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제립(帝立) 법률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세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 이겨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22살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1866∼78)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1876년부터 차이코프스키는 돈 많은 러시아 철도왕(鐵道王)의 미망인 폰 맥크 부인(1831∼1894)으로부터 연금 6,000루블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1893년 10월에 제6교향곡《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인 1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變拍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非條理性)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俗流)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만프레드 교향곡 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비창》(op.74)으로 끝났다. op.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를 그만 둔 시기(1878)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교직과 비평에 종사하였던 시기로 작품의 경향도 낭만적인 향취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1875)과 바이올린협주곡(1878) 등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다. 후기는 제4번(1877) 이후의 3곡의 교향곡, 그리고 오페라《예브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78)을 포함하여, 모두가 충실한 창조력과 기법의 완결을 상기시킨다. 이 두 시기 사이에는 그의 불행한 결혼문제가 개재되어 있어 그의 작풍변화의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향곡 중에서는 전기의 것 중 제2번(1872)이 소러시아민요에서 취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4번 이후의 3곡의 교향곡들은 단일 모티프인 이른바 '숙명의 동기'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3곡을 일련의 곡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발레음악에서는《백조의 호수 Swan Lake》(1876),《잠자는 숲 속의 미녀 The Sleeping Beauty》(1889),《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1892)의 3곡 중 특히《백조의 호수》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푸슈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예브게니 오네긴》과《스페이드의 여왕 The Queen of Spades》(1890)이 유명하다. 특히 전자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의 한 사람인 오네긴을 주인공으로 하여, 러시아적인 인간상의 애환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그의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실내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곡의 현악4중주곡(1871, 74, 76)은 보로딘, 타네예프의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악파의 훌륭한 소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저작으로《화성학 개요》(1875)가 있다.
차이코프스키 (1840~1893)♪
페테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tch Tchaikovsky (1840.5.7 ~ 1893.11.6)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1893년 11월 6일 역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53세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에 바탕을 든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쓴 사람이다. 그는 5인조의 공식적인 생각에 공감을 갖지 못했고 그 과장된 만네리즘을 싫어해서 무엇보다 그는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이고 영원성이 있는 음악을 썼다. 물론 러시아의 민족음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소재로 사용하였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공통적인 수법으로 일반적인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그의 기교는 민족주의 5인조보다 우수하고 세련되어 있으며, 감정 내객은 대가다운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음악을 오늘날에도 세계인류가 애호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러시아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비로소 세계적으로 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모친의 지도로 피아노를 배우고 지방의 민요를 익혔다. 그러나 그가 10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하자, 그 곳 제립(帝立) 법률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세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 이겨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22살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1866∼78)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1876년부터 차이코프스키는 돈 많은 러시아 철도왕(鐵道王)의 미망인 폰 맥크 부인(1831∼1894)으로부터 연금 6,000루블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1893년 10월에 제6교향곡《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후인 1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變拍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非條理性)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俗流)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만프레드 교향곡 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비창》(op.74)으로 끝났다. op.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를 그만 둔 시기(1878)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교직과 비평에 종사하였던 시기로 작품의 경향도 낭만적인 향취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1875)과 바이올린협주곡(1878) 등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다. 후기는 제4번(1877) 이후의 3곡의 교향곡, 그리고 오페라《예브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78)을 포함하여, 모두가 충실한 창조력과 기법의 완결을 상기시킨다. 이 두 시기 사이에는 그의 불행한 결혼문제가 개재되어 있어 그의 작풍변화의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향곡 중에서는 전기의 것 중 제2번(1872)이 소러시아민요에서 취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4번 이후의 3곡의 교향곡들은 단일 모티프인 이른바 '숙명의 동기'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3곡을 일련의 곡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발레음악에서는《백조의 호수 Swan Lake》(1876),《잠자는 숲 속의 미녀 The Sleeping Beauty》(1889),《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1892)의 3곡 중 특히《백조의 호수》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푸슈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예브게니 오네긴》과《스페이드의 여왕 The Queen of Spades》(1890)이 유명하다. 특히 전자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의 한 사람인 오네긴을 주인공으로 하여, 러시아적인 인간상의 애환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그의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실내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곡의 현악4중주곡(1871, 74, 76)은 보로딘, 타네예프의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악파의 훌륭한 소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저작으로《화성학 개요》(1875)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