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할 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의 전 작품은 베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서부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그가 22세 때 빈으로 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 예배당의 가수로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대단한 술꾼이여서 가정이 평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에서 자라난 베토벤은 서너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이론을 아버지의 가혹한 지도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베토벤은 궁정 오르간주자인 에덴을 비롯해 파이퍼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열 살 때에는 벌써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과 역량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여러 곳으로 순회연주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자신의 기술도 닦아서 더욱 천분을 나타내었다. 17세 때인 1787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나 술에 빠진 아버지가 나태한 탓으로 집안 신구들은 어린 베토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19세 때에는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가족은 더욱 어려워지고, 베토벤이 동생들을 데리고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꾸준히 연구와 작곡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792년 22세 때에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어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 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26세 때부터는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며 작곡도 인정을 받아 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닥쳐왔다. 그가 28세 때 귓병을 앓아 청각을 점차 잃게 되었다. 1800년에는《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32세 때에는 절망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베토벤은 자결을 결심하고 비인 교외인 하이리겐시타트에서《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돌리고 "나에게 신으로부터 내린 모든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된다." 고 결심한 그는 그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바이올린협주곡》(3곡, 1806), 피아노곡《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베토벤은 가족적으로나 일신상으로나 불행이 겹친데다가 빈곤과 고난과 번민 속에 살아 나왔고, 한편 이를 극복하고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다. 베토벤은 남달리 인간애가 풍부하였고 고독과 절망에서도 항시 환희와 희열로써 곤경을 극복해 갔다. 베토벤은 또한 풍부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개성, 섬세한 감정과 생활의식 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자기 사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언제나 현대적이고 역사적인 인류개혁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귓병과 빈곤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를 의식하고 전 인류적인 인생관과 사고를 음악적 창작에 결부시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의 이념은 개인적인 감각이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통하는 고민과 희열이 그것이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다고 본 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다면 선배인 하이든, 모차르트의 뒤를 이어 고전음악의 주요소인 형식을 한층 확장 완성시켰고, 연주양식의 개척과 작곡 수법이나 관현악법에 있어서도 결정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인 자주성과 개성의 확립을 꾀하였고, 진취적이고 과감한 태도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에 임했다.
베토벤 자필악보 : Sonate No. 14 in cis-Moll (op. 27-II, 1801)
베토벤 자필악보 : Sonata in E-major, op.109
본에 있는 베토벤 동상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베토벤의 묘
베토벤 (1770~1827)♪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 ~ 1827.3.26)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나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최후의 그리고 고금을 통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고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베토벤'의 음악이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의 정신문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음악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에서도 '베토벤'은 드물게 보는 역사의 창조자로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고, 위대한 업적을 우리 인류문화에 남겨준 음악가라고 하겠다. 오늘날 온 인류가 '베토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그를 '악성'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음악이 아름답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우리 인류의 공통된 철할 세계를 추구하고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곧 그의 사상의 표현이며 동시에 생활의 반영이다. 따라서 그의 전 작품은 베토벤의 전 생애를 장식한 그의 역사인 동시에 그의 인간과 사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베토벤의 생애를 불행한 일생이라고 한다. 사실 역사상 베토벤처럼 고르지 못한 환경에서 일생을 보낸 음악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가난했다거나 귀머거리가 되었다거나,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거나 하는 것으로만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생이 오직 인간의 공통된 운명과 대결하고 그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끝냈다는 심각한 정신 환경이 더욱 불행했을지 모른다.
베토벤은 서부 독일의 본에서 태어나 그가 22세 때 빈으로 가기까지 어린 시절을 여기에서 보냈다.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 예배당의 가수로 있었으나 성질이 난폭하고 대단한 술꾼이여서 가정이 평온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족환경에서 자라난 베토벤은 서너살 때부터 피아노와 작곡 이론을 아버지의 가혹한 지도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베토벤은 궁정 오르간주자인 에덴을 비롯해 파이퍼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열 살 때에는 벌써 작곡을 하기 시작하여 천재적인 재능과 역량을 일찍부터 보여주었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여러 곳으로 순회연주도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고 자신의 기술도 닦아서 더욱 천분을 나타내었다. 17세 때인 1787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놀라게 한 일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나 술에 빠진 아버지가 나태한 탓으로 집안 신구들은 어린 베토벤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19세 때에는 아버지가 실직하는 바람에 가족은 더욱 어려워지고, 베토벤이 동생들을 데리고 생활을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경에서도 그는 꾸준히 연구와 작곡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1792년 22세 때에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어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그 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피아노 연주가로 활약하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26세 때부터는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며 작곡도 인정을 받아 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잡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에게는 치명적인 운명이 닥쳐왔다. 그가 28세 때 귓병을 앓아 청각을 점차 잃게 되었다. 1800년에는《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32세 때에는 절망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베토벤은 자결을 결심하고 비인 교외인 하이리겐시타트에서《하일리겐시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돌리고 "나에게 신으로부터 내린 모든 사명을 다 할 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된다." 고 결심한 그는 그 가혹한 운명과 싸우면서 작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바이올린협주곡》(3곡, 1806), 피아노곡《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베토벤은 가족적으로나 일신상으로나 불행이 겹친데다가 빈곤과 고난과 번민 속에 살아 나왔고, 한편 이를 극복하고 그의 예술을 창조한 것이다. 베토벤은 남달리 인간애가 풍부하였고 고독과 절망에서도 항시 환희와 희열로써 곤경을 극복해 갔다. 베토벤은 또한 풍부한 감수성과 자유분방한 개성, 섬세한 감정과 생활의식 등을 내재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것들은 결코 자기 사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언제나 현대적이고 역사적인 인류개혁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귓병과 빈곤 등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현대를 의식하고 전 인류적인 인생관과 사고를 음악적 창작에 결부시켰다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창작활동의 이념은 개인적인 감각이나 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 통하는 고민과 희열이 그것이다. 그의 예술의 특징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환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보편성에 있다고 본 다.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다면 선배인 하이든, 모차르트의 뒤를 이어 고전음악의 주요소인 형식을 한층 확장 완성시켰고, 연주양식의 개척과 작곡 수법이나 관현악법에 있어서도 결정 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는 낭만주의의 가장 특징인 자주성과 개성의 확립을 꾀하였고, 진취적이고 과감한 태도로써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