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현재 인터넷이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 10가지란 글은 네이버 오픈사전에 등록된 글로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최근 많은 단체에서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따라서 위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친일파청산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주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통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현재 개정중인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는 친일행적위주로 분류함에 따라 위의 1번항에 해당되며
이 기준은 과거 반민특위에서의 친일파 선정기준과 비슷한 것으로서 보여집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 폐간된 신문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과 학도병들을 다수 탈출시켜서 광복군으로 가도록 했다는 증언 (의병사상 선양회 사무총장)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47512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의 기회주의자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해방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
* 박통이 친일파라 주장하시는 분이 위의 글을 올려놓은 네이버 블로그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행각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친일청산법에 의거 친일 행적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니
박통의 친일행적이 있다면 밝히고 묻어둬선 안되며, 허위사실을 조작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라 하기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할 때 친일행적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부했던 과거 반민특위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현재 시점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의문이며, 새로운 사실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음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나오는 박 대통령이 광복군 중대장으로 입대하던 이야기입니다.
만약 위 글에서 나오는 유언비어(좌익의 조작)처럼 진실이라면 상해 임시 정부가 박통을 ..
광복군의 중대장으로 받아 주었을리가 만무 합니다.
오히려 백강 조경한 선생의 말처럼 학도병을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보내 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독립 영웅 김학규 장군의 휘하에서 광복군 중대장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합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1940 년 만주군관학교 입학 1942 년 만주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1942 년 일본육사 본과 특전 입학 1944 년 일본육사 본과 졸업
(자료 출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는 194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곧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부터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만주에 산재해 있던 공비토벌작전(共匪討伐作戰)에 참가했다.
그가 왜 군인의 길을 택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일본정부의 관료체제하에서는 자기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장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큰 삶에 도전해 보기 위해서는 군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름길이었고, 군인이 자신의 적성에도 맞았던 것이다. 만주군 소위가 된 박정희는 지지하르에서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열하성(熱河省)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만주군 보병 제 8 단에서 근무했다.
이 제 8 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을 토벌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져왔다.
그 당시 만주군 제 8 단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高印慶)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정희 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 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平泉鎭)이란 곳에 있을 때 어느 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일본과 공비(共匪)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국광복을 맞이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된 지 1년 남짓하여 8. 15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그가 속해 있던 만주군 제 8 단이 주둔하고 있던 본부는 열하성(熱河省)의 반벽산(半壁山)이다.
이곳은 북경(北京)의 동북쪽에 있는 산악지대로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북쪽 변경이다.
제 8 단의 병력은 약 3천 명으로 연대규모의 편대를 유지하면서 공산 게릴라들과 싸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농민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 8 단의 단장은 당제영(唐際榮) 상교(대령)가 맡아 있었던 것인데 사병은 전원 중국인이고, 장교도 대부분 중국인이며 일본인 20여 명, 조선인이 4명이었다. 그 4명의 조선인 장교가 신현준(申鉉俊), 이주일(李周一), 방원철(方圓哲), 박정희(朴正熙)로서 박정희는 당시 단장의 부관이었다.
그 무렵 중국 내부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장개석(將介石)이 이끄는 국민당(國民黨)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共産黨)이 천하의 명운을 걸고 사상전을 전개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는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거대한 중국대륙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일본군 제 8 단은 종전이 된 줄도 모르고 계속 산악지대를 헤매고 있었다.
1945년 8월 14일
방원철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구산즈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중위로부터 유선전화가 걸려 왔다.
"형님 수고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침공, 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제 8 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多倫)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방원철은 박정희의 전화를 받고 반벽산으로 되돌아 갈 작정이었다. 행군로는 험하여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 했다.
15일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비에 젖은 인마(人馬)는 무겁고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5년 동안에 걸친 제 2 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14년 동안에 걸친 일본의 중국침략 전쟁도 끝이 났다. 그리고 36년 동안에 걸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도 끝나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광복군 제 2 중대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만주와 북중국 및 조선반도에 이르기까지 힘의 진공상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만주에는 소련군, 일본군, 만주군, 장개석군, 모택동군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만주군 제 8 단의 조선인 장교 4명도 무장해제 당한 채 부대 안에서 손님 대접을 받으며 며칠 동안 지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위로 승진한 지 한달 만에 박정희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조선인 네 사람에게 부닥친 당장의 시급한 과제는 <고향으로의 무사 귀한>이었다.
철도가 마비되고 대중 교통수단이라고는 전무한 중국 벌판에서,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공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 이외에는 모두가 적으로 간주되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잡다한 무장집단들이
언제 어디에서 총질을 해댈지 모르기 때문에 귀환은 또 하나의 전투를 방불케 했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奉天)으로 가고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은 북경(北京)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8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맨 먼저 덕경루(德慶累)를 찾아갔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제지공장 자리로 옮겼다.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군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사람이다.
그때 임시정부에서는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여 군대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개석군, 팔로군을 포함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 청년들, 일본군, 만주군에서 근무했던 젊은 장교나 하사관들 모두 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약 400명의 청년들을 김학규(金學奎)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 3 지대에 편입시킨 것인데 이들은 제 1 대대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 1 대대장은 신현준(申鉉俊)이 맡고 그 아래 제 1 중대장은 이주일(李周一), 제 2 중대장은 박정희(朴正熙), 제 3 중대장은 학병출신의 윤영구(尹暎九)가 맡아 중대를 통솔했다.
그들은 소총, 기관총 등의 기본무장을 갖추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최대의 현안은 먹는 문제였다.
간부들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고 심지어 광복군채(光復軍債)를 발행하여 그곳 동포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미처 식량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굶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박정희 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박정희의 상관으로 광복군의 대대장을 했던 신현준에 의하면
「그 당시의 혼란상은 말로써는 다할 수 없다.
일본이 망해버리니 만주군 제 8 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질팡이고,
우리 광복군 안에도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상문제로 밤새워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갔다.
만주군관학교 1등 졸업, 일본육사 졸업이라고 하는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경력이나 나이도 그들보다는 월등히 많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호방한 성품인 데다가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어느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 동무>라고 하자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박정희가 속해 있던 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도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중국정부와 미 군정당국에 대하여 교섭을 활발히 벌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말뿐이고 특히 부대단위의 집단 입국이나 <광복군>의 명칭을 띠고는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전승국가도 패잔병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10개월 동안을 허송세월 하다가 1946년 5월 6일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천진(天眞)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박정희와 신현준은 다시 기차편으로 서울까지 올라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고향집에서는 생사를 몰라 궁금해했다.
다만 어머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경에 있으면서도 우편, 전보, 교통 등의 통신수단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박정희의 귀국에 대하여 어머니만은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 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와 하였으나 형제들로부터는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동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형 상희(相熙)까지도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것인데 제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하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사실 박정희의 귀국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검정 물감을 들인 군복에다가 낡아빠진 군화를 신고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지휘봉으로 보이는 두어 뼘 남짓한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상 지휘봉을 휘휘 돌리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는 않았다. 형들이나 누님들의 집을 들락거리며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하다가 심심하면 대구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기 일쑤였다.
친구들을 만나면 술을 퍼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 박정희가 언제 술을 마다 했을까마는 그때처럼 술이 그를 위로해 준 적은 없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그는 하나의 습관처럼 학창시절에 배웠던
한시(漢詩)를 읊어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었다.
원상한산 석경사 (遠上寒山 石徑斜)
멀리가을산 돌밭길 오르니
백운생처 유인가 (白雲生處 有人家)
흰구름 이는 곳에 사람의 집 있도다
정거좌애 풍림만 (停車坐愛 楓林晩)
수레 멈추고 마음껏 단풍을 사랑하니
상엽홍어 이월화 (霜葉紅於 二月花)
서리 맞은 잎새가 복사꽃보다 붉도다
하며 호기를 잃지 않으려고 짐짓 큰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술이 깨고 나면 다시 초라한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제일 가깝게 지낸 것은 작은 누님이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술만 마실건가! 취직할 생각을 해야지."
"구미에서 제가 무슨 취직을 하겠소.
아무래도 서울에 한번 올라가 봐야 하겠오."
"진실(귀희)언니한테 돈 얻으려 갔다면서?"
"에이, 돈 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
야! 마당에 닭도 많던데 그것 한 마리 잡아먹었으면 좋겠더라."
"서울 가는 여비는 너희 자형(한정봉)이 해 줄 테니 가 봐라."
그는 빈번히 작은 누님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 박정희가 서울로 가기 전날이다.
박재희는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오빠 상희가 신문지에 싼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것 좀 잘 간수해라"하고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동생(정희)이 나타나 선반 위를 더듬더니 신문지에 싼 것을 내렸다. 카메라인 것이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나 기차 탄 뒤에 말해요."
"그거 비싼 거니?"
"갖고 가서 급하면 팔아 쓸꺼요."
하며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 길로 서울에 올라온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 기생으로 입교했던 것이다.
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난세의 두 영웅 루즈벨트와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 천년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차이가 무엇인가?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를 세우셨으며,
주산을 사용하던 시절에 건설 비용을 정확히 산출해 내고 추진하셨다.
그런데, 발전하는 한국을 위한 물류 유통의 중요성을 내다보지 못하던 양김씨는
극렬하게 공사 반대 시위를 선동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차 수도가 이전할 때를 위하여 이미 치밀한 설계 도면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중국과 교역할 시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서해안에 해상 물류 유통 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실로, 그의 경제 전략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았기에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통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워낙 시장 경제가 튼튼하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한번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경제기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정책 여하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양김씨의 합작품인 IMF 사태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경제 주권 상실은 정치적 주권마저 위협하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안정된 경제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게 아직 진행 중이었던 경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 재출마의 기회를 부여하였던 유신 헌법 때문에 그가 독재자였던가?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오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정말 좋은 시절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청년기에 미국은 부강한 나라,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릴 적 미국은 몹시도 가난한 나라였다.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의 대공황 때 실업율이 아주 높았으며, 생필품은 커녕 식량 구하기 어려운 가정들도 많았다. 마비된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으며, 거리에 넘쳐나는 어깨쳐진 실업자들이 매일 구직의 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도 이때가 경제 문제가 미국의 존속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경기가 나쁘고 소득이 줄 수록,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소비가 줄 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역대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미국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어서 정부마저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이때 등장한 미국 경제 재건의 영웅이 바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은 절뚝발이이면서 미국의 절뚝발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장래가 유망한 소년으로서 갓 청년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던 루즈벨트는 한때 몹시 절망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다시 걷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또 도전하고 도전하였던 그였기에 그의 연설에는 남달리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의 대경제 공황 앞에서 절망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는 연설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정신을 조성했다.
여기서 1960년대에 우리 민족도 잘 살수 있다는 믿음과 꿈을 심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때는 미국에서 경제 이론이 헤매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황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더욱 더 공황의 늪에 빠기게 함에 따라 정부가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영국의 자유 시장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불황의 늪 앞에서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해 노동 시장을 창출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라고 미국병을 고치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도자 스타일이 있었다.
박정희와 양김씨가 다르릇 루즈벨트는 다른 대통령들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실론 인내와 끈기는 한국인의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런 한국적인 미덕이 루즈벨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구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늘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그는 다시 걷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으나 자신의 장애와 싸우는 사이 그는 남달리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용감하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하라. 만약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하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항상 여유 있게 웃고 있던 대통령 루즈벨트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루즈벨트는 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불굴의 투지로 꿈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좌익들과 그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가 문경국민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몰매맞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튿날 자취를 감춘 박정희는 여러해 후에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다시 그 일본인 폭행 교사들 앞에 일본검을 들고 나타나 그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행에 그가 항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일본군 포병대 장교였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포병대 장교가 되었다는 말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 습득을 의미한다.
포병 장교가 되려면 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받는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포의 발사는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수학적 계산에서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대포는 절대로 명중하지 않는다.
화학을 모르고 폭탄을 다를 수 없으며, 대포는 물리학 원리를 응용한 현대 무기이다.
즉, 한 사람의 포병 장교에게는 적어도 기초 과학에 관한한 탄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인문계 대학에만 진학하게 하고 과학 두뇌의 등장을 제한하였던 시대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3년간의 미소 신탁통치 없이 한국의 미래를 한국인의 손에 내버려두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해산시키고 총독부를 접수하기 어려웠겠지만 그것도 가능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중공군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내전에 중국 공산당 군대나 러시아 군대가 불참하였다고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상해 임정을 제외하면 전혀 민주주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상해 임정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
정권을 잡은 박헌영의 남로당은 죽창 들고 지주들과 부자들을 찔러 죽였을 것이다.
그들이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했던 것은 해방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하에서 5년간 못했던 것을 한 것이다.
땅 기진 사람과 재산 있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그들의 경제 이론이다.
그렇게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면 빈부의 차별이 없어지니 국민 경제가 향상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농산물 생산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 산업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이 철수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었다.
바로, 그 점이 2차 대전 후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무런 과학 지식이 없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국민 GNP가 75불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면 미국의 무상 원조마저 없는 박헌영 치하에서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존속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박헌영의 공산당 일파가 부자들과 지주들을 모두 죽이고 경제 시스템을 망가뜨린 다음에는 아무런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나라는 다시 외국에 빚을 지게 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해방 정국의 정권을 절대로 박헌영의 남로당에 넘겨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을 써 준 분이 맥아더 원수였다. 군정 기간 동안 한국의 잘래를 위하여 이승만 정권 탄생을 후원한 맥아더 원수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옳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문계와 이공계의 두뇌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학 박사였으나 농업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한국이 식량 자급자족도 못하는 빈농국에서 30년만에 산업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 두뇌가 있었다.
앞은 내다보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과학연구소(KIST)를 설립한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중화학공업단지 등 새로운 첨단산업 단지들이 건설될 때마다 미국에 기술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여 그들로부터 신속하게 기술 이전을 해오신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을 현장 실무자보다 더 잘 파악하고 계셨던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코 한 나라의 경제는 자연발생적으로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산업 개발을 차관을 빌리기가 무척 어려운 이유는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농업국을 산업국으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경제 전략 그리고 반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행하시는 투지가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디일 정책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처럼 독재성이 있는 정책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그러기에 일국의 경제 발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런 논리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도 한국의 박정희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적 경제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4년씩 두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통령 임기를 헌법을 개정하여 연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루즈벨트와 박정희 두 대통령은 공통적이다.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모두 열등감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었다.
흔히 박정희의 키가 작은 열등감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청년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실학과 일본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루즈벨트와 더불어 실로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가운데 연마되는 정신력과 닦아지는 지도력--이것은 실로 한국의 신세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지도력이다.
요즘 청년 좌익들처럼 선동적인 기질만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도력을 그들은 난세에 키우며 꽃피웠던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던 1979년 10.26 사태의 비극은 부마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잘못된 관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은 곱게 보지 않았으며, 부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일본의 편파적인 방송이라는 사실을 김재규는 모르고 있었다. 끝.
●박정희와 비교하려 하지마라. 지금 으로부터 25년전의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화 세력들에게 되묻고 싶다.
박정희는 조선시대와 이승만 정부로부터 전쟁의 페허와 보릿고개의 가난을 물려받았지만 과거를 원망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때 그당시 정부나 언론, 국민들이나 기업이나 한국이란 국가는 한가하게 과거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으며 너도나도 잘살아야 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일하며 선진한국을 향해서 미래로 나아 가는것 밖에 몰랐었다.
그리하여 6.25전쟁의 페허와 보릿고개의 한국을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했다는 대한한국을 오늘날 이렇게 경제10위권의 나라로 만들어 놓을수가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를 그토록 비판만을 해왔던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한지도 벌써 14년째를 맞고 있다. 김영삼5년,김대중5년,노무현4년 합 14년이다. 민주화를 한다며 집권한 민주세력은 14년동안 무엇을 했나. 박정희의 18년의 업적은 말로 다할수가 없을 정도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8년과 민주화세력이 집권했던 14년동안 기간을 놓고 업적을 비교할때에 18년업적과 민주화 14년의 업적을 한번 냉철하게 비교해 봐야 될것이다.
지금 지난 정권을 비판하자면, 25년전 박정희시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했던 14년동안의 경제정책 실패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평가를 해야 될때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가난을 물려주었던 옛조상들을 원망하고 한탄하며 비판 할 만큼 한가 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14년동안의 민주화세력의 집권 결산이 무엇인가. 잘한것은 찾아볼수도 없고 못한정책만 수두룩하다.
나라빚이 IMF보다도 3배나 되고 경제는 완전 하락세다. 교육 정책,양극화 해소정책,서민 복지정책, 행정수도 이전정책, 사대악법 강행 통과, 한미 동맹 균열, 퍼주기식 대북 정책, 실패한 부동산 정책, 각종 세금폭탄 정책, 서민경제 파탄 정책, 친북좌경세력 동조, 북한 핵개발,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책, 과거사정리정책,국보법개정,경제정책,민생대안정책,외교정책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원하게 풀어 나간적이 있는가.
또한 전작권은 전문가들에 의해 평시,전시로 나누워 한미연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체결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전작권을 환수라는 용어로 주권 침해 운운 하면서 국민들을 혼란속으로 빠트리는 국가안보 정책도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잘한것보다 마무리를 못한 정책이 많은 관계로 국민의 신뢰도가 최하위를 달리고 있는 것을 노정권은 남의 탓으로만 돌릴건가. 박정희 시절에는 이런 정책을 실패한적이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지도자의 자질이 문제가 되는건 아닐까. 흔히들 박정희대통령을 냉혹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건 냉혹한 독재라라는 표현를 하기위해 정적들이 지어낸 핑계일 뿐이며 또한 그렇게 한가하게 웃을수만 없
박정희 대통령 알 몸으로 한번 벗겨보자
먼저 현재 인터넷이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 10가지란 글은 네이버 오픈사전에 등록된 글로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최근 많은 단체에서 박통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입니다......
따라서 위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친일파청산에 반대하는 분들의 대표적 주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통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현재 개정중인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는 친일행적위주로 분류함에 따라 위의 1번항에 해당되며
이 기준은 과거 반민특위에서의 친일파 선정기준과 비슷한 것으로서 보여집니다.
먼저 인터넷상에 떠도는 박통의 친일행적10가지란 글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는 현재 전혀 없으며, 만약 있었다면 박정희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렸을 것이나
현재까지 “~~카더라.” 라는 글만 있을 뿐입니다...
혈서론의 출처가 만주일보라고 하는 데. 만주일보는 1927년에서 1934년 폐간된 신문 입니다.
즉 1934년에 폐간되었으나 박통이 입학한 때는 1942년입니다.
만주일보가 보관되어 있는 서울대의 소장목록입니다.. 찾아보시길...
(http://147.46.181.112/lib_service/separate/paper_list.html#마)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
③ 완전한 일본인
- 위의 글들은 주관성이 개입된 글들로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예들 들면 지난cbs 방송에서 박통의 제자들이 증언한 박통이 선생으로 있을 당시
민족교육과 학도병들을 다수 탈출시켜서 광복군으로 가도록 했다는 증언 (의병사상 선양회 사무총장) 등이 그것입니다.)
또한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평가는 오직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위의 글에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만주에 독립군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통은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요즈음의 이름은 承德)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통이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 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습니다..
* 아래 네이버 백과사전를 검색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opendic.naver.com/100/entry.php?entry_id=47512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의 기회주의자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생략 ............. 해방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
* 박통이 친일파라 주장하시는 분이 위의 글을 올려놓은 네이버 블로그가 있으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단원 앞부분에 있는 글이니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듯...)
http://blog.naver.com/cxicxi.do?Redirect=Log&logNo=20004036923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
(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 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 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 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⑥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 글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또한 공산주의를 배신한 것이 왜 기회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그러면 공산주의자로서 그냥 남아 있어야 했다는 뜻인지?
솔직히 공산주의 배신한 것 잘한 것 아닌가요?
이것도 역시 그의 형 박상희와 관련해서 자신도 모르게 공산당원으로 등재되었던 것입니다.
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통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통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창씨개명자체로는 친일파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오히려 高木 (일본명 다까끼) 는 자신의 본관 고령 朴씨를 지키려고 한 것이며,
글을 첨삭하는 제 자신의 증조부도 하빈의 성을 지키려고 河木 이란 창씨 개명을 하였습니다.
⑧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이글 역시 ② ③번과 같습니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1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지금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외교석상에 욕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통이 3억달러 받았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대만.필리핀.태국.중국도 아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독도는 과거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대통령입니다.)
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이 친일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도 친일파입니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통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통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http://www.kla815.or.kr/)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에서 박통은 신친일파로 분류 돼있습니다.
(http://bluecabin.com.ne.kr/index.html)
내용)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이곳에서도 독립군 토벌에 대해서는 언급은 없음 )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http://www.e-hanil.net/)
- 민족문제연구소 : 박통을 친일파로 주장 최근 박통친일행적에 대한 만화를 편찬할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박통의 친일논쟁을 유발 시킨 곳으로 어떤 의미의 친일을 주장하는지는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http://www.banmin.or.kr/)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통의 친일행각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친일청산법에 의거 친일 행적 조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니
박통의 친일행적이 있다면 밝히고 묻어둬선 안되며, 허위사실을 조작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친일청산법에 의한 친일파라 하기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판단할 때 친일행적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부했던 과거 반민특위에서도 포함되지 않았다면
현재 시점에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지 의문이며, 새로운 사실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음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나오는 박 대통령이 광복군 중대장으로 입대하던 이야기입니다.
만약 위 글에서 나오는 유언비어(좌익의 조작)처럼 진실이라면 상해 임시 정부가 박통을 ..
광복군의 중대장으로 받아 주었을리가 만무 합니다.
오히려 백강 조경한 선생의 말처럼 학도병을 탈출시켜 광복군으로 보내 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독립 영웅 김학규 장군의 휘하에서 광복군 중대장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합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1940 년 만주군관학교 입학
1942 년 만주군관학교 예과 수석 졸업
1942 년 일본육사 본과 특전 입학
1944 년 일본육사 본과 졸업
(자료 출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는 194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곧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있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부터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만주에 산재해 있던 공비토벌작전(共匪討伐作戰)에 참가했다.
그가 왜 군인의 길을 택했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일본정부의 관료체제하에서는 자기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런 장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큰 삶에 도전해 보기 위해서는 군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름길이었고, 군인이 자신의 적성에도 맞았던 것이다. 만주군 소위가 된 박정희는 지지하르에서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열하성(熱河省)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만주군 보병 제 8 단에서 근무했다.
이 제 8 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을 토벌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져왔다.
그 당시 만주군 제 8 단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중국인 친구 고인경(高印慶)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박정희 소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뚝뚝한 것 같았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우리가 평천진(平泉鎭)이란 곳에 있을 때 어느 날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분! 일본과 공비(共匪)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다.
언젠가 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국광복을 맞이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된 지 1년 남짓하여 8. 15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그가 속해 있던 만주군 제 8 단이 주둔하고 있던 본부는 열하성(熱河省)의 반벽산(半壁山)이다.
이곳은 북경(北京)의 동북쪽에 있는 산악지대로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북쪽 변경이다.
제 8 단의 병력은 약 3천 명으로 연대규모의 편대를 유지하면서 공산 게릴라들과 싸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중국인 사병과 현지 중국농민들의 인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 8 단의 단장은 당제영(唐際榮) 상교(대령)가 맡아 있었던 것인데 사병은 전원 중국인이고, 장교도 대부분 중국인이며 일본인 20여 명, 조선인이 4명이었다. 그 4명의 조선인 장교가 신현준(申鉉俊), 이주일(李周一), 방원철(方圓哲), 박정희(朴正熙)로서 박정희는 당시 단장의 부관이었다.
그 무렵 중국 내부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장개석(將介石)이 이끄는 국민당(國民黨)과 모택동(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共産黨)이 천하의 명운을 걸고 사상전을 전개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이라고 하는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대처하는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거대한 중국대륙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일본군 제 8 단은 종전이 된 줄도 모르고 계속 산악지대를 헤매고 있었다.
1945년 8월 14일
방원철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구산즈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 중위로부터 유선전화가 걸려 왔다.
"형님 수고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침공, 전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제 8 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多倫)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훈련은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방원철은 박정희의 전화를 받고 반벽산으로 되돌아 갈 작정이었다.
행군로는 험하여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야 했다.
15일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비에 젖은 인마(人馬)는 무겁고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5년 동안에 걸친 제 2 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14년 동안에 걸친 일본의 중국침략 전쟁도 끝이 났다. 그리고 36년 동안에 걸친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도 끝나 조국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광복군 제 2 중대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만주와 북중국 및 조선반도에 이르기까지 힘의 진공상태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만주에는 소련군, 일본군, 만주군, 장개석군, 모택동군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만주군 제 8 단의 조선인 장교 4명도 무장해제 당한 채 부대 안에서 손님 대접을 받으며 며칠 동안 지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묘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위로 승진한 지 한달 만에 박정희는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조선인 네 사람에게 부닥친 당장의 시급한 과제는 <고향으로의 무사 귀한>이었다.
철도가 마비되고 대중 교통수단이라고는 전무한 중국 벌판에서, 그리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공권력이 없는 상황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 이외에는 모두가 적으로 간주되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잡다한 무장집단들이
언제 어디에서 총질을 해댈지 모르기 때문에 귀환은 또 하나의 전투를 방불케 했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奉天)으로 가고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은 북경(北京)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8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맨 먼저 덕경루(德慶累)를 찾아갔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이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제지공장 자리로 옮겼다.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이곳을 숙영지로 마련한 것이다.
그는 중국 공군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던 사람이다.
그때 임시정부에서는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여 군대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개석군, 팔로군을 포함하여 학병으로 끌려갔던 젊은 청년들, 일본군, 만주군에서 근무했던 젊은 장교나 하사관들 모두 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고국에 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약 400명의 청년들을 김학규(金學奎)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 3 지대에 편입시킨 것인데 이들은 제 1 대대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제 1 대대장은 신현준(申鉉俊)이 맡고 그 아래 제 1 중대장은 이주일(李周一), 제 2 중대장은 박정희(朴正熙), 제 3 중대장은 학병출신의 윤영구(尹暎九)가 맡아 중대를 통솔했다.
그들은 소총, 기관총 등의 기본무장을 갖추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최대의 현안은 먹는 문제였다.
간부들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고 심지어 광복군채(光復軍債)를 발행하여 그곳 동포들에게 팔기도 하였다. 미처 식량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굶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박정희 중대장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박정희의 상관으로 광복군의 대대장을 했던 신현준에 의하면
「그 당시의 혼란상은 말로써는 다할 수 없다.
일본이 망해버리니 만주군 제 8 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질팡이고,
우리 광복군 안에도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상문제로 밤새워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부대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갔다.
만주군관학교 1등 졸업, 일본육사 졸업이라고 하는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경력이나 나이도 그들보다는 월등히 많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두주불사(斗酒不辭)하는 호방한 성품인 데다가 사사로운 욕심을 갖지 않았다. 여운형(呂運亨)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했으며, 어느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 동무>라고 하자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고향에 돌아와서
박정희가 속해 있던 광복군 제3지대 대원들도 하루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중국정부와 미 군정당국에 대하여 교섭을 활발히 벌였으나 지금 당장은 어렵다는 말뿐이고 특히 부대단위의 집단 입국이나 <광복군>의 명칭을 띠고는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전승국가도 패잔병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10개월 동안을 허송세월 하다가 1946년 5월 6일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천진(天眞)을 떠나 5월 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박정희와 신현준은 다시 기차편으로 서울까지 올라와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고향집에서는 생사를 몰라 궁금해했다.
다만 어머니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경에 있으면서도 우편, 전보, 교통 등의 통신수단이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다. 박정희의 귀국에 대하여 어머니만은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 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와 하였으나 형제들로부터는 크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동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형 상희(相熙)까지도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것인데 제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하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사실 박정희의 귀국은 너무나 초라한 것이었다. 검정 물감을 들인 군복에다가 낡아빠진 군화를 신고 땡전 한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지휘봉으로 보이는 두어 뼘 남짓한 조그마한 막대기 하나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상 지휘봉을 휘휘 돌리며 잠시도 집에 붙어 있지는 않았다. 형들이나 누님들의 집을 들락거리며 아무 데서나 먹고 자고 하다가 심심하면 대구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기 일쑤였다.
친구들을 만나면 술을 퍼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었다. 박정희가 언제 술을 마다 했을까마는 그때처럼 술이 그를 위로해 준 적은 없다.
술기운이 거나해지면 그는 하나의 습관처럼 학창시절에 배웠던
한시(漢詩)를 읊어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는 것이었다.
원상한산 석경사 (遠上寒山 石徑斜)
멀리가을산 돌밭길 오르니
백운생처 유인가 (白雲生處 有人家)
흰구름 이는 곳에 사람의 집 있도다
정거좌애 풍림만 (停車坐愛 楓林晩)
수레 멈추고 마음껏 단풍을 사랑하니
상엽홍어 이월화 (霜葉紅於 二月花)
서리 맞은 잎새가 복사꽃보다 붉도다
하며 호기를 잃지 않으려고 짐짓 큰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술이 깨고 나면 다시 초라한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말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도 제일 가깝게 지낸 것은 작은 누님이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술만 마실건가! 취직할 생각을 해야지."
"구미에서 제가 무슨 취직을 하겠소.
아무래도 서울에 한번 올라가 봐야 하겠오."
"진실(귀희)언니한테 돈 얻으려 갔다면서?"
"에이, 돈 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
야! 마당에 닭도 많던데 그것 한 마리 잡아먹었으면 좋겠더라."
"서울 가는 여비는 너희 자형(한정봉)이 해 줄 테니 가 봐라."
그는 빈번히 작은 누님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뒤 박정희가 서울로 가기 전날이다.
박재희는 열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의 오빠 상희가 신문지에 싼 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것 좀 잘 간수해라"하고 나갔다.
다음 날 아침 동생(정희)이 나타나 선반 위를 더듬더니 신문지에 싼 것을 내렸다. 카메라인 것이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나 기차 탄 뒤에 말해요."
"그거 비싼 거니?"
"갖고 가서 급하면 팔아 쓸꺼요."
하며 휑하니 나가 버렸다. 그 길로 서울에 올라온 박정희는 육군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제 2 기생으로 입교했던 것이다.
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
독자페이지]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
최근 친일파 청산을 위한 법안 통과를 놓고 여야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당연하고 감개무량한 일이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당시 자료와 증언자들이 미비한데다 그나마 상당 부분이 일제에 의해 조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례로 고 박정희 대통령이 과연 친일파인가 하는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또 한 예로 일제때 우리 민족이 많이 부른 노래 중 ‘학도가’가 있다. 표면적으로 학구열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의 교화를 위해 만든 노래이다.
이 노래를 90년대 초 KBS에서 틀었다가 한 재일교포로부터 엄중한 항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은 시대적 요청이나, 옥석을 잘 가려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
2004.07.23 (금) 17:00
★★★ 한편 조경한은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출생으로 본명은 종현(鍾鉉). 1927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을 수학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백강과 경한이란 호와 이름을 받았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 한독당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김일성의 배신학교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화당시절 박정희의 천거로 승주지역 국회의원을 지냈다.
난세의 두 영웅 루즈벨트와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 천년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차이가 무엇인가?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를 세우셨으며,
주산을 사용하던 시절에 건설 비용을 정확히 산출해 내고 추진하셨다.
그런데, 발전하는 한국을 위한 물류 유통의 중요성을 내다보지 못하던 양김씨는
극렬하게 공사 반대 시위를 선동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차 수도가 이전할 때를 위하여 이미 치밀한 설계 도면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중국과 교역할 시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서해안에 해상 물류 유통 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실로, 그의 경제 전략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았기에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통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워낙 시장 경제가 튼튼하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한번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경제기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정책 여하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양김씨의 합작품인 IMF 사태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경제 주권 상실은 정치적 주권마저 위협하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안정된 경제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게 아직 진행 중이었던 경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 재출마의 기회를 부여하였던 유신 헌법 때문에 그가 독재자였던가?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오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정말 좋은 시절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청년기에 미국은 부강한 나라,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릴 적 미국은 몹시도 가난한 나라였다.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의 대공황 때 실업율이 아주 높았으며, 생필품은 커녕 식량 구하기 어려운 가정들도 많았다. 마비된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으며, 거리에 넘쳐나는 어깨쳐진 실업자들이 매일 구직의 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도 이때가 경제 문제가 미국의 존속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경기가 나쁘고 소득이 줄 수록,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소비가 줄 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역대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미국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어서 정부마저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이때 등장한 미국 경제 재건의 영웅이 바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은 절뚝발이이면서 미국의 절뚝발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장래가 유망한 소년으로서 갓 청년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던 루즈벨트는 한때 몹시 절망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다시 걷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또 도전하고 도전하였던 그였기에 그의 연설에는 남달리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의 대경제 공황 앞에서 절망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는 연설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정신을 조성했다.
여기서 1960년대에 우리 민족도 잘 살수 있다는 믿음과 꿈을 심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때는 미국에서 경제 이론이 헤매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황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더욱 더 공황의 늪에 빠기게 함에 따라 정부가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영국의 자유 시장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불황의 늪 앞에서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해 노동 시장을 창출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라고 미국병을 고치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도자 스타일이 있었다.
박정희와 양김씨가 다르릇 루즈벨트는 다른 대통령들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실론 인내와 끈기는 한국인의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런 한국적인 미덕이 루즈벨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구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늘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그는 다시 걷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으나 자신의 장애와 싸우는 사이 그는 남달리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용감하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하라. 만약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하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항상 여유 있게 웃고 있던 대통령 루즈벨트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루즈벨트는 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불굴의 투지로 꿈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좌익들과 그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가 문경국민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몰매맞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튿날 자취를 감춘 박정희는 여러해 후에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다시 그 일본인 폭행 교사들 앞에 일본검을 들고 나타나 그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행에 그가 항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일본군 포병대 장교였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포병대 장교가 되었다는 말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 습득을 의미한다.
포병 장교가 되려면 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받는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포의 발사는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수학적 계산에서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대포는 절대로 명중하지 않는다.
화학을 모르고 폭탄을 다를 수 없으며, 대포는 물리학 원리를 응용한 현대 무기이다.
즉, 한 사람의 포병 장교에게는 적어도 기초 과학에 관한한 탄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인문계 대학에만 진학하게 하고 과학 두뇌의 등장을 제한하였던 시대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3년간의 미소 신탁통치 없이 한국의 미래를 한국인의 손에 내버려두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해산시키고 총독부를 접수하기 어려웠겠지만 그것도 가능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중공군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내전에 중국 공산당 군대나 러시아 군대가 불참하였다고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상해 임정을 제외하면 전혀 민주주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상해 임정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
정권을 잡은 박헌영의 남로당은 죽창 들고 지주들과 부자들을 찔러 죽였을 것이다.
그들이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했던 것은 해방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하에서 5년간 못했던 것을 한 것이다.
땅 기진 사람과 재산 있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그들의 경제 이론이다.
그렇게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면 빈부의 차별이 없어지니 국민 경제가 향상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농산물 생산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 산업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이 철수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었다.
바로, 그 점이 2차 대전 후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무런 과학 지식이 없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국민 GNP가 75불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면 미국의 무상 원조마저 없는 박헌영 치하에서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존속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박헌영의 공산당 일파가 부자들과 지주들을 모두 죽이고 경제 시스템을 망가뜨린 다음에는 아무런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나라는 다시 외국에 빚을 지게 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해방 정국의 정권을 절대로 박헌영의 남로당에 넘겨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을 써 준 분이 맥아더 원수였다. 군정 기간 동안 한국의 잘래를 위하여 이승만 정권 탄생을 후원한 맥아더 원수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옳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문계와 이공계의 두뇌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학 박사였으나 농업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한국이 식량 자급자족도 못하는 빈농국에서 30년만에 산업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 두뇌가 있었다.
앞은 내다보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과학연구소(KIST)를 설립한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중화학공업단지 등 새로운 첨단산업 단지들이 건설될 때마다 미국에 기술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여 그들로부터 신속하게 기술 이전을 해오신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을 현장 실무자보다 더 잘 파악하고 계셨던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코 한 나라의 경제는 자연발생적으로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산업 개발을 차관을 빌리기가 무척 어려운 이유는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농업국을 산업국으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경제 전략 그리고 반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행하시는 투지가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디일 정책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처럼 독재성이 있는 정책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그러기에 일국의 경제 발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런 논리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도 한국의 박정희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적 경제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4년씩 두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통령 임기를 헌법을 개정하여 연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루즈벨트와 박정희 두 대통령은 공통적이다.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모두 열등감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었다.
흔히 박정희의 키가 작은 열등감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청년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실학과 일본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루즈벨트와 더불어 실로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가운데 연마되는 정신력과 닦아지는 지도력--이것은 실로 한국의 신세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지도력이다.
요즘 청년 좌익들처럼 선동적인 기질만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도력을 그들은 난세에 키우며 꽃피웠던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던 1979년 10.26 사태의 비극은 부마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잘못된 관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은 곱게 보지 않았으며, 부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일본의 편파적인 방송이라는 사실을 김재규는 모르고 있었다. 끝.
●박정희와 비교하려 하지마라.●박정희와 비교하려 하지마라. 지금 으로부터 25년전의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현실의 민주화 세력.. [대박사랑]
●박정희와 비교하려 하지마라. 지금 으로부터 25년전의 박정희 시대를 비판하고있는 현실의 민주화 세력들에게 되묻고 싶다.
박정희는 조선시대와 이승만 정부로부터 전쟁의 페허와
보릿고개의 가난을 물려받았지만 과거를 원망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때 그당시 정부나 언론, 국민들이나 기업이나
한국이란 국가는 한가하게 과거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으며
너도나도 잘살아야 한다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일하며
선진한국을 향해서 미래로 나아 가는것 밖에 몰랐었다.
그리하여 6.25전쟁의 페허와 보릿고개의 한국을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했다는 대한한국을 오늘날 이렇게 경제10위권의
나라로 만들어 놓을수가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를 그토록 비판만을 해왔던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한지도 벌써 14년째를 맞고 있다.
김영삼5년,김대중5년,노무현4년 합 14년이다. 민주화를 한다며 집권한 민주세력은 14년동안 무엇을 했나.
박정희의 18년의 업적은 말로 다할수가 없을 정도다. 박정희가 집권했던 18년과 민주화세력이 집권했던 14년동안
기간을 놓고 업적을 비교할때에 18년업적과 민주화 14년의
업적을 한번 냉철하게 비교해 봐야 될것이다.
지금 지난 정권을 비판하자면, 25년전 박정희시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민주화 세력들이 집권했던 14년동안의 경제정책
실패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평가를 해야 될때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가난을 물려주었던 옛조상들을 원망하고 한탄하며
비판 할 만큼 한가 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14년동안의 민주화세력의 집권 결산이 무엇인가.
잘한것은 찾아볼수도 없고 못한정책만 수두룩하다.
나라빚이 IMF보다도 3배나 되고 경제는 완전 하락세다.
교육 정책,양극화 해소정책,서민 복지정책, 행정수도 이전정책,
사대악법 강행 통과, 한미 동맹 균열, 퍼주기식 대북 정책,
실패한 부동산 정책, 각종 세금폭탄 정책, 서민경제 파탄 정책,
친북좌경세력 동조, 북한 핵개발,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책,
과거사정리정책,국보법개정,경제정책,민생대안정책,외교정책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원하게 풀어 나간적이 있는가.
또한 전작권은 전문가들에 의해 평시,전시로 나누워 한미연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체결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전작권을 환수라는 용어로 주권 침해 운운 하면서 국민들을
혼란속으로 빠트리는 국가안보 정책도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잘한것보다 마무리를 못한 정책이 많은 관계로 국민의 신뢰도가
최하위를 달리고 있는 것을 노정권은 남의 탓으로만 돌릴건가. 박정희 시절에는 이런 정책을 실패한적이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지도자의 자질이 문제가 되는건 아닐까. 흔히들 박정희대통령을 냉혹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건 냉혹한 독재라라는 표현를 하기위해 정적들이 지어낸
핑계일 뿐이며 또한 그렇게 한가하게 웃을수만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