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를 습득한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귀족적이라고 할 만한 폴로네이즈(Polonaise)의 리듬과 농민적이고 대중적인 마주르카(Mazurka) 등의 리듬과 선율이 그의 음악적인 영감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작품은 대개가 즉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200여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독주곡과 소품이 많다. 섬세하고 정서적인 그의 곡에는 격정과 애수가 흘러넘친다.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은 날은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출생일은 7일이 앞선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니콜라스 쇼팽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다. 어머니 유스티나는 가정의 항상 화목하게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배려하는 자상한 여인이었다. 죠르쥬 상드는 이 어머니를 일컬어 "쇼팽이 진실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말한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볼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1816년 6세 때 정식으로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1818년 2월 26일 8세 때 공개 연주회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 사람들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스승 지브니는 쇼팽에게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스스로 그만두었다. 쇼팽은 학창시절 문학이나 역사에는 몰두했지만 자연과학이나 그리스어 라틴어는 지루해하여 만화만 그렸다고 한다. Pichon은 쇼팽의 별명이었다.(Chopind를 바꾸면 pichon이 됨). 그러나 쇼팽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는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엘스너 선생을 만나게 된다. 1822년 12세 때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엘스너는 3년간 쇼팽을 밑에 두고 가르치게 되는데, 이런 기록을 남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 이후에 그는 독일로 여행을 간다. 독일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은 귀족들은 "내가 살아있는 평생에 쇼팽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겠다." 라고 하기도 했다. 192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고, 또 이 무렵 J.N.후멜과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29년 니콜라스1세가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왔을 무렵에 파가니니도 도착했다. 쇼팽은 그의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무렵 그의 가 탄생하였다. 쇼팽은 19세 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 '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 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즈음 빈에서는 왈츠가 대성행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빈에서는 왈츠곡 몇 개와 마주르카를 썼을 뿐 별로 작곡의 성과는 없었다. 이후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여행을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으나 쇼팽은 "피아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죽을힘을 다해 연주 했다." 라고 했다.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쇼팽의 재능에 외면적으로는 우정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위험한 경쟁상대로 의식하여 은근히 못마땅해 하였다. 불쌍하고 가엾은 쇼팽은 이내 용기를 잃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 탓에 더욱 실패감을 느꼈다. 그의 고국 친구 맛신스키에게 이즈음 보낸 편지에는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힘을 주었던 사람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어 그걸 나에게 적어 보내줘. 나는 그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 할거야." 여기에서 그란 쇼팽의 사랑 콘스탄티아다. 그는 새삼스레 사무치는 여인의 마음은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 매달릴 수 있는 정신적인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심정이었다. 쇼팽의 격정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쇼팽의 다른 편지에는 "파리에 갈 것인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다 같은 것이야 만일 콘스탄티아가 내 생활을 친절히 묻거든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줘,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워하고 불행해 한다고 전해줘.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뼛가루는 그녀의 발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고 전해줘." 그러면서도 쇼팽은 콘스탄티아에겐 직접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나도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정말 나는 오래 전부터 내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있어." 한편 '코스탄티아'와의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맛신스키도 군에 갔다하여 그의 초조감은 날로 더하였다.《스케르초 D단조》(op.20)은 이런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후멜, 탈베르크, K.체르니 같은 피아니스트와 교류를 가지기는 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1831년 7월 20일 21세때 비인을 떠나 뮌헨을 거치며 그는 그의 통렬한 슬픔의 외침은 'C 단조 에튀드, D 단조 프렐류드'에 잘 나타나 있고 무력감은 A단조 프렐류드에서 나타나고 있다. 1931년 9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던 쇼팽의 실망은 컸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혁명 실패의 소식을 듣고 작곡한 것이 오늘날《혁명 에튀드(op.10 No.12)》로 불리는 작품이다. 1831년 9월말 파리로 나온 쇼팽은 당시 일류 피아니스트인 C.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는 쇼팽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3년간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쇼팽의 스승인 엘스너에 대한 다른 음악가들의 질투(대단한 제자를 두는 것에 대한)였다. 친구 F.리스트와 F.힐러의 만류로 쇼팽은 이를 거절 하였고 오페라나 칸타타 교향곡 등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피아노에만 열중 하였다. 연주회들을 통해 찬사를 받고 있던 쇼팽은 그리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1832년 그는 파리에서의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고, 그뒤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또 이 무렵부터 창작활동도 활발하였다. 파리는 당시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고 있을 때였으며,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를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리스트와 친하게 지내었다. 리스트는 격정의 피아니스트로서 천성의 미모를 가지고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쇼팽과의 정반대의 격정적인 면을 가진 천재가 서로의 본성을 이해하며 친밀하게 사귀게 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연습곡 10번》을 바쳤다.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감격했다. 이 모든 관계들도 쇼팽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쇼팽의 마음에는 항상 우수와 고독이 가득했고 이것이 쇼팽 음악속해서 살아 숨쉬는 특징이다. 쇼팽은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귀족들은 쇼팽의 실력을 알고 앞을 다투어 그들의 아이를 그에게 맡겼다. 이 무렵 쇼팽은 멘델스존, 하이네 등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졌다.
1836년 드레스덴에서 바르샤바 시절의 여자친구인 알토가수 마리아 보진스카를 다시 만났고, 이듬해에는 약혼으로까지 진전되었으나, 이때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많아 결국 파혼하게 되었다.《Nocturn op.69. NO.2》작품 초고에《마리아양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으나《잊어버리기 위하여》라는 작품으로 그녀에게 드레스덴을 떠나온 지 1주일 안으로 그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1836년 겨울, 26세때 마리 다구 백자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6세나 연상인 인기 여류작가였던 죠르쥬 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7년 10월 쇼팽의 건강은 악화 되어 상드와 쇼팽은 마조르카 섬이라 불리는 따듯한 섬으로 남쪽으로 갔으나 쇼팽의 병세는 극에 달했다. 이곳에서 그는《빗방울 전주곡》,《폴로네즈 c단조》《폴로네즈 a장조》(op.40),《발라드 F장조》(op.38) 완성했다. 1839년 죠르쥬 상드의 별장이 있는 조용한 곳에서 그는 명랑함과 순진성을 다시 되찾았고 이 곳에서 쇼팽은 상드를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상드는 상드대로 쇼팽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1940년 쇼팽의 음악은 절정기에 달했는데 그것은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46년 11월 36세때 쇼팽과 상드와의 관계는 그동안 쌓여왔던 상드가 그의 병간호에 매우 지쳐갔으며 결정적으로 상드의 딸이 상드의 마음에 안 드는 사위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쇼팽이 그의 딸을 돕게 되어 가정불화가 원인이 되어 두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쇼팽의 건강상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1848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1848년 2월 16일 쇼팽은 파리에서의 최후의 콘서트를 가졌는데 1주일 전부터 매진이 되었다. 쇼팽은 심한 기침과 발작으로 두려워했었다. 연주를 하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3 중주곡, 쇼팽의 녹턴 바르카롤라, 에튀드, 프렐류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왈츠 연주 때는 청중들의 갈채가 절정에 도달하여 앙코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쇼팽은 숨이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개인교수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생애의 마지막 날, 그의 병세를 듣고 달려온 포토츠카 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쇼팽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음악을 듣기를 원했다. 연주자가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 쳐 드리겠다고 하자 쇼팽은 "내 것 말고 더욱 순수한 음악을……. 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 주시오." 라고. 1849년 10월 17일 오전 2시 그는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별다른 고통 없이 눈을 감았으며, 최후로 이렇게 외쳤다.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 이 뜻은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쇼팽의 병은 폐결핵과 후두결핵이라고 진단되었다. 장례식은 그 사망한 3일 후 20일에 마그레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저명인사와 이름 있는 예술가가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일반 사람들은 3000 여명에 달했다. 장례식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사망한 날 그의 마스크가 떠졌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선물로 받은 폴란드 흙이 유해 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 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작품에는 후멜과 J.필드의 영향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양식은 거의 독립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작품의 특징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單旋律]한 구성에 있으며, 선율의 움직임에 자유스러움을 주기 위하여, 반주 쪽을 화음적 패턴으로 함으로써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리듬이나 프레이징에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구조를 쓰고 있으며, 또 화음에서도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구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한편 마주르카 같은 민속음악의 형식을 쓴 것에서는 폴란드 민속음악에서 볼 수 있는 드로운 바스와 교회선법(敎會旋法)이 사용되고 있다. 피아노 연주에서는 쇼팽은 페달의 사용에 의해 음색의 종류를 늘렸으며, 또 약박(弱拍)을 악보에 기보(記譜)된 형보다도 약간 인접한 강박(强拍)에 접근시키는 연주법(tempo rubato:奏法)을 사용하여,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쇼팽 (1810~1849)♪
프레드릭 프란치섹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3.1 ~ 1849.10.17)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를 습득한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귀족적이라고 할 만한 폴로네이즈(Polonaise)의 리듬과 농민적이고 대중적인 마주르카(Mazurka) 등의 리듬과 선율이 그의 음악적인 영감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작품은 대개가 즉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200여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독주곡과 소품이 많다. 섬세하고 정서적인 그의 곡에는 격정과 애수가 흘러넘친다.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은 날은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출생일은 7일이 앞선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니콜라스 쇼팽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다. 어머니 유스티나는 가정의 항상 화목하게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배려하는 자상한 여인이었다. 죠르쥬 상드는 이 어머니를 일컬어 "쇼팽이 진실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말한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볼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1816년 6세 때 정식으로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1818년 2월 26일 8세 때 공개 연주회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 사람들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스승 지브니는 쇼팽에게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스스로 그만두었다. 쇼팽은 학창시절 문학이나 역사에는 몰두했지만 자연과학이나 그리스어 라틴어는 지루해하여 만화만 그렸다고 한다. Pichon은 쇼팽의 별명이었다.(Chopind를 바꾸면 pichon이 됨). 그러나 쇼팽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는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엘스너 선생을 만나게 된다. 1822년 12세 때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엘스너는 3년간 쇼팽을 밑에 두고 가르치게 되는데, 이런 기록을 남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 이후에 그는 독일로 여행을 간다. 독일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은 귀족들은 "내가 살아있는 평생에 쇼팽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겠다." 라고 하기도 했다. 192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고, 또 이 무렵 J.N.후멜과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29년 니콜라스1세가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왔을 무렵에 파가니니도 도착했다. 쇼팽은 그의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무렵 그의 가 탄생하였다. 쇼팽은 19세 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 '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 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 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즈음 빈에서는 왈츠가 대성행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빈에서는 왈츠곡 몇 개와 마주르카를 썼을 뿐 별로 작곡의 성과는 없었다. 이후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여행을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으나 쇼팽은 "피아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죽을힘을 다해 연주 했다." 라고 했다.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쇼팽의 재능에 외면적으로는 우정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위험한 경쟁상대로 의식하여 은근히 못마땅해 하였다. 불쌍하고 가엾은 쇼팽은 이내 용기를 잃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 탓에 더욱 실패감을 느꼈다. 그의 고국 친구 맛신스키에게 이즈음 보낸 편지에는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힘을 주었던 사람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어 그걸 나에게 적어 보내줘. 나는 그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 할거야." 여기에서 그란 쇼팽의 사랑 콘스탄티아다. 그는 새삼스레 사무치는 여인의 마음은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 매달릴 수 있는 정신적인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심정이었다. 쇼팽의 격정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쇼팽의 다른 편지에는 "파리에 갈 것인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다 같은 것이야 만일 콘스탄티아가 내 생활을 친절히 묻거든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줘,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워하고 불행해 한다고 전해줘. 내가 죽고 난 뒤에 내 뼛가루는 그녀의 발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고 전해줘." 그러면서도 쇼팽은 콘스탄티아에겐 직접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나도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정말 나는 오래 전부터 내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있어." 한편 '코스탄티아'와의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맛신스키도 군에 갔다하여 그의 초조감은 날로 더하였다.《스케르초 D단조》(op.20)은 이런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후멜, 탈베르크, K.체르니 같은 피아니스트와 교류를 가지기는 했으나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1831년 7월 20일 21세때 비인을 떠나 뮌헨을 거치며 그는 그의 통렬한 슬픔의 외침은 'C 단조 에튀드, D 단조 프렐류드'에 잘 나타나 있고 무력감은 A단조 프렐류드에서 나타나고 있다. 1931년 9월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던 쇼팽의 실망은 컸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혁명 실패의 소식을 듣고 작곡한 것이 오늘날《혁명 에튀드(op.10 No.12)》로 불리는 작품이다. 1831년 9월말 파리로 나온 쇼팽은 당시 일류 피아니스트인 C.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는 쇼팽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3년간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쇼팽의 스승인 엘스너에 대한 다른 음악가들의 질투(대단한 제자를 두는 것에 대한)였다. 친구 F.리스트와 F.힐러의 만류로 쇼팽은 이를 거절 하였고 오페라나 칸타타 교향곡 등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피아노에만 열중 하였다. 연주회들을 통해 찬사를 받고 있던 쇼팽은 그리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1832년 그는 파리에서의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고, 그뒤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또 이 무렵부터 창작활동도 활발하였다. 파리는 당시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고 있을 때였으며,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를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리스트와 친하게 지내었다. 리스트는 격정의 피아니스트로서 천성의 미모를 가지고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쇼팽과의 정반대의 격정적인 면을 가진 천재가 서로의 본성을 이해하며 친밀하게 사귀게 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연습곡 10번》을 바쳤다.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감격했다. 이 모든 관계들도 쇼팽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쇼팽의 마음에는 항상 우수와 고독이 가득했고 이것이 쇼팽 음악속해서 살아 숨쉬는 특징이다. 쇼팽은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귀족들은 쇼팽의 실력을 알고 앞을 다투어 그들의 아이를 그에게 맡겼다. 이 무렵 쇼팽은 멘델스존, 하이네 등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졌다.
1836년 드레스덴에서 바르샤바 시절의 여자친구인 알토가수 마리아 보진스카를 다시 만났고, 이듬해에는 약혼으로까지 진전되었으나, 이때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가 많아 결국 파혼하게 되었다.《Nocturn op.69. NO.2》작품 초고에《마리아양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으나《잊어버리기 위하여》라는 작품으로 그녀에게 드레스덴을 떠나온 지 1주일 안으로 그녀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1836년 겨울, 26세때 마리 다구 백자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6세나 연상인 인기 여류작가였던 죠르쥬 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1837년 10월 쇼팽의 건강은 악화 되어 상드와 쇼팽은 마조르카 섬이라 불리는 따듯한 섬으로 남쪽으로 갔으나 쇼팽의 병세는 극에 달했다. 이곳에서 그는《빗방울 전주곡》,《폴로네즈 c단조》《폴로네즈 a장조》(op.40),《발라드 F장조》(op.38) 완성했다. 1839년 죠르쥬 상드의 별장이 있는 조용한 곳에서 그는 명랑함과 순진성을 다시 되찾았고 이 곳에서 쇼팽은 상드를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상드는 상드대로 쇼팽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1940년 쇼팽의 음악은 절정기에 달했는데 그것은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846년 11월 36세때 쇼팽과 상드와의 관계는 그동안 쌓여왔던 상드가 그의 병간호에 매우 지쳐갔으며 결정적으로 상드의 딸이 상드의 마음에 안 드는 사위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쇼팽이 그의 딸을 돕게 되어 가정불화가 원인이 되어 두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쇼팽의 건강상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1848년 영국으로 건너가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 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1848년 2월 16일 쇼팽은 파리에서의 최후의 콘서트를 가졌는데 1주일 전부터 매진이 되었다. 쇼팽은 심한 기침과 발작으로 두려워했었다. 연주를 하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3 중주곡, 쇼팽의 녹턴 바르카롤라, 에튀드, 프렐류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왈츠 연주 때는 청중들의 갈채가 절정에 도달하여 앙코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쇼팽은 숨이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개인교수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생애의 마지막 날, 그의 병세를 듣고 달려온 포토츠카 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쇼팽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음악을 듣기를 원했다. 연주자가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 쳐 드리겠다고 하자 쇼팽은 "내 것 말고 더욱 순수한 음악을……. 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 주시오." 라고. 1849년 10월 17일 오전 2시 그는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별다른 고통 없이 눈을 감았으며, 최후로 이렇게 외쳤다.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 이 뜻은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쇼팽의 병은 폐결핵과 후두결핵이라고 진단되었다. 장례식은 그 사망한 3일 후 20일에 마그레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저명인사와 이름 있는 예술가가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일반 사람들은 3000 여명에 달했다. 장례식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사망한 날 그의 마스크가 떠졌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선물로 받은 폴란드 흙이 유해 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 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작품에는 후멜과 J.필드의 영향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양식은 거의 독립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작품의 특징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單旋律]한 구성에 있으며, 선율의 움직임에 자유스러움을 주기 위하여, 반주 쪽을 화음적 패턴으로 함으로써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리듬이나 프레이징에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구조를 쓰고 있으며, 또 화음에서도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구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한편 마주르카 같은 민속음악의 형식을 쓴 것에서는 폴란드 민속음악에서 볼 수 있는 드로운 바스와 교회선법(敎會旋法)이 사용되고 있다. 피아노 연주에서는 쇼팽은 페달의 사용에 의해 음색의 종류를 늘렸으며, 또 약박(弱拍)을 악보에 기보(記譜)된 형보다도 약간 인접한 강박(强拍)에 접근시키는 연주법(tempo rubato:奏法)을 사용하여,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