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백지현2006.09.24
조회146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1. 인형의 다리 Piedi Della Bambora

 

 

무서운 꿈을 꾸었다.

무서운 목소리에 쫓기는 꿈. 목소리는 웃음을 흘리고 있다.

목소리가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꿈속의 나는 안다.

아무리 도망쳐도 목소리는 바로 등뒤로 쫓아와,

목덜미에 숨이 닿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당장이라도 어깨를 움켜쥘 것 같다.

나는 무서워서 돌아보지 못한다.

가슴을 뚫고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리는 맥박.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데, 목소리는 나를 붙잡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나, 한참이나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 안 가득 생식하고 있는 밤의 어둠.

옆에서 자고 있는 마빈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소름 끼치는 꿈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온몸 여기저기에 생생한 감촉이 남아있다.

괜찮아. 나는 힘을빼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발끝을 쭉 뻗어, 차가운 시트를 더듬어 본다.

괜찮아. 그냥 꿈이었어.

침대에서 내려와, 빨간 구슬로 수가 놓여진 차이니즈 슈즈에

두 발을 쑤셔넣는다. 너무 작다고, 늘 마빈이 놀리는 발이다.

마치 인형 발 같다고 그런다.

도무지 살아있는 인간의 발 같지 않다고.

하지만 마빈은 내 발을 좋아한다.

이 빨간 차이니즈 슈즈도 마빈이 선물해 준 것이다.

차이니즈 슈즈는 발소리가 나지 않아 편리하다.

나는 침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서,

검은 철제 파이프 의자에 앉는다.

부엌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은 어째서일까.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수납되어 있고,

반짝반짝 깨끗하게 닦여있는 부엌.

일주일에 한 번, 파출부가 찾아와 유리창까지 닦아 준다.

오븐의 디지털 시계는 새벽 2시 8분을 가리키고 있다.

정적.

고개를 숙이고, 내 발과, 대리석 바닥의 모양을 바라본다.

어린애 같은 단순함으로.

침대로 돌아가자 마빈이 깨어 있었다.

"아오이?"

어디갔었어, 라고 졸린 목소리로 묻는다.

몸을 뒤척여, 그 우람한 체구를 내 쪽으로 향한다.

"아니, 그냥."

나는 말하고, 마빈의 품속으로 들어간다. 따스한 장소.

"미안해요. 잠 깨웠나 봐. 목이 말라서 물 마시고 왔는데."

나는 마빈의 가슴에 코를 묻었다. 부드러운 잠옷의 감촉과

체온과 살 내음. 마빈은 벌써 잠들었고, 나는 움직일 수 없다.

2분을 기다리고서 마빈의 팔에서 빠져 나온다.

 

 

시끌시끌한 한낮의 카페,

이 거리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다.

사방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 쟁반에 담긴 조그만 과자,

활기차게 테이블 사이를 헤치고 다니는 웨이터, 담배연기.

"엄마가 너 몹시 보고 싶어하셔."

다니엘라가 말한다. 다갈색 눈동자,

구불구불 웨이브진 같은색의 머리카락.

"그야 물론 아빠나 동생도 마찬가지지. 요즘 들어 통 안오잖아."

"미안해, 안젤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나는 말하고, 조그만 잔에 담긴 커피를 마신다.

마빈이 비유하기를, '진흙탕처럼 진하고 쓰다'는 커피.

"거짓말."

그 커피에 설탕을 듬뿍 집어 넣고 스푼으로 저으면서

다니엘라가 말했다.

"안젤라가 오기 전부터 그랬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고 있어도,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목소리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다니엘라는 몸집도 크고, 다리도 길다.

무릎 아래 종아리는 특히 미끈하고 예쁘다.

얼굴도 풍만한 상반신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갸름하다.

"안젤라, 언제까지 있는데?"

침묵을 견디다 못하고, 말투를 바꾸어 다니엘라가 물었다.

"글쎄."

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안젤라는 마빈의 누나다. 이혼하고 한 달 전부터 밀라노에 있다.

마빈은, 그냥 바람이나 쐴 겸 여행하는 거겠지 뭐, 라지만

전혀 돌아갈 눈치가 아니다. 하기야 한 달 중에 절반 이상은

로마니 베네치아니 하고 돌아다닌 덕분에 집에는 없었지만.

"마빈한테 따져야지."

다니엘라가 말한다. 포동포동한 상반신과 격조있는 분위기 때문에,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젊어보인다.

싱그럽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솔찍한 성격과 상대방이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웃는 얼굴도.

"왜?"

"왜냐구?"

다니엘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빙 돌렸다가

테이블 위로 몸을 내민다. 금색 목걸이가 커피 잔에 빠질 것 같다.

"그냥 이대로 눌러 있으면 어떻게 하려구?

  게다가, 지금 같아서는 바캉스 계획도 세울 수 없잖아."

나는 목을 움츠렸다. 나도 빌붙어 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빈과 함께 생활한지 1년이 약간 넘는다.

그는 가게에서 한눈에 내게 반해 몇 번이나 데이트 신청을 했다.

가게란 내가 일하고 있는 보석 가게다.

지금은 일주일에 세번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 무렵에는 풀 타임이었다. 돈 많은 미국인.

처음에는 그런 인상뿐이었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늘 말쑥하고 향기로운 덩치 큰 남자.

"당신 의견은?"

몇 가지 물건을 보여주면, 마빈은 마지막에 반드시 그렇게 물었다.

서른 여덟 살의 독신, 펜실베니아 주 출신.

포도주를 수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려서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지만)는 마빈은 논리적이고,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없는 류의 유머라고 생각했다.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데 계속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 데이트는 늘 즐거웠다.

마빈은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금방 '데조로(보물)'라 불리게 되었고,

그리고 같이 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 엄마 실망시킬 거 아니지?"

다니엘라가 말한다.

"그럴 리가 있겠니. 조만간 놀러갈께."

나는 대답하고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밖은 화창하고 밝았다. 브레라에 쇼핑을 하러 간다는 다니엘라와

헤어져, 나는 도서관에 간다.

반납해야 할 책이 여덟권, 차에 실려있다.

 

 

아파트에 돌아오자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고풍스런 외관과는 반대로, 온도를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고

- 솔직하게 말하면 완벽 이상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 , 고전적인 가구가 차분하게 배치되어 있는

이 고급 아파트에서, 나는 목욕탕이 가장 마음에 든다.

다른 방에 비하면 너무도 간소하고, 창문을 열면

좁다란 베란다 너머로 버드나무 가로수가 나란한 뒷길이 보인다.

좁은 골목길인데, 양쪽으로 차가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다.

해질녘이면 나는 목욕하기를 좋아한다.

공기에 아직 따스함이 남아있는 시간.

일이 없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할 때까지 거의 목욕탕에서 지낸다.

마빈이 심심하면 스포츠 센터에 가는 것처럼.

다만 스포츠 센터와 달리 목욕탕은 무미건조하다.

하얀 면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부엌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마빈이 돌아왔다.

"다녀왔어."

볼에 키스를 하며 말한다.

"또 공부흐고 있는거야?"

"공부 아니에요. 그냥 소설 읽는거지."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의 표지를 보여 준다.

부엌에는 야채수프 냄새가 가득하고,

나는 마빈이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다음 날은 목요일이라서 일이 끝난 후 시내로 영화를 보러 갔다.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였다. 마빈과 다니엘라,

다니엘라의 남자친구인 루카까지 네 명이 함께 갔다.

목요일 밤에는 항상 영화를 본다.

극장은 관람객들로 몹시 붐볐지만, 다니엘라와 루카는

사람이 많은 편이 좋다고 한다. 텅 빈 썰렁한 극장은 쓸쓸해서

전혀 행복하지 않단다. 더구나, 같은 주말이라도 금요일에는

교외로 나가고 싶잖아, 라고 다니엘라가 말한다.

나나 마빈은 그 점은 이해하지 못한다. 여느 때 같은 장소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니까.

토요일, 마빈은 항상 스포츠 센터에 가고

나는 대낮까지 늦잠을 잔다.

아무튼 이 곳 사람들 생각은 한결같이 다니엘라 같은 듯,

목요일 밤의 극장은 아주 화려하다

(마빈과 나는 복잡한 로비에만 있어도 기가 죽고 만다).

노베첸토(20세기라는 뜻) 역시 예약 손님으로 가득했다.

이 곳은 마빈이 좋아하는 가게라서, 미리 전화를 하면

창가의 테이블을 비워 둔다. 웨이터들은 활기차고, 시끄러움이

오히려 식욕을 자극하는 흔치 않은 가게 중 하나다.

"그 여배우 굉장히 예쁘더라."

다니엘라가 말하자,

"라스트 신이 아주 묘하던데."

라고 루카가 말했다. 루카는 키가 크고 야위었다.

식사량은 아주 적은데, 포도주는 늘 양껏 마신다.

적포도주는 몸에 좋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낮에 안젤라 누나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더군."

내 접시에 야채 샐러드를 덜어 주면서 마빈이 말한다.

"내일 모레 돌아오겠대."

"그래요."

나는 싱긋 웃는다.

"로마, 어떻데요?"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테베레 강가를 매일 산책하고 있대."

눈에 아른아른했다. 잔 머리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질끈 하나로 동여맨 머리 스타일에, 선글라스를 끼고

한손에는 지도를 들고 걷는 안젤라.

복잡하게 몇 겹으로 겹쳐입은 셔츠,

기념품 가게를 한군데씩 들여다보는 모습.

"여긴, 어느 정도 있는데요?"

다니엘라가 물었다. 따지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가 담긴 목소리다.

그녀 나름의 정의감이리라.

"글쎄 알 수가 있어야지."

마빈은 거리낌 없는 말투였다.

나는 창 밖을 본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가로수의 초록이 번져 보인다.

"지난 번에 본 영화가 더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느닷없이 루카가 말했다.

"지난 번이라니, 정신병원 나오는 거?"

다니엘라는 코를 찡그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난 그 감독 영화, 별로 안 좋아하나 봐."

마음이 상한 말투였다. 루카는 피식 웃으며 다니엘라의 어깨를

껴안는다. 나는 표크로 샐러드를 떠 올린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빈은 욕조에 물을 받아 주었다.

"소금은?"

"안넣어요."

그리고 목욕물이 찰 때까지 내 목덜미를 주물러 준다.

욕조 끝에 앉아서.

"이탈리아 말은 영 어렵단 말이야."

"아주 잘하고 있어요."

내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마빈은 다소 말이 없다.

"다니엘라의 영어보다는 훨씬 나아요."

마빈은 손길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본다.

뜻밖이라는 표정.

"내가 그런식으로 이탈리아 말을 한단 말이야? 문장이라기보다,

 뭐랄까, 억양 하나 없는 단어의 나열 같은, 그런 식으로?"

나는 끝내 웃고 만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아요."

"Good."

마빈은 조그만 소리로 말하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마빈은 안마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목에서 어깨, 등 머리.

나는 마빈의 무릎에서 미끄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는다.

등뒤로 콸콸 쏟아지는 물 소리를 들으면서.

"아아, 시원하다."

황홀하게 말했다. 천천히 풀어진다. 더운 물냄새, 김이 서리는 거울.

"안젤라 누나 일 미안해요.

 다니엘라가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알아."

마빈이 말한다. 마빈은 손이 커서, 내 이마를 완전히 감싸 버린다.

관자놀이에 가해지는 기분 좋은 압력, 똑딱거리는 손목 시계소리.

"이제 그만, 고마워요."

나는 일어나 물을 잠갔다. 사방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같이 들어갈래요?"

어쩐지 그렇기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마빈이 미소짓는다.

"아니, 됐어. 혼자서 느긋하게 즐겨."

나는 다시 한번, 조그만 소리로 고맙다고 말한다.

"천만에 말씀."

마빈이 말하고 내 이마에 키스를 한다.

모두들 - 마빈은 다르다. 마빈은 다르지만 그 외의 사람들 - 나를

대하기 어려워한다. 나는 그서을 안다.

 언제였던가, 다니엘라가 분명하게 말했다.

"아오이, 변했어."

겨울이고, 우리는 트램(시가전차)을 타고 있었다.

군밤 주머니를 들고 있던 다니엘라의 검은 가죽장갑이 기억 난다.

"사람을 멀리하고 있어."

나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 당장이라도 비나 진눈깨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 아래서, 트램은 토리노 거리를 덜컹덜컹 달리고 있었다.

"듣고 있는거야?"

다니엘라는 여섯 살 때부터 친구다.

처음 다닌 초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

"네가 일본으로 유학 간다고 할 때, 말렸어야 하는 건데."

매주 수요일 방과후면, 같이 발레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다니엘라의 연습 가방. 검정 레오타드, 콧잔등에 돋아있는 주근깨.

그 후 나는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다니엘라와는

내내 사이가 좋았다. 엄마들끼리 친했던 까닭도 있으리라.

서로의 집에 종종 자러 가기도 했다.

"4년이나 떨어져 있었잖아."

트램의 흔들림에 맞추어 다리를 살짝 벌리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나는 말했다.

"4년이나 지나면, 누구든 조금은 변하지 않을까?"

다니엘라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옷을 벗고, 머리칼을 위로 틀어 올리고, 나는 욕조에 몸을 담근다.

투명하고 따뜻한 물 아래서, 내 피부가 흔들흔들 흔들려 보인다.

 

 

보석 가게는 도시 한가운데서 약간 어귀진 곳에 있다.

산피오네 공원의 서쪽, 주택가의 한 모퉁이다.

아파트에서는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조그만 가게는 지나와 파올라라는 늙은 자매가

경영하고 있다. 하기야 요즘 들어 실무적인 것은 지나의 아들이

맡고 있어, 그 덕분에 가게 분위기도 다소 바뀌었다.

오리지널 보석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이게 조금씩 인기를 모아,

그는 여름에 가게를 한 군데 더 늘릴 계획이다).

원래는 앙티크 보석 가게다.

 지나와 파올라가 사들이는 앙티크는 정말 멋지다.

하나하나가 그 안에 담겨있을 사연을 환기시킨다.

늙은 자매는, 액세서리는 사랑받은 여자의 인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나는 페데리카를 떠올린다.

가게 안쪽에 있는 공방에서는,

파올라의 손자인 알베르토가 일하고 있다.

알베르토는 섬세한 성격의 청년으로, 속이 비칠 듯 피부가 하얗다.

오리지널 보석이 성공한 것은 그의 감각과 기술 덕분이다.

나는, 이 보석가게에서 일주일에 사흘 일한다.

밀라노에 돌아온지 반 년 후부터 시작했으니까,

벌써 3년이나 지났다. 나 자신은 액세서리를 하지 않지만,

딱 한 번 산 일은 있다. 파란 에나멜과 조그만 진주가 어우러진

심플한 반지로, 나는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1920년대 물건인 듯하였다. 잘 어울린다고 지나가 말해 주었다.

당신은 할머니들하고 마음이 맞는 모양이야.

마빈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점심 시간이 두 시간이라 대개는 아파트로 돌아가 먹고 온다.

마빈과 약속하여 같이 먹기도 한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일도 있다.

 

 

저녁 식사 후, 그릇을 헹구고 있는데 마빈이 내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렇게 뒤에서 껴안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안심해 버릴 것 같아서.

마빈이 귓볼을 깨물어 설거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얌전하게 있어 줄래요."

내가 말하지만 마빈은 듣지 않는다.

"나중에 씻으면 되잖아."

우리는 침실로 간다.

전등의 종이갓은 마빈이 특별히 주문한 것이다.

방 전체로 부드러운 빛을 던지고 있다. 차분한 밝음.

마빈은 질서를 존중한다. 나는 마빈의 허벅지를 좋아한다.

보기 좋게 발달한 근육. 우리는 천천히 사랑을 나눈다.

마빈은 몇번이나 부드럽게 내 발가락을 깨문다.

벌꿀을 핥는 곰처럼.

나는 눈을 감고, 해변의 모래가 된 듯한 분에 젖는다.

헹군 접시들을 모두 식기 세척기에 넣고, 싱크대를 깨끗하게

닦고, 나는 의자에 앉는다.

오븐의 디지털 시계는 오전 0시 59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빈과의 섹스는 행복하다. 충족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토요일에는 한낮이 되도록 잤다.

눈을 뜨니 마빈은 이미 스포츠 센터에 간 후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소파에다 쿠션을 쌓아 놓고 기대어 책을 읽으며 지냈다.

5월의 밀라노는 굉장히 밝다.

다른 도시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달에 비해서 그렇다. 가을에서 겨울까지가 너무 길고,

언제든 날씨는 싸늘하고 찌뿌드드하다.

그런 날씨에 익숙해져 있는데,

불쑥 5월이 찾아오면 깜짝 놀랄 만큼 밝게 느껴진다.

엄마는 밀라노의 초여름을 좋아했다.

커다란 가방을 두 개 - 지갑과 수첩과 생수가 뒤죽박죽 들어 있는 숄더 백 외에 - 들고 안젤라가 돌아온 것은,

햇살이 가물가물해진 오후였다.

"하이, 허니."

가방으로 문을 밀치면서 들어와 미소짓는다.

몇겹이나 겹쳐 입은 셔츠, 가슴께에는 선글라스.

"어서오세요."

우리는 포옹하고 볼에 키스한다.

"마빈은?"

손님용 침실로 짐을 다 옮기고, 우리는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

"스포츠 센터에 갔어요.

 하다 만 일이 있어서, 그대로 사무실에 간다고 했어요."

"그래?"

"전화 걸어 벌래요?"

안젤라는 아름답다. 너무 야윈 듯하지만, 힘이 넘치고 들사슴같다.

"아니, 괜찮아. 고마워."

한쪽 다리를 접고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홍차를 마신다.

가느다란 다리를 감싸고 있는 쫄바지,

허리에 둘둘 감은 분홍색 스웨터.

"로마는 어땠어요?"

찻잔으로 시선을 떨군 안젤라가, 창문으로 비치는 저녁 햇살을

얼굴 반쪽으로 받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멋있었어(Febulous) 가 본 적 있어?"

"네, 몇 번."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많은 곳을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였지?"

안젤라의 눈동자가 마빈과 똑같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안다.

깊고 그윽한 갈색 눈동자.

"한 10년 전쯤일 거예요. 고등학생일 때, 친한 친구들이랑."

안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로마겠죠?"

내가 고개를 들자, 안젤라는 질문을 앞서가듯,

"시간의 흐름이 끔찍하도록 느리니까."

이라고 말한다. 끔찍하도록, 을 힘주어 발음했다.

"정말 흥미로운 나라야."

그리고 우리는 잠자코 홍차를 마셨다.

아마도,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여덟 시가 넘어서 마빈이 돌아왔다.

"왔어요, 누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로군요."

이렇게 휴일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날에도 마빈은 활기차게 보인다.

"다녀왔어, 아오이."

안젤라에게 한 것과는 아주 다른, 마음이 담긴 키스를 해 준다.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셋이서 바에 갔다.

안젤라가 그러고 싶어 했다. 나와 마빈은 좀처럼 그런 일이 없다.

"아니, 여긴 상아탑인 모양이지?"

눈썹을 치켜올리고 안젤라가 그렇게 말했다.

 

 

그 다음 주에는 내내 비가 내렸다.

창문 너머로 비에 젖은 거리를 바라본다.

"손님이 없을 때는 책을 읽어도 좋아요."

요즘도 하루에 한 번은 가게에 얼굴을 내미는 파올라가 말했다.

비는 끝없이 내리고 있다. 빗발이 세찬 것은 아니지만,

공기에 섞여 내리면서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은 비,

마치 온 세계를 우리에 가두어 넣으려는 듯 한 비다.

비는 나를 침묵하게 한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만 떠오르게 한다.

오전 중에는 단골 손님이 한 명 들렀을 뿐,

손님다운 손님은 오지 않았다.

"꽤 싸늘하네."

파올라가 말한다.

비 내리는 날에는 공방의 냄새가 평소보다 한층 짙게 느껴진다.

무슨 약품 냄새 같은, 막 하얗게 칠한 벽 같은,

싸늘하고 시원한 냄새.

"이렇게 날씨가 나쁘면 기분이 우울해서. 지나도 영 저기압이야."

창밖으로 여인이 개를 데리고 지나간다. 개는 비옷을 입고 있었다.

일흔 살이 넘은 지나는 좀처럼 가게에 나오는 일이 없다.

"잘 계세요? 한참이나 뵙지 못했는데."

내가 묻자, 파올라는 웃었다.

"잘 있다마다, 매주 하루는 미장원에 갈 정도야."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마빈의 훌륭한 점 한가지, 절대로 약속시간에 늦지 않는다는 것.

오늘도 가게 문을 닫는 7시에

정확하게 가게 앞에다 재규어를 세웠다.

갑작스런 약속이었는데도.

가게로 들어온 마빈은, 비와 신선한 바깥 내음,

"안 늦었나."

미소 띤 목소리로 말한다. 온화하고 명석한 마빈의 말투.

데리러 와 달라고, 낮에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오게 해서."

조수석에 앉자, 나는 겸연쩍음에 그렇게 말했다.

걸어서 10분 거리다.

"뭐가?"

마빈은 재미있다는 듯 말한다.

"그래서 내가 비를 좋아하는 건데."

마빈의 차는 키는 낮아도 널찍하다.

땅에서 가까운 느낌이 편안하다.

"우리 데조로는 비만 내리면 응석을 부리니까 말이지."

잠시 드라이브 할까? 라고 마빈이 물어,

나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비 내리는 밤의 드라이브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

우리는 고속 도로를 30분 정도 달렸다.

앞 유리창으로 흘러내려 튀는 물방울.

"누님이 걱정하겠어요."

상관없어, 라고 말하는 마빈의 목소리에 여전히 흔들림이 없어,

나는 불현듯 욕망에 사로잡힌다.

"마빈."

와 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했다.

"천만에."

얌전하게 앉아 앞을 향한 채, 나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척한다.

 

 

- 에쿠니 가오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