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바/라/기 ---- 1막 7장

박대용20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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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집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막 7장





해가 바뀌었나 싶었는데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좀처럼 아프지 않던 시은이가 몸살에 걸려 드러누웠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정우는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 먹인 뒤 혼자서 가방을 들고 나갔다.

거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니 장사하고 싶은 의욕이 일지 않았다. 시은이 옆에서 하루쯤 쉬었으면 여한이 없을 거 같았다.

ㅡ '정우야, 조금만 더 모으면 우리도 번듯한 방을 얻을 수 있어. 힘들더라도 잠아.'

시은이의 음성이 귀청을 울렸다.

정우는 비닐우산을 펴고 거리로 나섰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해서 동대문운동장 지하도로 갔다.

비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지독히도 장사가 안 됐다. 하루종일 귀걸이 하나와 브로치 하나를 팔았을 뿐이었다. 옆에서 모자를 파는 유씨는 저녁이 되자 콩국수를 시켜먹었다.

하얀 기름기가 도는 콩국수 국물을 보고 있으니 군침이 돌았다. 점심도 걸러서 허리가 졌지만 막상 시켜 먹으려고 하니 돈이 아까웠다. 집에 가서 시은이와 함께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고 작정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콩국수 그릇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 가면서 행인이 눈이 띄게 줄어들었다. 유씨는 돌아갈 생각인지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겼다. 정우는 하나만 더 팔고 일어나야겠다고 다짐하며 액세서리를 다시 보기 좋게 진열하기 시작했다.

브로치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옆에서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너무도 반가웠다.

"어서 오세‥‥‥."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 뒷말을 삼켰다. 짜부가 염라대왕처럼 눈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요 근방에서 봤다고 하길래 혹시나 싶어서 와 봤더니‥‥‥ 이 짓거리하고 있었구나! 네 새끼가 뛰어봐야 벼룩이지!"

짜부가 오른손으로 멱살을 척 감아쥐었다.

정우는 순간, 주머니 속의 잭나이프를 떠올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학질에 걸린 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칼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이 새꺄! 네가 감히 현정이까지 업고 도망을 쳐?"

"현정이요? 난 아녜요!"

"네가 이니면 현정이가 제발로 걸어갔겠어?"

"놔요! 난 아무 잘못 없어요!"

"잘못 없는 놈이 왜 도망쳐?"

짜부가 왼손 팔꿈치로 어깨를 찍었다. 어깨뼈가 내려 않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가자!"

짜부가 질질 끌고 갔다. 안 끌려가려고 다리에 힘을 줘 봤지만 소용없었다.

"아저씨, 도와 주세요!"

정우는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있는 유씨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유씨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점씨,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손 놓고 말로 합시다. 좋은 우리말 놔두고 왜 폭력을 씁니까?"

"야, 이 씨벌아! 똥 눌 때와 오줌 눌 때를 구분하고 끼어들어?"

"보자보자 하니까 이 아줌마, 말씀이 지나치시네?"

"너 같은 새끼가 끼어들 자리가 아냐! 내 자식 내가 데리고 가겠다는데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참견은?"

짜부가 인상을 구기면서 험악하게 나오자 유씨는 기가 꺾이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저씨, 아니에요! 난 이 아줌마 몰라요!"

"아줌마? 실컷 입혀 주고 먹여 줬더니 에미한테 안면을 까! 에라, 이 배라먹을 새끼야!"

짜부가 무툭한 손으로 얼굴을 갈겼다. 코피가 후두둑 앞섶으로 떨어졌다.

"당신, 정말 엄마 맞아?"

빙 둘러서 있던 구경꾼 중에서 건장한 청년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청년의 애인인 듯한 여자가 가만 있으라고 팔을 잡았지만 청년은 손을 뿌리치고 짜부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난 정말 몰라요!"

정우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대로 끌려가면 끝장이었다. 맞아서 불구가 되든지 오랫동안 골방에 처박히든지 할 게 분명했다.

"넌 또 뭐야? 내가 내 뱃속에서 나온 새끼도 못 알아보는 바보 천치로 보여!"

"아이가 아니라고 하잖소?"

"씨발 ! 애새끼 말은 믿고 내 말은 못 믿겠다는 거야?"

"일단 손이나 좀 놔 봐요. 코피부터 닦아 줍시다."

"신경 끄고, 시간 남아 돌거들랑 여관에 가서 애인하고 레슬링이나 하셔!"

짜부가 청년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어밀며 말했다. 수치심을 안겨 줘서 떨어뜨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청년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물들었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이 손 놔!

청년이 흥분해서 짜부의 오른팔을 잡았다. 짜부가 팔을 움켜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청년이 강제로 손가락을 하나씩 펴 나갔다. 짜부가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짜부의 손아귀에 풀려나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짜부가 힘을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청년의 팔뚝을 텁썩 물었다.

"아악!"

청년이 비명을 질렸다. 정우는 그 틈에 후닥닥 달아났다.

"야, 안 서!"

"이년아, 어딜 가!"

짜부와 청년의 음성이 차례대로 들려 왔다.

정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도를 나왔다. 거리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주저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육교를 건너 이스턴 호텔 쪽으로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짜부는 사내와 싸움이 붙었는지 따라오는 것 같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자 비로소 지하도에 펼쳐 놓고 온 액세서리와 가방이 생각났다. 갖고 와야겠는데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효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잭나이프가 잡혔다. 짜부에게 복수를 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상상 속의 짜부는 무섭지 않은데 막상 짜부와 마주치니 이상하게도 기가 꺾었다.

"젠장!"

정우는 잭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칼침을 놓아 주리다 다짐하며.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동네에 내리니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웃옷을 벗어서 쥐어짠 다음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복도는 빗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정우는 맨 끝방으로 다가갔다. 운동화에 고인 물 때문에 걸음이 저벅거렸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데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오빠, 살려‥‥‥ 주세요. 왜‥‥‥ 그래요?"

시은이의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정우는 문을 벌컥 열었다. 웬 사내가 알몸으로 시은이를 올라타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옆방에 사는 웨이터 형이었다. 술에 취했는지 눈동자며 표정이 풀어져 있었다.

"뭘 봐, 인마! 문 닫아!"

웨이터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정우는 밑에 깔린 시은이를 보았다. 허벅지까지 내려온 바짓자락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잭나이프가 잡혔다. 칼을 꺼내 팔을 등 뒤로 돌린 뒤 철끈을 밀어내고 버튼을 눌렀다. '철컥!'하고 칼날이 펴지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 왔다.

"야! 문 닫으라는 소리 안 들려?"

웨이터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개새끼!"

정우는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들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웨이터가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안 돼!"

뒤늦게 칼을 발견한 시은이가 소리쳤다. 정우는 그대로 달려들며 웨이터의 복부에다 잭나이프를 힘껏 찔러넣었다.

"으윽!"

웨이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벌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복부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나와, 누나! 빨리‥‥‥."

정우는 다급히 내려간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기다시피해서 방을 나섰으나 몸살 때문인지 웨이터에게 맞은 건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시은이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층계를 내려갔다. 밖에는 비가 초알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시은이를 부촉한 채 빗속을 달렸다. 시은이가 옆구리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뭐라고 했으나 빗소리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

정우는 귀를 갖다대며 소리쳤다.

"돈‥‥‥, 돈을‥‥‥ 갖고 와야 해‥‥‥."

"돈이 어딨는데?"

"판넬 뒤‥‥‥ 블록 안에‥‥‥."

정우는 다시 돌아갈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웨이터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포기해!"

정우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급적이면 멀리 달아나야 했다. 경찰이 오기 전에‥‥‥.

빗속을 한참 걷다 보니 청량리였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수중에 돈이 없으니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쏟아지는 비를 오랫동안 맞아서 그런지 하기가 느껴졌다.

일단 비를 긋기 위해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깜깜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층으로 이어진 층계가 보였다. 이층으로 올라가 시은이를 벽에 기대게 해서 앉혀 놓았다. 시은이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이 펄펄 끊었다.

여름이라고 하지만 콘크리트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건물을 나와서 구멍가게를 찾아보았다. 삼십 미터쯤 올라가니 구멍가게가 보였다. 주인에게 돈을 주고서 라면상자 두 개를 샀다.

상자가 비에 젖지 않게 건물 벽쪽으로 붙어서 되돌아왔다. 바닥에 상자를 깔고 시은이를 눕히려니 젖은 옷이 걸렸다.

정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시은이의 스웨터를 벗겼다.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스웨터의 물기를 짜서 입혀 준 다음에 바지를 벗기려고 하가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시은이가 번쩍 눈을 떴다.

"오빠‥‥‥ 안 돼!"

"누나, 나야!"

정우가 재빨리 말했다. 시은이는 몽롱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머리를 푹 떨구었다.

옷은 젖어 있어서 잘 벗겨지지 않았다. 바지를 벗기자 곧바로 속살이었다. 시은이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고는 바지를 벗겨냈다. 힘껏 물기를 짠 다음에 다시 옷을 입혀 주었다.

라면상자를 뜯어 바닥에다 폈다. 시은이를 그 위에 눕히고 이마에 손을 대 보았다. 열이 심상치 않았다. 일단 열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건물을 오르내리면서 화장실을 찾아보았다. 2층에도 화장실은 있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3층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4층 화장실은 다행히도 문이 열려 있었다.

수건을 찾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물에 적셔 가지고 2층으로 내려왔다. 시은이의 머리에 티셔츠를 올려놓았다. 티셔츠는 금세 따끈따끈해졌다. 정우는 티셔츠를 들고 밤새 4층 화장실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새벽이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 벽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인기척이 나서 눈을 떴다. 마포자루를 든 아주머니들이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우는 시은이의 이마에 올려놓은 티셔츠를 펴서 입었다. 시은이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축 늘어진 시은이를 부축해 건물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총알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일단 비를 피하기 위해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뒷자리에다 시은이를 눕히고 차장에 머리를 기댔다. 이내 졸음이 쏟아졌다.

누군가 몸을 흔들었다. 버스 안내양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멈춰 있는 여러 대의 버스가 보였다. 어느새 종점에 온 모양이었다.

시은이를 업고서 버스에서 내렸다. 비는 조금도 수그러들 줄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까를 궁리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쪽은 마을이었고 뒤쪽은 산이었다. 산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문득, 반공호가 떠올랐다. 반공호라면 누구의 눈총도 받지 않고 비를 피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서 산을 올라갔다. 산 중턱쯤 올라가자 예상했던 대로 반공호가 나왔다. 반공호 안은 어두웠다. 바닥이 젖어 있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안쪽으로 들어가자 마른땅이 나왔다. 쓰레기를 대충 치우고서 시은이를 눕혔다.

정우는 시은이가 의식을 회복하기를 기다리며 반공호 입구로 나왔다. 쏟아지는 비를 보고 있으니 허기가 졌다. 어제 아침밥을 먹고는 내리 굶었으니 꼬박 하루를 굶은 셈이었다.

시은이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몹시 추운지 입술이 파랬다. 시은이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누나, 많이 추워?"

정우가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시은이는 대답 대신 와락 껴안았다.

"정, 정우야! 우, 우리‥‥‥ 소, 소망원으로‥‥‥ 다, 다시 들어갈까?"

시은이가 턱을 떨면서 물었다.

"싫어!"

정우가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소망원은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시은이가 떠나고 난 뒤 혼자서 보낸 날들이 떠오르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시 들어갈 거라면 뭐하러 나왔어?"

"그, 그렇지? 그럼‥‥‥. 너‥‥‥ 야, 양자로 들어갈래? 아, 아주‥‥‥ 부, 부잣집인데 네가 원하다면‥‥‥ 보, 보내 줄 수 있어."

"누나, 나 그딴 거 필요없어! 제발 날 떼어 놓으려고 하지 마.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부탁이야, 누나‥‥‥."

정우는 시은이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 겁이 버럭 나서 애원했다.

"아, 알았어‥‥‥ 그, 그냥 네 마음이 어떤지 싶어서‥‥‥ 해, 해 본 소리야."

시은이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려고 해를 썼다. 시퍼런 입술 때문에 미소가 몹시 슬퍼 보였다.

"누나는 왜 나만 버려 두고 소망원을 나간 가야?"

"정우야! 나, 나는‥‥‥ 시월을 기다리며 살았어. 시, 시월이 도면‥‥‥. 엄마가 꼭 올 거라고 믿었지. 그, 그런데 십이월이 되었지만 어, 엄마는‥‥‥ 오지 않았어. 하루는 원장 선생님이 색편지지를 하, 한 장씩 나눠 주며‥‥‥. 사,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어. 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쓰라면서‥‥‥."

"아, 기억난다! 참, 그런데 그 선물은 어디서 오는 거야?"

"소, 소망원 아이들이 쓴 편지는‥‥‥ 미, 미군부대 트리에 놓이게 돼. 그, 그럼 미군들이 편지를 하나씩 가져가서‥‥‥ 서, 선물을 하는 거야."

"그랬구나! 난 장갑하고 목도리를 써서 받았는데‥‥‥."

소망원에 놓고 온 장갑하고 목도리가 생각났다. 지금 시은이의 손에 장갑을 끼워 주고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면 감기가 금세 나을 것만 같았다.

"나, 난‥‥‥. 어, 어머니라고 썼어."

시은이는 말을 하고 나서 이를 사려물었지만 얼굴이 문풍지처럼 파르르 떨렸다.

"원장 선생님이 가만 있었어?"

"다, 다시 쓰라고 하셨어. 그, 그래서 다시 썼지. 해, 행복이라고‥‥‥."

"아, 그래서 혼났구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운동장을 혼자 쓸었잖아?"

"워, 원장 선생님한테 혼나서‥‥‥ 소, 소망원을 나온 건 아냐. 크, 크리스마스 날‥‥‥. 나, 난 알았어. 사, 산타 할아버지처럼‥‥‥ 아, 아무리 기다려도‥‥‥ 어, 엄마는 안 온다는 것을‥‥‥ 아, 아무리 기다려도‥‥‥ 해, 행복은 제발로 찾아오지‥‥‥ 아, 않는다는 것을‥‥‥."

"행복?"

"그, 그래! 오지도 않는 엄마를‥‥‥ 어,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잖아? 지, 지문이 닳아 없어지도록‥‥‥ 보, 봉투에 풀칠이나 하면서‥‥‥ 우, 우리도 남들처럼‥‥‥ 자, 잘 살아봐야지. 엄마, 아빠도‥‥‥ 어, 없는데‥‥‥."

"어떻게?"

"음‥‥‥ 저, 정원이 딸린 우리집도 잦고‥‥‥ 하, 학교도 다니고‥‥‥ 저, 저녁에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짜, 짜장면도 시켜먹고‥‥‥ 이, 일요일에는 놀이공원으로‥‥‥ 노, 놀러도 가고‥‥‥ 뭐, 그, 그렇게‥‥‥."

"엄마, 아빠가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무, 물론이지. 돈만 있으면‥‥‥."

시은이가 추위를 견디기 힘든지 바짝 끌어 앉으며 말했다.

정우는 바들바들 떠는 시은이를 안고 아름다운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풍경이었다. 관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가만히 껴안고 있지 시은이의 떨림이 조금씩 진정됐다. 잊고 있었던 빗소리가 다시금 귀청을 메웠다. 빗소리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 같았다.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화사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만 곁에 있다면 시은이가 이토록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컥 그리움이 치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정우는 시은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눈물을 슬쩍 닦았다. 앉은 채 잠이 들었는지 시은이의 숨소리가 평화로워졌다. 정우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KIES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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