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장차 수도가 이전할 때를 위하여 이미 치밀한 설계 도면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중국과 교역할 시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서해안에 해상 물류 유통 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실로, 그의 경제 전략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았기에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통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워낙 시장 경제가 튼튼하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한번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경제기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정책 여하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양김씨의 합작품인 IMF 사태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경제 주권 상실은 정치적 주권마저 위협하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안정된 경제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게 아직 진행 중이었던 경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 재출마의 기회를 부여하였던 유신 헌법 때문에 그가 독재자였던가?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오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정말 좋은 시절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청년기에 미국은 부강한 나라,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릴 적 미국은 몹시도 가난한 나라였다.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의 대공황 때 실업율이 아주 높았으며, 생필품은 커녕 식량 구하기 어려운 가정들도 많았다. 마비된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으며, 거리에 넘쳐나는 어깨쳐진 실업자들이 매일 구직의 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도 이때가 경제 문제가 미국의 존속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경기가 나쁘고 소득이 줄 수록,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소비가 줄 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역대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미국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어서 정부마저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이때 등장한 미국 경제 재건의 영웅이 바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은 절뚝발이이면서 미국의 절뚝발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장래가 유망한 소년으로서 갓 청년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던 루즈벨트는 한때 몹시 절망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다시 걷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또 도전하고 도전하였던 그였기에 그의 연설에는 남달리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의 대경제 공황 앞에서 절망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는 연설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정신을 조성했다.
여기서 1960년대에 우리 민족도 잘 살수 있다는 믿음과 꿈을 심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때는 미국에서 경제 이론이 헤매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황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더욱 더 공황의 늪에 빠기게 함에 따라 정부가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영국의 자유 시장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불황의 늪 앞에서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해 노동 시장을 창출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라고 미국병을 고치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도자 스타일이 있었다.
박정희와 양김씨가 다르릇 루즈벨트는 다른 대통령들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실론 인내와 끈기는 한국인의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런 한국적인 미덕이 루즈벨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구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늘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그는 다시 걷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으나 자신의 장애와 싸우는 사이 그는 남달리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용감하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하라. 만약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하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항상 여유 있게 웃고 있던 대통령 루즈벨트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루즈벨트는 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불굴의 투지로 꿈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좌익들과 그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가 문경국민학교에 부임하던 날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몰매맞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튿날 자취를 감춘 박정희는 여러해 후에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다시 그 일본인 폭행 교사들 앞에 일본검을 들고 나타나 그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행에 그가 항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일본군 포병대 장교였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포병대 장교가 되었다는 말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 습득을 의미한다.
포병 장교가 되려면 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받는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포의 발사는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수학적 계산에서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대포는 절대로 명중하지 않는다.
화학을 모르고 폭탄을 다를 수 없으며, 대포는 물리학 원리를 응용한 현대 무기이다.
즉, 한 사람의 포병 장교에게는 적어도 기초 과학에 관한한 탄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인문계 대학에만 진학하게 하고 과학 두뇌의 등장을 제한하였던 시대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3년간의 미소 신탁통치 없이 한국의 미래를 한국인의 손에 내버려두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해산시키고 총독부를 접수하기 어려웠겠지만 그것도 가능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중공군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내전에 중국 공산당 군대나 러시아 군대가 불참하였다고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상해 임정을 제외하면 전혀 민주주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상해 임정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
정권을 잡은 박헌영의 남로당은 죽창 들고 지주들과 부자들을 찔러 죽였을 것이다.
그들이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했던 것은 해방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하에서 5년간 못했던 것을 한 것이다.
땅 기진 사람과 재산 있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그들의 경제 이론이다.
그렇게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면 빈부의 차별이 없어지니 국민 경제가 향상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농산물 생산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 산업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이 철수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었다.
바로, 그 점이 2차 대전 후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무런 과학 지식이 없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국민 GNP가 75불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면 미국의 무상 원조마저 없는 박헌영 치하에서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존속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박헌영의 공산당 일파가 부자들과 지주들을 모두 죽이고 경제 시스템을 망가뜨린 다음에는 아무런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나라는 다시 외국에 빚을 지게 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해방 정국의 정권을 절대로 박헌영의 남로당에 넘겨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을 써 준 분이 맥아더 원수였다. 군정 기간 동안 한국의 잘래를 위하여 이승만 정권 탄생을 후원한 맥아더 원수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옳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문계와 이공계의 두뇌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학 박사였으나 농업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한국이 식량 자급자족도 못하는 빈농국에서 30년만에 산업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 두뇌가 있었다. 앞은 내다보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과학연구소(KIST)를 설립한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중화학공업단지 등 새로운 첨단산업 단지들이 건설될 때마다 미국에 기술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여 그들로부터 신속하게 기술 이전을 해오신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을 현장 실무자보다 더 잘 파악하고 계셨던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코 한 나라의 경제는 자연발생적으로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산업 개발을 차관을 빌리기가 무척 어려운 이유는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농업국을 산업국으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경제 전략 그리고 반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행하시는 투지가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디일 정책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처럼 독재성이 있는 정책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그러기에 일국의 경제 발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런 논리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도 한국의 박정희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적 경제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4년씩 두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통령 임기를 헌법을 개정하여 연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루즈벨트와 박정희 두 대통령은 공통적이다.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모두 열등감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었다.
흔히 박정희의 키가 작은 열등감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청년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실학과 일본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루즈벨트와 더불어 실로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가운데 연마되는 정신력과 닦아지는 지도력--이것은 실로 한국의 신세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지도력이다.
요즘 청년 좌익들처럼 선동적인 기질만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도력을 그들은 난세에 키우며 꽃피웠던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던 1979년 10.26 사태의 비극은 부마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잘못된 관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은 곱게 보지 않았으며, 부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일본의 편파적인 방송이라는 사실을 김재규는 모르고 있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는 민족 중흥의 영웅
난세의 두 영웅 루즈벨트와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 천년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차이가 무엇인가?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를 세우셨으며,
주산을 사용하던 시절에 건설 비용을 정확히 산출해 내고 추진하셨다.
그런데, 발전하는 한국을 위한 물류 유통의 중요성을 내다보지 못하던 양김씨는
극렬하게 공사 반대 시위를 선동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차 수도가 이전할 때를 위하여 이미 치밀한 설계 도면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중국과 교역할 시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서해안에 해상 물류 유통 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실로, 그의 경제 전략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았기에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통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워낙 시장 경제가 튼튼하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한번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경제기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정책 여하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양김씨의 합작품인 IMF 사태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경제 주권 상실은 정치적 주권마저 위협하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안정된 경제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게 아직 진행 중이었던 경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 재출마의 기회를 부여하였던 유신 헌법 때문에 그가 독재자였던가?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오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정말 좋은 시절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청년기에 미국은 부강한 나라,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릴 적 미국은 몹시도 가난한 나라였다.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의 대공황 때 실업율이 아주 높았으며, 생필품은 커녕 식량 구하기 어려운 가정들도 많았다. 마비된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으며, 거리에 넘쳐나는 어깨쳐진 실업자들이 매일 구직의 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도 이때가 경제 문제가 미국의 존속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경기가 나쁘고 소득이 줄 수록,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소비가 줄 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역대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미국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어서 정부마저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이때 등장한 미국 경제 재건의 영웅이 바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은 절뚝발이이면서 미국의 절뚝발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장래가 유망한 소년으로서 갓 청년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던 루즈벨트는 한때 몹시 절망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다시 걷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또 도전하고 도전하였던 그였기에 그의 연설에는 남달리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의 대경제 공황 앞에서 절망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는 연설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정신을 조성했다.
여기서 1960년대에 우리 민족도 잘 살수 있다는 믿음과 꿈을 심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때는 미국에서 경제 이론이 헤매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황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더욱 더 공황의 늪에 빠기게 함에 따라 정부가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영국의 자유 시장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불황의 늪 앞에서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해 노동 시장을 창출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라고 미국병을 고치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도자 스타일이 있었다.
박정희와 양김씨가 다르릇 루즈벨트는 다른 대통령들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실론 인내와 끈기는 한국인의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런 한국적인 미덕이 루즈벨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구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늘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그는 다시 걷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으나 자신의 장애와 싸우는 사이 그는 남달리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용감하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하라. 만약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하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항상 여유 있게 웃고 있던 대통령 루즈벨트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루즈벨트는 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불굴의 투지로 꿈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좌익들과 그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가 문경국민학교에 부임하던 날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몰매맞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튿날 자취를 감춘 박정희는 여러해 후에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다시 그 일본인 폭행 교사들 앞에 일본검을 들고 나타나 그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행에 그가 항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일본군 포병대 장교였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포병대 장교가 되었다는 말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 습득을 의미한다.
포병 장교가 되려면 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받는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포의 발사는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수학적 계산에서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대포는 절대로 명중하지 않는다.
화학을 모르고 폭탄을 다를 수 없으며, 대포는 물리학 원리를 응용한 현대 무기이다.
즉, 한 사람의 포병 장교에게는 적어도 기초 과학에 관한한 탄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인문계 대학에만 진학하게 하고 과학 두뇌의 등장을 제한하였던 시대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3년간의 미소 신탁통치 없이 한국의 미래를 한국인의 손에 내버려두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해산시키고 총독부를 접수하기 어려웠겠지만 그것도 가능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중공군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내전에 중국 공산당 군대나 러시아 군대가 불참하였다고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상해 임정을 제외하면 전혀 민주주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상해 임정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
정권을 잡은 박헌영의 남로당은 죽창 들고 지주들과 부자들을 찔러 죽였을 것이다.
그들이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했던 것은 해방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하에서 5년간 못했던 것을 한 것이다.
땅 기진 사람과 재산 있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그들의 경제 이론이다.
그렇게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면 빈부의 차별이 없어지니 국민 경제가 향상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농산물 생산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 산업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이 철수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었다.
바로, 그 점이 2차 대전 후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무런 과학 지식이 없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국민 GNP가 75불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면 미국의 무상 원조마저 없는 박헌영 치하에서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존속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박헌영의 공산당 일파가 부자들과 지주들을 모두 죽이고 경제 시스템을 망가뜨린 다음에는 아무런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나라는 다시 외국에 빚을 지게 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해방 정국의 정권을 절대로 박헌영의 남로당에 넘겨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을 써 준 분이 맥아더 원수였다. 군정 기간 동안 한국의 잘래를 위하여 이승만 정권 탄생을 후원한 맥아더 원수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옳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문계와 이공계의 두뇌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학 박사였으나 농업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한국이 식량 자급자족도 못하는 빈농국에서 30년만에 산업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 두뇌가 있었다. 앞은 내다보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과학연구소(KIST)를 설립한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중화학공업단지 등 새로운 첨단산업 단지들이 건설될 때마다 미국에 기술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여 그들로부터 신속하게 기술 이전을 해오신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을 현장 실무자보다 더 잘 파악하고 계셨던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코 한 나라의 경제는 자연발생적으로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산업 개발을 차관을 빌리기가 무척 어려운 이유는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농업국을 산업국으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경제 전략 그리고 반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행하시는 투지가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디일 정책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처럼 독재성이 있는 정책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그러기에 일국의 경제 발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런 논리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도 한국의 박정희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적 경제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4년씩 두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통령 임기를 헌법을 개정하여 연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루즈벨트와 박정희 두 대통령은 공통적이다.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모두 열등감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었다.
흔히 박정희의 키가 작은 열등감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청년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실학과 일본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루즈벨트와 더불어 실로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가운데 연마되는 정신력과 닦아지는 지도력--이것은 실로 한국의 신세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지도력이다.
요즘 청년 좌익들처럼 선동적인 기질만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도력을 그들은 난세에 키우며 꽃피웠던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던 1979년 10.26 사태의 비극은 부마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잘못된 관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은 곱게 보지 않았으며, 부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일본의 편파적인 방송이라는 사실을 김재규는 모르고 있었다.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