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계 설총

신용연200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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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계(花王戒) 설총(薛聰)

 

화왕(花王)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는데,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맞아 예쁜 꽃을 피우니, 온갖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꽃들이 다투어 화왕을 뵈러 왔다. 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맑은 정기를 타고 난 탐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모여 왔다.

 

문득 한 가인(佳人)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 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舞姬)처럼 얌전하게 화왕에게 아뢰었다.

 

“이 몸은 백설의 모래 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 유유자적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임금님의 높으신 덕을 듣고, 꽃다운 침소에 그윽한 향기를 더하여 모시고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이 몸을 받아 주실는지요?”

 

 이 때 베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르고, 손에는 지팡이, 머리는 흰 백발을 한 장부 하나가 둔중한 걸음으로 나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몸은 서울 밖 한길 옆에 사는 백두옹(白頭翁)입니다. 아래로는 창망한 들판을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 경치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좌우에서 보살피는 신하는 고량(膏粱)과 향기로운 차와 술로 수라상을 받들어 임금님의 식성을 흡족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또 고리짝에 저장해 둔 양약(良藥)으로 임금님의 기운을 돕고, 금석(金石)의 극약(劇藥)으로써 임금님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르기를, ‘비록 사마(絲摩)가 있어도 군자된 자는 관괴(菅蒯)라고 해서 버리는 일이 없고, 부족에 대비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한 신하가 화왕께 아뢰었다. “두 사람이 왔는데, 임금님께서는 누구를 취하고 누구를 버리시겠습니까?”

 화왕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부의 말도 도리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가인을 얻기 어려우니 이를 어찌할꼬?”

 그러자 장부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제가 온 것은 임금님의 총명이 모든 사리를 잘 판단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뵈오니 그렇지 않으십니다. 무릇 임금된 자로서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 하지 않는 이는 드뭅니다. 그래서 맹자(孟子)는 불우한 가운데 일생을 마쳤고, 풍당(馮唐)은 낭관(郎官)으로 파묻혀 머리가 백발이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이러하오니 저인들 어찌하겠습니까?”

 화왕은 마침내 다음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

 

▶ 어휘 풀이

유유자적(悠悠自適) :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조용하고 편안히 생활하는 일

백두옹(白頭翁) : 머리가 센 노인, 여기서는 할미꽃을 이름

고량(膏粱) : 고량진미(膏粱珍味)의 준말로 기름진 고기와 맛있는 음식

수라상 : 임금의 진짓상

고리짝 : 옷을 담는 상자의 하나로, 고리나 대오리로 엮어서 만든 큰 상자

사마(絲摩) : 명주실과 삼실

관괴(菅蒯) : 관(菅)과 괴(蒯). 둘 다 사초과에 속하는 풀로, 관은 도롱이와 삿갓을 괴는 돗자리를 짜는 원료

가인(佳人) : 아름다운 여자

풍당(馮唐) : 한(漢)나라 안릉(安陵) 사람. 어진 인재였으나 벼슬이 낭관(郎官)에 그쳤음

 

▶ 핵심 정리

지은이 : 설총(薛聰, 생몰 연대 미상) 신라 신문왕 때의 학자. 원효 대사의 아들로서 경주 설씨의 시조. 호는 빙월당(氷月堂). 신라 십현(十賢) 중의 한 사람으로 한림(翰林)을 지냈으며 주로 왕의 자문 역할을 했다. 국학(당시의 국립대학)에 들어가 구경(九經)을 우리말로 가르쳤다. 이두를 집대성하였으며 경서에 토를 달아 읽는 법을 창안했다. 강수(强首), 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불린다.

갈래 : 설화(서사)

성격 : 의인체 설화

내용 : 왕은 간사하고 요망한 자를 멀리 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 하여야 한다.

문체 : 역어체. 설화체

제재 : 꽃

주제 : 임금에 대한 경계

출전 :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창작 설화, 고려 시대 가전체에 영향, 의인 문학의 형성 가능성을 보여 줌

 

▶작품 해설

 

어진 임금 밑에는 어진 신하가 모이고, 폭군 밑에는 간신들이 모이는 역사적 교훈을 꽃들에 비겨 이야기했다. 또 교훈적인 내용을 우의적 수법으로 전달하여야 하는 우화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모든 인간 관계에 통용될 수 있는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인 깊이가 가지는 교훈적 내용을 생각하며 글을 읽어 보자.

 

이 작품은 식물을 의인화해서 사람의 처신을 말함으로써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여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의인 설화로서 문학적인 가치가 있다.

백두옹으로 자처하는 인물이 화왕 앞에 나타나서, 그 동안의 생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충간한 말은 깊이 새겨야 할 뜻을 담고 있다. 서울 밖 한길가에 산다고 하면서 자연의 경치를 말한 데서는 선비의 고결한 품성에 관한 은근한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즉 화려한 서울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마음의 바른 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임금에게 하는 말은 부귀만 누리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원기를 돋우고 독을 제거하는 약이 또한 필요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 약이야말로 백두옹이 제시해 줄 수 있는 마음의 바른 도리이다.

설총은 이런 구실을 하는 백두옹으로 자처하고자 했고, 신문왕은 또 그 점을 인정했다.

 

▶ 심화 학습

‘화왕계’, ‘화사’, ‘화왕전’의 비교(1)

 

 ‘화왕계’를 ‘화사’와 ‘화왕전’과 비교하여 보면, 꽃에 인성(人性)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수법과 군주를 주인공으로 풍자한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판이하다. 이러한 의인화 수법은 한유의 ‘모영전’을 비롯해 당·송의 가전과 고려 가전체에 나타난다.

 

(2) ‘화사’는 꽃을 국가 군신에 비유하고, 중국의 역사를 본떠서 한(漢)나라의 흥망성쇠를 논했다. 당시 정치, 사회상을 비판하고, 제왕의 치국(治國) 사상을 보인 정치 비평 소설이다. 제왕의 흥성에 보좌하는 신하의 충절이 있으면 왕업이 창성하게 된다는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3) ‘화왕전’은 ‘화사’에 비해 직·간접 표현법과 성격 묘사,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흥미 유발 등으로 보아 소설로서 한 발 나아간 구조이다. 제왕이 호사 호색에 빠져 충간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으로 군주의 치국 사상에 경계가 되는 교훈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