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말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그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세 사람에게 완벽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코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우리 세 사람?"
되묻자 하나코는 그럼 누굴 위해서겠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는 살 곳이 생기고, 너는 집세 부담을 덜 수 있고, 그리고 다케오 씨는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라고 설명한다. 나는 헐미에 물이 스미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걱정하다니, 내 집세 때문이야, 아니면 하나코가 있을 곳이 없어서야?"
"양쪽 다지."
하나코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잘 곳이 없다는 하나코를 하룻밤만 재워주기로 하고, 나는 커피를 끓였다. 저녁밥도 먹지 못했을 하나코를 위해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얇은 빵에 버터와 잼을 바르면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람,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공백보다는 나았다. 다케오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은 혼자서 책을 읽는 것보다 다케오에게 가까운 일이었다.적어도 다케오와 관계 있는 일이었다.
밤새 다케오를 생각했다.
하나코에게 버림받은 다케오를. 보고 싶은 여자를 볼 수 없게 된 다케오를.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가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살았을 때, 내가 무서운 꿈을 꾸면 다케오는 반드시 일어나 나를 꼭 안아주었다. 아무리 무서운 꿈을 꿔도 나는 금방 안식을 찾았다. 다케오의 품안에서. 설사 다케오의 동작이 단순한 조건반사이고, 안고 있으면 곧바로 코고는 소리를 내는 때라도.
그러나 나는 다케오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코는 모른다. 이때 나는 확신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공유할 때의, 흔해빠진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행복,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의 축적.
예를 들면 겨울 아침, 다케오 옆에서 당연한 일이듯 눈을 뜨는 것. 차가운 발을, 건장하고 따스한 생명력에 넘치는 다케오의 발에 휘감을 때의 안식감. 뿌연 유리창.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몇 분.
예를 들면 역에서 거는 전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다케오의 목소리. 드러누워 열심히 추리소설을 읽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떠올린다. 만남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예를 들면 일요일 낮의 섹스. 신나게 늦잠을 자고 깨났다가 몇 번이나 권태로운 섹스를 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린다. 다시 눈을 뜨면 저녁이고, 둘 다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른다. 그래서 동네 메밀국수 집에 간다. 선반 위에 놓인 텔레비전, 얇게 먼지 낀 복인형, 턱?괴고 있는 다케오의 소매 끝이 닳은 가죽 점퍼, 따끈따끈한 메밀국수 삶은 물.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넉넉함.
하나코는 모른다. 바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텅 빈 방으로 돌아오자, 다다미 방 구석에 절반으로 자른 파가 컵에 꽂혀 있었다. 하나코가 꽂은 것이리라. 서글픈 아름다움이었다.
갑자기 시간이 생긴 탓인가, 나는 청소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걸레로 바닥을 닦고, 싱크대의 스테인레스도 세제를 뿌려 깨끗하게 닦았다. 상큼한 봄의 햇살이, 어딘가 모르게 다다미 방에 있는 파를 닮았다.
30분은커녕 세 시간이 지나도 하나코는 돌아오지 않았다.
리카, 동물 길러본 적 있어?
언제였나, 하나코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여름이었다. 베란다에서 풋콩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얘기했었다.
"있지. 개도 고양이도. 우리 고향집에는 지금도 개 길러."
그러니, 하고 말하고 무슨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한 하나코, 그러고는 부럽다는 듯이, 좋겠다, 라고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겠다.
너무도 어린애 같은 목소리에 나는 그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럼 키우면 되잖아. 넌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키울 수 있잖아."
고개를 저으며 쓸쓸하게 웃었던 하나코의 모습이 기억난다.
"안 돼, 난 살아 있는 거 싫어."
모순이다. 하나코는 늘 모순에 차 있었다.
# 에쿠니 가오리 - 낙하하는 저녁
# 전반부에 , 내게 비친 리카의 모습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 '어쩌면 이런 여자가…'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사랑 , 사랑 그 자체였다. 언제나 내 모든 헌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었기에 , 내겐 리카가 그렇게 비춰졌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리카의 실연을 다룬 이야기인지 , 자꾸만 읽어가는 내내 몽환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바로 , 하나코의 존재성 때문이였던것 같다. 소설 속 인물 중 어느 누구도 하나코의 존재 여부를 잊지 않는다. 그녀는 없어도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내게도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하나코 , 첫인상이 몹시도 뻔뻔스러웠던 그녀는 , 사랑하지 않을수 없는 존재인듯 하다. 아니 ,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서 일까 , 다케오에 대한 리카의 마음보다는 , 끝끝내 하나코 , 온통 하나코 투성이였다. 내겐 , 그러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리카의 실연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다케오에게 당한 실연이였고 , 그 가운데엔 하나코가 있었기 때문에.
[눈+가슴] 낙하하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