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경제계를 휩쓸다시피 강타했던 화두가 있다. 이른바 "블루오션" 전략이란 용어이다. "블루오션"이란, 기존에 구축된, 경쟁을 통해 생존과 도태가 결정되는 시장(치열한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되는 마켓이기에 이를 일컬어 "레드오션"이라 한다)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을 말하는 개념이다.
아마도 '틈새시장'이라 불리는 경제용어도 "블루오션"의 범주에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개척하지도, 꿈꾸지도 못한 시장을 선점하여 일체의 경쟁과 '피튀기는' 시장 쟁탈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고무하는 일종의 '노마드'적 기마전법. 이 마켓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치고 받고 상처입히고 무너뜨리는 전투의 끔찍함과 그것을 북돋우는 선동의 압박이 없다는 점.
"블루오션"전략은 이미 경제학에만 국한되는 개념을 뛰어넘어, 사회, 문화, 정치적인 스펙트럼으로까지 확장되어 적용되고 있다. 얼마전엔 모 정당의 의장이 이 용어를 원탁회의에서 꺼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상생의 정치"를 운위하기 위해서.
물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 개념은 잠정적, 가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구시대적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항구적인] 적대감의 청산, "평화"의 정착을 위한 갈망이란 아주 특별한 역사적 해결과제임에 틀림없다. 수 천년 동안, 외세의 압제와 내적 분쟁의 역사적 경험에 길들여져 온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 가운데, 항구'여일'한 "평화"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민족 안에 내재한 '집단 무의식'의 코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블루오션"의 의미는 각별하고도 의미심장하다. 남북의 분단뿐만 아니라,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갈등과 분열에 오랜동안 노출되어 있는 우리 삶의 깊은 주름과 생채기를 절실하게 감안한다면, "BLUE OCEAN"이란 용어에 눈화살이 꽂히는 현상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웰컴 투 동막골".
이 두 시간여를 흐르는 시네마토그라프의 제목에서, "BLUE OCEAN"의 냄새가 진동함을 직감한다. 일체의 소모적 경쟁과 아귀다툼이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 화해와 일치, 양보와 희생의 미덕이 강물처럼 굽이쳐 흐르는 곳. 옛 맹자의 중국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적인 상생의 공간. 그곳으로의 초대. "동막골"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선점해야 만 할 "BLUE OCEAN"임에 틀림없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아비규환의 한 정점에 처한 인간군상들에게 남아있는 선택의 답지는 오직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일 뿐이다. "적 아니면 동지"라는 극심한 편가르기 속에서 증오와 보복이라는 피의 악순환을 감내하도록 강요받는 현실,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괴이한 상황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살기 위해선 죽여야 한다.
극단적 이기주의라는 명분과 미덕 외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협소한 공간, 왜곡되고 휘어진 부정의 리만공간. 전쟁은 이 모순덩어리 큐브 속에 모든 인간들을 가둬놓고 그 상황을 긍정하도록 다그친다. 그리고 가장 많은 피를 묻힌 편에 승자의 월계관을 씌워준다. This game is so easy to play.
그러나 이차원적 방정식이 아닌 고차원의 함수관계에 입각한 낯설고 복잡한 게임이 새롭게 펼쳐지는 공간. 그 "동막골"이란 공간에 남과 북의 이탈 병력들이, 그리고 불시착한 연합군 소위가 흘러들어오면서 이들이 갇힌 새장 속의 시간과 정서는 자유와 해방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동막골 안의 논리와 삶의 명분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리고 '명쾌하다'. 너무도 단순하기에 이분법에 물든 남과 북 그리고 연합군 군상들의 시야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태평"여일"한 동막골 사람들의 모습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단순한 삶의 양식 속에서 이들은 이차원적 방정식이 아닌 고차원의 함수관계를 새로운 셈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함수관계를 통과하면서, 이들은 결국 '화해'와 '평화'라는 해[solution]에 도달하게 된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영화의 초입부에서부터 등장하는 상징물이 있다. 그건 바로 '나비'들이다. 박광현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펼쳐지는 자연친화적이며 문명비판적인 그의 철학적 세계관에 매료된 바 있으며, 그의 애니메이션들 가운데 자주 중용되는 '나비'의 이미지에서 '동막골'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끌어왔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나비'들은 영화 전편에서 종종 등장하며, 어떤 '코드'를 암시한다.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은유적 표현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비'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장치인 듯 보인다.
극중 여 주인공인 "여일"이 등장하는 공간에서 함께 독특한 분위기의 "장면화"(scene)를 이루고 있다. 고즈넉함, 안정감, 친화력, 자유로움, 평온함, 신비적인, 상상적인 - 이러한 캐릭터들이 '나비'들의 날개짓 속에 짙게 묻어 나온다. '나비'들은 또한 '동막골'로 가는 길의 인도자이다. '나비'들은 침입하는 외부의 적들(연합군의 폭격)을 제어하는 평화의 파수군들이다.
'나비'의 캐릭터는 '여일'(강혜정 분)과 온전히 부합한다.
'여일'은 동막골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존재이다. 또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여일'(always consistent)이란 이름 자체가, 작품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키워드라 보여진다. 동막골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마지노선, 그건 바로 '여일'이다. 그녀, 바로 그녀의 '변함없이' 순진무구한 낯선 얼굴, 낯선 행동, 낯선 언어들을 통해 동막골에 엄습한 총과 칼, 폭력과 살인의 공포, 극한적 대립의 위협이 해소되기 시작한다.
'여일'을 통해 철장처럼 닫혔던, 꽁꽁 묶여있던 외부의 침입자들이 자유를 경험하고 학습하게 된다. 그녀를 통해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함께 팔을 베고 눕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로 인해 폭탄이 팝콘 폭죽놀이를 위한 축제의 재료로 바뀐다. 그녀로 인해 총과 칼이 낫으로 대체된다. 성경적으로 비유하자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종말의 때에 보게 될 위대한 환상이 그녀로 말미암아 동막골 사람들의 눈 앞에 현실화된 것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단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나비 = 선지자 = 여일
흥미로운 점 하나.
히브리어 가운데 "나비(Nabi)"란 용어가 있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선지자"(prophet)이다. 신의 뜻을 미리 앞당겨 보는 사람, 신에게 선택받아 그 뜻을 예지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그분 앞에서 늘 '여일'할 것을 선포하고 주장하는 사람. '나비'와 오버랩되는 '여일'의 캐릭터 속엔, 세상의 삿된 눈으로는 깨우칠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기운이 관류하고 있다. 그녀는 평화에 대한 이상을, '여일'(변함없는)하고 순수한 눈동자, 도무지 범상한 이차원의 언어와는 섞여들 수 없는 사차원의 언어로 소통시키려는 '선.지.자.'이다.
'선지자'는 세상의 시선과 위력 앞에 두려워하거나 무릎꿇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의로운 선지자처럼, 외부로부터의 폭력 앞에 도살장의 어린 양처럼 거룩한 희생의 피를 흘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의 피가 홍수처럼 번지고 흘러들어 남과 북 그리고 연합군들의 심장 속을 벌겋게 물들인다. 그들의 손에서 잠시 잊혀졌던 총과 무기를 다시 기억해내지만, 낫과 보습의 감촉을 체온 속에 깊숙히 품은 그들에게 "평화" 혹은 동막골이라는 "BLUE OCEAN"을 지켜내기 위한 '과거로의 회귀'는 오로지 미래를 위해 높이 치켜든 독이 든 성배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몸을 던져 지켜내야 할지. 이들에게 전선(the battle line)은 분명해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죽음.
성찰의 힘은 이데올로기를 추월한다
역대흥행 4위를 질주중인 이 영화에 대해, 많은 호평이 줄지어 이어지고 있지만, "전쟁을 너무 관념적으로 그렸다"고, 혹은 "적군을 아군보다 미화했다고", "반공의식을 희박화시킨다고", "남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듯 하다고" 따지듯 걱정하는 시선들도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고 있다. 전형적인 이차원적 방정식에 의거한 고답적이며 폐쇄적인 시선이다.
인간이 지닌 고유한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이렇게 불러보고 싶다: "성찰하는 능력" 이라고. 또한 "학습능력" 이라고. 전자는 도덕적 성격에 관련된 자질이며, 후자는 지성적 활동에 연루된 자질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나, 교훈이라는 말들을 입에 담을 수 없었을 터이다. 하나는 가슴의 언어, 다른 하나는 머리의 언어. 미안하지만 교과서에 안에 갇힌 박제되고 상투화된 개념, 문자밖에 볼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능력이며 미덕이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생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학습한 옳고 그름의 기준들을, 성찰을 통해 내면화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검증하며 평가받는 일에 겸손한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지능지수와 감성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그 사고의 방정식은 일의적이고 단편적이며 완고하다. 그의 육체적 연령과 상관없이 그는 사회적인 '유년'(항문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이며 거만하다.
그러나, 다면적으로,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자질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반성능력이 뛰어난 사람, 그로인해 다른 가치, 다른 미래를 창출하고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성숙한 사람이라 말한다. '성인'의 진정한 정의는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철학용어가 있다.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타자와의 관계, 그 서로 스며듦의 신비 속에서 확보하려는 사람을 일컬어 "타자지향적" 혹은 "상호주관적" 주체라고 한다. 공동체를 전제함이며, 치열한 각성과 성찰이 필요한 주체의 개념이다.
"BLUE OCEAN" or "RED OCEAN"?
냉전이냐 평화냐를 선택하는 기로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열하고 성숙하게 성찰하려는 어른으로서의 용기라는 미덕일 것이다. 대화도 필요하고, 때론 대결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 그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의식을 향해, 각성한 어른으로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려는 자아를 향한 "대결"의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어떤 대결도 무의미하다.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냉전의 어둔 그늘 아래서 "BLUE OCEAN"을 선점하기 위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성찰의 뼈를 깎는 자기고통의 장으로 나오도록 "웰컴 투 동막골"은 관객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 영화가 우리를 향해 던지고 싶어하는 소통의 화두는 고로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하지만, 표층의 단면 위에서 혼란을 정리해나가야 할 우리에겐 복잡계의 수많은 고차방정식의 연산과 그 해를 요구한다.
'Nabi'의 눈. 그리고 치열한 '반성능력'.
그것이 '여일'을 향해 우리의 고뇌가 수렴되어가기 위한 알파와 오메가이다. 필요충분조건이다. 고로 이 질문은 'Nabi'가 되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물어져야 할 것이다:
Is It Possible For "BLUE OCEAN" To Be?
BLUE OCEAN?
상반기 경제계를 휩쓸다시피 강타했던 화두가 있다. 이른바 "블루오션" 전략이란 용어이다. "블루오션"이란, 기존에 구축된, 경쟁을 통해 생존과 도태가 결정되는 시장(치열한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되는 마켓이기에 이를 일컬어 "레드오션"이라 한다)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을 말하는 개념이다.
아마도 '틈새시장'이라 불리는 경제용어도 "블루오션"의 범주에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개척하지도, 꿈꾸지도 못한 시장을 선점하여 일체의 경쟁과 '피튀기는' 시장 쟁탈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고무하는 일종의 '노마드'적 기마전법. 이 마켓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치고 받고 상처입히고 무너뜨리는 전투의 끔찍함과 그것을 북돋우는 선동의 압박이 없다는 점.
"블루오션"전략은 이미 경제학에만 국한되는 개념을 뛰어넘어, 사회, 문화, 정치적인 스펙트럼으로까지 확장되어 적용되고 있다. 얼마전엔 모 정당의 의장이 이 용어를 원탁회의에서 꺼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상생의 정치"를 운위하기 위해서.
물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 개념은 잠정적, 가변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구시대적 냉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 [항구적인] 적대감의 청산, "평화"의 정착을 위한 갈망이란 아주 특별한 역사적 해결과제임에 틀림없다. 수 천년 동안, 외세의 압제와 내적 분쟁의 역사적 경험에 길들여져 온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 가운데, 항구'여일'한 "평화"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민족 안에 내재한 '집단 무의식'의 코드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블루오션"의 의미는 각별하고도 의미심장하다. 남북의 분단뿐만 아니라,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갈등과 분열에 오랜동안 노출되어 있는 우리 삶의 깊은 주름과 생채기를 절실하게 감안한다면, "BLUE OCEAN"이란 용어에 눈화살이 꽂히는 현상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웰컴 투 동막골".
이 두 시간여를 흐르는 시네마토그라프의 제목에서, "BLUE OCEAN"의 냄새가 진동함을 직감한다. 일체의 소모적 경쟁과 아귀다툼이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 화해와 일치, 양보와 희생의 미덕이 강물처럼 굽이쳐 흐르는 곳. 옛 맹자의 중국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은 이상적인 상생의 공간. 그곳으로의 초대. "동막골"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선점해야 만 할 "BLUE OCEAN"임에 틀림없다.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 아비규환의 한 정점에 처한 인간군상들에게 남아있는 선택의 답지는 오직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일 뿐이다. "적 아니면 동지"라는 극심한 편가르기 속에서 증오와 보복이라는 피의 악순환을 감내하도록 강요받는 현실,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괴이한 상황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살기 위해선 죽여야 한다.
극단적 이기주의라는 명분과 미덕 외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협소한 공간, 왜곡되고 휘어진 부정의 리만공간. 전쟁은 이 모순덩어리 큐브 속에 모든 인간들을 가둬놓고 그 상황을 긍정하도록 다그친다. 그리고 가장 많은 피를 묻힌 편에 승자의 월계관을 씌워준다. This game is so easy to play.
그러나 이차원적 방정식이 아닌 고차원의 함수관계에 입각한 낯설고 복잡한 게임이 새롭게 펼쳐지는 공간. 그 "동막골"이란 공간에 남과 북의 이탈 병력들이, 그리고 불시착한 연합군 소위가 흘러들어오면서 이들이 갇힌 새장 속의 시간과 정서는 자유와 해방의 실마리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동막골 안의 논리와 삶의 명분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리고 '명쾌하다'. 너무도 단순하기에 이분법에 물든 남과 북 그리고 연합군 군상들의 시야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도 태평"여일"한 동막골 사람들의 모습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단순한 삶의 양식 속에서 이들은 이차원적 방정식이 아닌 고차원의 함수관계를 새로운 셈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함수관계를 통과하면서, 이들은 결국 '화해'와 '평화'라는 해[solution]에 도달하게 된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영화의 초입부에서부터 등장하는 상징물이 있다. 그건 바로 '나비'들이다. 박광현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펼쳐지는 자연친화적이며 문명비판적인 그의 철학적 세계관에 매료된 바 있으며, 그의 애니메이션들 가운데 자주 중용되는 '나비'의 이미지에서 '동막골'을 상징하는 모티브를 끌어왔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나비'들은 영화 전편에서 종종 등장하며, 어떤 '코드'를 암시한다.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은유적 표현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비'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장치인 듯 보인다.
극중 여 주인공인 "여일"이 등장하는 공간에서 함께 독특한 분위기의 "장면화"(scene)를 이루고 있다. 고즈넉함, 안정감, 친화력, 자유로움, 평온함, 신비적인, 상상적인 - 이러한 캐릭터들이 '나비'들의 날개짓 속에 짙게 묻어 나온다. '나비'들은 또한 '동막골'로 가는 길의 인도자이다. '나비'들은 침입하는 외부의 적들(연합군의 폭격)을 제어하는 평화의 파수군들이다.
'나비'의 캐릭터는 '여일'(강혜정 분)과 온전히 부합한다.
'여일'은 동막골에서도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존재이다. 또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여일'(always consistent)이란 이름 자체가, 작품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키워드라 보여진다. 동막골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마지노선, 그건 바로 '여일'이다. 그녀, 바로 그녀의 '변함없이' 순진무구한 낯선 얼굴, 낯선 행동, 낯선 언어들을 통해 동막골에 엄습한 총과 칼, 폭력과 살인의 공포, 극한적 대립의 위협이 해소되기 시작한다.
'여일'을 통해 철장처럼 닫혔던, 꽁꽁 묶여있던 외부의 침입자들이 자유를 경험하고 학습하게 된다. 그녀를 통해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함께 팔을 베고 눕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로 인해 폭탄이 팝콘 폭죽놀이를 위한 축제의 재료로 바뀐다. 그녀로 인해 총과 칼이 낫으로 대체된다. 성경적으로 비유하자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종말의 때에 보게 될 위대한 환상이 그녀로 말미암아 동막골 사람들의 눈 앞에 현실화된 것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단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나비 = 선지자 = 여일
흥미로운 점 하나.
히브리어 가운데 "나비(Nabi)"란 용어가 있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선지자"(prophet)이다. 신의 뜻을 미리 앞당겨 보는 사람, 신에게 선택받아 그 뜻을 예지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그분 앞에서 늘 '여일'할 것을 선포하고 주장하는 사람. '나비'와 오버랩되는 '여일'의 캐릭터 속엔, 세상의 삿된 눈으로는 깨우칠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기운이 관류하고 있다. 그녀는 평화에 대한 이상을, '여일'(변함없는)하고 순수한 눈동자, 도무지 범상한 이차원의 언어와는 섞여들 수 없는 사차원의 언어로 소통시키려는 '선.지.자.'이다.
'선지자'는 세상의 시선과 위력 앞에 두려워하거나 무릎꿇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의로운 선지자처럼, 외부로부터의 폭력 앞에 도살장의 어린 양처럼 거룩한 희생의 피를 흘리고야 마는 것이다. 그의 피가 홍수처럼 번지고 흘러들어 남과 북 그리고 연합군들의 심장 속을 벌겋게 물들인다. 그들의 손에서 잠시 잊혀졌던 총과 무기를 다시 기억해내지만, 낫과 보습의 감촉을 체온 속에 깊숙히 품은 그들에게 "평화" 혹은 동막골이라는 "BLUE OCEAN"을 지켜내기 위한 '과거로의 회귀'는 오로지 미래를 위해 높이 치켜든 독이 든 성배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무엇을 몸을 던져 지켜내야 할지. 이들에게 전선(the battle line)은 분명해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죽음.
성찰의 힘은 이데올로기를 추월한다
역대흥행 4위를 질주중인 이 영화에 대해, 많은 호평이 줄지어 이어지고 있지만, "전쟁을 너무 관념적으로 그렸다"고, 혹은 "적군을 아군보다 미화했다고", "반공의식을 희박화시킨다고", "남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듯 하다고" 따지듯 걱정하는 시선들도 여기저기서 머리를 들고 있다. 전형적인 이차원적 방정식에 의거한 고답적이며 폐쇄적인 시선이다.
인간이 지닌 고유한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이렇게 불러보고 싶다: "성찰하는 능력" 이라고. 또한 "학습능력" 이라고. 전자는 도덕적 성격에 관련된 자질이며, 후자는 지성적 활동에 연루된 자질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었다면, 우리는 역사의 발전이나, 교훈이라는 말들을 입에 담을 수 없었을 터이다. 하나는 가슴의 언어, 다른 하나는 머리의 언어. 미안하지만 교과서에 안에 갇힌 박제되고 상투화된 개념, 문자밖에 볼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능력이며 미덕이다.
어린아이와 성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생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학습한 옳고 그름의 기준들을, 성찰을 통해 내면화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검증하며 평가받는 일에 겸손한가 아닌가의 여부이다. 지능지수와 감성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그 사고의 방정식은 일의적이고 단편적이며 완고하다. 그의 육체적 연령과 상관없이 그는 사회적인 '유년'(항문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지독한 에고이스트이며 거만하다.
그러나, 다면적으로,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자질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반성능력이 뛰어난 사람, 그로인해 다른 가치, 다른 미래를 창출하고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켜, 성숙한 사람이라 말한다. '성인'의 진정한 정의는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철학용어가 있다.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타자와의 관계, 그 서로 스며듦의 신비 속에서 확보하려는 사람을 일컬어 "타자지향적" 혹은 "상호주관적" 주체라고 한다. 공동체를 전제함이며, 치열한 각성과 성찰이 필요한 주체의 개념이다.
"BLUE OCEAN" or "RED OCEAN"?
냉전이냐 평화냐를 선택하는 기로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열하고 성숙하게 성찰하려는 어른으로서의 용기라는 미덕일 것이다. 대화도 필요하고, 때론 대결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에게, 그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의식을 향해, 각성한 어른으로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보려는 자아를 향한 "대결"의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그 어떤 대결도 무의미하다.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냉전의 어둔 그늘 아래서 "BLUE OCEAN"을 선점하기 위한,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성찰의 뼈를 깎는 자기고통의 장으로 나오도록 "웰컴 투 동막골"은 관객들을 초청하고 있다. 이 영화가 우리를 향해 던지고 싶어하는 소통의 화두는 고로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하지만, 표층의 단면 위에서 혼란을 정리해나가야 할 우리에겐 복잡계의 수많은 고차방정식의 연산과 그 해를 요구한다.
'Nabi'의 눈. 그리고 치열한 '반성능력'.
그것이 '여일'을 향해 우리의 고뇌가 수렴되어가기 위한 알파와 오메가이다. 필요충분조건이다. 고로 이 질문은 'Nabi'가 되려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물어져야 할 것이다:
"Is IT Possible For "BLUE OCEAN" To Be?"
by iltroba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