈 생각이나 하고 투자나 경제건설 등은 잘될 리가 없지 않겠어요.

 

북한체제와 우리 체제를 비교해보면 북쪽은 지령하나로 일사분란하게 전국을 움직일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반면, 남쪽은 사사건건에 국론이 엇갈려 혼미한 상태였습니다. 심 지어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대표들이 남북을 오가는데 그것까지도 정치인들은 '반공국가에서 어떻게 공산국가를 오갈 수 있느냐. 그것은 위헌이고 위법이다'라며 정치문제화 하기도 했어 요. 

 

 

그리고 예비군의 무조건 폐지, 민방위제도까지도 정치적 시빗거리가 되었고 대학가에서는 교련 반대데모가 연달아 있었고 평양 방송에서는 이를 선동하고.... 과연 이런 상황하에서 3천만 국민의 생명을 책임진 지도자로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대통령 자리에 있는 분은 누구보다도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게 아니예요.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간다든지 북한의 동향이 어떻다 등등. 그렇기 때문에 안보적인 위기에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는 그때 아버지가 수수방관하고 계셨다면 그게 과연 대통 령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상대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북한인 만큼 전쟁만큼은 일어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강구해야 옳지요.

 

돌연 전쟁이 났다하면 비록 이기더라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그때는 우리가 뒤지 는 상태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나라의 평화를 지키려는 지도자 라면 어떠한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아예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호전성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북한보다 뒤진 것을 하루속히 만회할 뿐 아니 라 그들을 훨씬 능가해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도 승산이 없을 뿐 아니라 자멸을 자초하게 되 므로 아예 엄두도 못내게 하는 길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국력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할 수 있는 정치 제도적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 단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런 저런 비판을 하는 것이지 막상 전쟁이 터져서 우리가 결과 적으로 이겼다고 하면 그때 인심은 이러한 조치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박수를 보냈을 것 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보면 인류가 역사를 통해서 도대체 아무것도 배 우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라구요. 왜냐면 인류는 똑같은 실수를 자꾸 되풀이하니까 말이예요. 

 

 

그리고 '역사를 잊어버리는 자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라는 경구도 있지요. 당시 안보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그런 말도 있었지만 앞서와 같은 현실을 앞에다 놓고 어떻 게 그런 비난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비록 나라가 없어져도 아무런 책임 이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나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고 지도자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 다가 무슨 큰일을 당했다면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징비록>이란 책에 임진왜란 전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러 사신들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 와요. 

 

 

사신중의 한사람이 당파 싸움의 타성을 일본 탐지의 결과보고 때도 내비쳐 '일본은 전쟁을 벌일 의사가 전혀 없더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반대 당파의 사신이 일본의 침략 욕망을 꿰뚫 어보고 올바르게 보고한 것에 반대하기 위해 그랬다는 거지요. 거짓말을 한 사신의 말만 믿고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임진란을 만나 7년동안 백성들만 엄 청난 참화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가깝게는 6.25사변때도 일부 정치인들이 북한은 절대 쳐내 려올 능력이 없다. 만약 남침을 하면 곧바로 격퇴하고 북진해 '점심은 어디서 저녁은 어디서 먹고 이틀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라는 큰소리를 쳤지요.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요즘은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천명되는 등 국제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하나 70년대에는 그 당시의 눈으로 공산주의 특히 북한을 봐야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솔제니친은 '공산주의와는 신사적인 협상을 할 수 없다.

 

그들의 교조 레닌 이 주장한 바대로 '가질 수 있으면 가져라. 공격할 수 있으면 공격하라. 다만 벽이 있으면 돌아가라는 이론을 추구하는 무리'라고 공산주의를 규정하는 글을 써서 70년대의 데탕트 분 위기에 휩싸여 순진하게 양보만 하는 서방 자유진영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도 했지요. 

 

 

북한도 역시 레닌의 그런 이론을 따랐어요. 겉으로는 평화를 가장하고 은밀하게 전쟁 준비 를 완료했던 겁니다. 그 실질적인 예가 땅굴과 어머니(육영수 여사)저격 사건이었어요.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하 는 척하면서 그들은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온 겁니다. 어머니의 저격범 문세광이 북한으로 부터 테러 지령을 받은 시기도 72년 7.4공동성명이 나온 두달 뒤인 그 해 가을(9월)이었어 요. 

 

 

그리고 그 평화공동성명 이후 북한은 군비를 더욱 증강시켰어요. 북한은 70년대에는 개성 에서 단추하나만 누르면 서울을 강타할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게 된 겁니다.

 

 

또 참고로 말씀드리면 70년대초 미국 학자들은 한국문제를 우리들 뜻과는 관계없이 연구를 한 적이 있었어요. 미국 소련 중공 일본의 4강의 영향력으로 남북의 대치상태를 동결시키면 서 종국에는 오스트리아식 중립화 통일안 방안도 모색하는 등 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우리 나라의 국운이 좌지우지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구한말에도 세계사의 흐름에 눈이 어둡 고 자주적 역량이 부족해서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겪지 않았습니까? 

 

 

같은 돌에 두 번씩이나 넘어질 수는 없잖아요.

 

아버지는 민족의 살길을 유신체제로 타개해 나가려고 하신 겁니다. '격동하는 주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희생되지 않고 우리문제 는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종국에는 평화적인 통일을 추 구해 나가자'는 것이 유신의 기본이념이며 궁극적인 목표이었던 것입니다.

 

미국. 일본. 등이 한국문제에 대해 마음대로 단안을 내리기 전에, 국제 정세변화에 의해 남 북간의 세력 균형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기울기 전에,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자주 국방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절대절명의 긴박한 시점에서 유신이 탄생됐다고 저는 생 각합니다. 

 

박근혜씨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북한의 흉칙한 속셈을 낱낱이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이 비보를 전하러 왔을 때 저는 '북한은...휴 전선은 괜찮으냐'고 물었어요. 평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북한 얘기가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창졸간에도 첫 질문이 그렇게 나왔던 겁니다." 

 

"유신이 과연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인가요"
- 유신과 국가발전을 연관시켜서도 설명이 될 수 있습니까?
"72년말 유신헌법이 발효되고 73년 가을부터 중동전쟁으로 석유를 무기화 하는 바람에 석 유 파동이 있었잖아요.

 

당시 국제 경제는 1930년대 이래 최대위기를 맞았다고 했었지요. 웬 만한 개발도상국들은 이때 타격을 입어 재기 불능의 상태로 주저 앉았구요.

 

그러나 우리는 온 국민이 단결해 석유 파동을 넘겼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기간동안 고도성장을 이룩했습 니다. 

 

물론 우리도 타격이 컸지요.

예를 들어 73년에 기름을 3억달러어치 수입했다면 74년에는 동일한 물량을 수입할 때 10억달러를 지출해야 했으니까요.

 

국제 원자재가격도 폭등해 모든 물가가 덩달아 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부존자원이 거의 없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 리가 난국을 헤쳐나갈 길은 수출로 외화를 더 버는 수밖에 없었어요. 결과는 위기를 훌륭하 게 극복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어요? 온 국민의 슬기를 결집시킨 유신체제로 첫 번째 위기 를 넘긴 것이죠." 

 

박근혜씨는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국가의 위기를 무난하게 넘긴 또다른 예를 들었다. 

75년 월남 패망과 인도지나반도의 공산화가 이뤄지자 북한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 남침을 기도하 려고 했다. 그러나 북한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설명. 

"그 시기에 만일 우리가 정치적으로 불안했다거나 국력신장의 결집력에 어떤 구멍이 뚫렸 더라면 북한은 틀림없이 남침을 강행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일치된 견 해였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유신기간 동안에 일어난 중대한 국가적 위기는 남침용 땅굴사건, 육여사 저격사 건, 북한군에 의한 도끼 만행사건(76년 8월)등을 들 수 있는데 그것들도 커다란 동요없이 극 복하게 된 원동력을 박근혜씨는 유신체제의 이념에서 찾는다. 

 

 

"거의 매년 그런 고비를 넘기면서도 우리는 고도 성장을 해냈지요. 유신 직후인 72년 11월 아버지는 81년까지는 국민 일인당 소득을 1천달러, 80년까지의 수출 목표를 1백억달러로 달 성하겠다고 발표하셨지요. 그런 목표가 모두 시기를 앞당겨 실현이 됐잖아요. 당시 아버지가 그런 계획을 발표하시자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라 아무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 어요.

 

'3대 웃음거리'의 하나라고 했었대요. 

 

 

북한의GNP보다 밑돌던 것을 75년에 비슷한 수준으로 80년에는 두배 이상으로 올려놓은 것도 남이 한발 뛸 때 우리는 열 발자국 뛴 결과가 아니겠어요. 이를 두고 외국 매스컴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지요. 정확하기로 이름난 FAO(세계식량 농업기구)의 정보지 77년 신년호에는 <몰랐던 한국의 기적>이라는 특집을 실어 우리의 발 전을 극찬하기도 했어요. 유신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죠.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최근 한국 농촌의 변모는 1세기의 발자취를 불과 5년에 실 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각국 특히 개발도상국들은 새마을 운동을 귀중한 성공 실험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동남아를 비롯 세계40여 국이 시찰단, 연구전문가를 파견하여 이를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농촌 새마을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성공의 하나는 농가 소득이 도시소득보다 높아진 것이라는 것이었죠.

 

또 이집트의 <알 아랍>지는 '유신결과로 태동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이래 한국은 괄목할 만한 국력신장을 이룩했다'고 평했던 것입니다." 

 

 

- 당시 유신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박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일기장에도 그렇게 쓰셨지만 유신을 반대했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해할 날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하셨어요. 또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도 하셨어요.

 

'.....나는 이 국가 장래에 대한 내 설계와 내 계획이 있단 말이야. 그때까지 만도 기다려 주지를 못하나' 라구요.

 

아버지의 계획과 설계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자주국이 되고, 공산당의 위협을 막을 자 신이 있을 때까지로 시한이 정해져 있었어요. 왜 제가 그걸 아는가 하면 앞서의 아버지 계 획이 이뤄지면 '그후에는 누가 말린다해도 물러나겠다'는 말씀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죠." 

 

- 유신체제는 장기집권의 발판이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는데요.


"아버지가 대통령직에 또 장기집권에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71년 7월1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유신은 72년 10월에 선포했으니까 겨 우 1년여동안 재임한 후에 그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유신을 관철시키셨겠어요.

 

그 당시 앞으로의 임기가 3년간이나 더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만약 장기집 권의 욕심이 있었다면 7대 임기를 거의 마칠 무렵에 유신을 단행하지 않았을까요." 

 

박근혜씨는 유신체제는 장기집권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그 당시 빨리 나라의 체제를 전환 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에서 유신을 결심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그렇기 때 문에 '79년도에는 9대 대통령으로서 상당한 임기를 남겨 두고도 임기에 관계없이 후임자를 지명하고 은퇴하려고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그것은 바로 박대통령이 계 획했던 국가 발전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진단했기 때문에 '그러한 결심을 했을 것이다'고 근혜씨는 말한다. 

 

- 그렇다면 박대통령이 아니라도 그런 일을 다른 사람이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목숨걸고 혁명을 하신 분입니다.

 

경제 성 장은 아직 미흡했고 공산당의 위협은 점점 증대해 가는 시점에서 자칫하면 모든 것이 수포 로 돌아가 버릴 위험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 아버지로서는 '큰'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후에 역사가 알아 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아버지 책임 하에 당신이 설정한 목표까지는 이 룩한 후에 물러나려 하신 것 아닙니까. 솔직히 계산해 보면 유신 전에 시작된 대통령 임기가 75년에 끝나는데(7대 대통령 임기 71.7-75.7)겨우 5년정도 그 자리를 더 지키려고 (박대통령은 80년대 초에 물러날 계획을 세웠다고) 그많은 반대와 비판을 예측하면서까지 유신을 단행할 정도로 어리석은 분은 아니라 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통령 자리의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박대통령과 원로 정치인들이 나눈 대화의 기록 중에서 발췌해 소개했다. 
'

내가 인기 있는 대통령이 되는 길은 간단하다.

 

내가 명예에 연연했다면 대통령은 한번만 해도 족하다. 시골에 내려가 유유자적하게 세월을 보내면 일신상 그 이상 편한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조국을 근대화하고 민족통일의 시기를 단축시키겠다고 하는 나의 신념 과는 상치되는 행동이다.

 

 

나는 우리 국민 가운데 일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땅에서 전 쟁 재현만은 방지하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내가 비난을 받아서 전쟁이 방지된다면 오 히려 영광이다'라는 것. 

 

- 유신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국민의 자유를 유보시켰다는 비판이 있는데...


"아버지가 한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라는 것도 능력이 있을 때는 좋은 제도이지만 그럴 능력이 없을 때는 이 민주제도만큼 취약한 것도 없다'라구 요.

 

한국적 민주주의 태동과 관련해 말씀드리자면 우리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민주제도 형 태는 제2공화국 시절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 데모가 하루에 1천여 곳에서 일 어난 적도 있었다고 해요. 국교생까지 데모를 했으니까요.

 

이것은 아버지가 언젠가 기자회견 에서도 밝힌 내용이예요. 

아버지에게 당시의 야당 정치인들은 '제2공화국식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지요. 하루에 1천 여 곳에서의 데모...

 

그런 식의 민주주의가 지속돼 혼란이 극심해졌다면 벌써 북한에게 유린 을 당했을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오해 (2)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