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더불어 밀레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그림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일화적인 요소는 조금도 보이지않는다. 그저 추수가 진행되는 편편한 들판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으며, 그림 속에는 전원적 목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제목부터, 그리고 인물들의 익명성을 넘어서, 단지 노동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쥘 브로통의 1859년 작품은 풍속화 형태로 그림 전체가 이삭 줍는 여인들의 흥겨움과 질펀함으로 술렁이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밀레는 강건하며 간략한 노동하는 세 여인의 육체로 힘을 집중시킨다. 이는 마치 조각처럼 각인된 육체가 가난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은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비평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자연주의의 옹호자인 카스타나리는 "빈곤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결코 허위나 과장이 아닌, 자연에 대해서 일찍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발견했던 것과도 같은 위대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라며 칭송하였다. 반면 보수적 비평가들은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들"이라는 논조로 인물들에게 "빈곤을 관장하는 세 여신들"이란 이름을 헌정한다. 이에 대해 밀레는 "나는 평생을 두고 들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솔직하게 그렸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비스듬한 모습 속에 가려진 피곤한 얼굴, 노동으로 굽은 손, 전혀 꾸밈없는 그저 실용적인 작업복, 이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놓치지 않은 밀레의 섬세한 감성과 화법이, 풍요로운 도시 풍경에 가려졌던 농경을 또 하나의 당당한 현실로 만들어 놓는다. 흔히 밀레를 "농부들의 화가"라고 부르는데, 이는 밀레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의 작품 활동이 전적으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들에게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가 보여주는 장면에는 놀라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그림은 늦여름의 황금빛 보리들을 추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온 마을이 추수에 열중해 있으며, 추수된 보리들은 커다란 보리 짚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한층한층 쌓여 가는 보리 짚단은 다가올 추운 겨울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풍요의 상징인 듯하다.
그런데 밀레가 이 그림을 "추수"라고 하지 않고, "이삭 줍기"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이 그림의 아름다운 전원 경치에서 눈을 돌려, 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작품의 특성을 찾아보자.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
먼저 밀레의 그림을 잘 살펴보자. 세 여인이 땅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추수하는 농부들이 흘린 보리 이삭을 줍고 있다. 여인들의 뒤로는 마치 땅이 지평선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 펼쳐져 있으며, 그 곳에서는 일단의 농부들이 추수에 열중이다. 그리고 이들의 왼쪽으로는 엄청난 크기의 보리 짚단들이 눈에 띈다. 수평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마을의 모습이 뒷배경에 나타나고, 그 앞에 말을 탄 남자가 보이는데 일꾼들을 감독하고 있는 농장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들 농부들과 비교하여 전면의 세 여인은 이상하게도 고독해 보인다. 농부들과 여인들간의 거리도 무척이나 멀어 보이고, 아무도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이 여인들은 보리 추수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당시 사회의 가난한 소외자들이다. 농장주가 불쌍히 여겨 추수하는 농부들이 땅바닥에 흘린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소위 보리 이삭을 줍는 여인들인 것이다.
[생명을 불어넣는 회화 기법]
만약 눈을 감고 를 그려본다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만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구도나 색깔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밀레의 탁월한 회화 기법 덕택이기도 하다. 밀레는 세 여인을 한 무리로 묶어 구성하였는데, 즉 여인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단순화시켜 마치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시선을 그림 속 인물들의 세밀한 부분에 멈추게 하지 않고 전체 실루엣에 집중시킴으로써, 그림 속 인물들을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구성이 자칫 그림을 지나치게 무겁게 할 수도 있으므로, 밀레는 이를 피하기 위해 각 인물들에게 한 가지씩 중요한 움직임을 부여했다. 첫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 팔을 뻗치고 있고, 두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주워담고 있으며, 세 번째 여인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다. 결국 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줍는 일련의 연속 동작을 각자 한 동작씩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밀레는 이 여인들을 반원 형태의 축을 중심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여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인들이 하나의 보리 이삭이라도 더 줍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굽히고 일으키는, 연속적이고도 고된 동작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밀레는 이 그림을 현장에서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순전히 기억만으로 그렸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19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한참 산업 혁명을 겪고 있었는데, 산업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가난한 농촌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농촌 사회의 향수로 인해, 일단의 화가들이 농부들과 농가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밀레의 보다 2년 후에 그려진 쥘 브르통의 가 이같은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쥘 브르동의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밀레의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밀레의 와 달리, 저녁 노을 속 웅장한 전원 풍경 속에서 그 날의 수확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밀레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여서, 밀레의 작품들이 마치 민중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투쟁하라고 선동하는 것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유명한 연례 전시회인 살롱전에 전시된 밀레의 그림들은 당시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외딴 농가에까지 밀레의 복제화를 걸어놓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예술품의 주 고객층이었던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밀레의 그림들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밀레는 1849년 퐁텐블로 근처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곳에 전원 경치를 중시하는 화가들이 모이게 되어 유명한 바르비종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밀레는 명예도 벗어 던지고 돈을 위해 부자들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으며, 농촌 사회를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작품 세계만을 펼치게 된다.
이삭줍기
1857,83.5 x 111 cm, 오르세 미술관 , 파리
과 더불어 밀레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그림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일화적인 요소는 조금도 보이지않는다. 그저 추수가 진행되는 편편한 들판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세 명의 여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으며, 그림 속에는 전원적 목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제목부터, 그리고 인물들의 익명성을 넘어서, 단지 노동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쥘 브로통의 1859년 작품은 풍속화 형태로 그림 전체가 이삭 줍는 여인들의 흥겨움과 질펀함으로 술렁이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밀레는 강건하며 간략한 노동하는 세 여인의 육체로 힘을 집중시킨다. 이는 마치 조각처럼 각인된 육체가 가난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은 1857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비평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자연주의의 옹호자인 카스타나리는 "빈곤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결코 허위나 과장이 아닌, 자연에 대해서 일찍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발견했던 것과도 같은 위대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라며 칭송하였다. 반면 보수적 비평가들은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들"이라는 논조로 인물들에게 "빈곤을 관장하는 세 여신들"이란 이름을 헌정한다. 이에 대해 밀레는 "나는 평생을 두고 들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솔직하게 그렸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비스듬한 모습 속에 가려진 피곤한 얼굴, 노동으로 굽은 손, 전혀 꾸밈없는 그저 실용적인 작업복, 이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놓치지 않은 밀레의 섬세한 감성과 화법이, 풍요로운 도시 풍경에 가려졌던 농경을 또 하나의 당당한 현실로 만들어 놓는다. 흔히 밀레를 "농부들의 화가"라고 부르는데, 이는 밀레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의 작품 활동이 전적으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부들에게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가 보여주는 장면에는 놀라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그림은 늦여름의 황금빛 보리들을 추수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온 마을이 추수에 열중해 있으며, 추수된 보리들은 커다란 보리 짚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렇게 한층한층 쌓여 가는 보리 짚단은 다가올 추운 겨울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풍요의 상징인 듯하다.
그런데 밀레가 이 그림을 "추수"라고 하지 않고, "이삭 줍기"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이 그림의 아름다운 전원 경치에서 눈을 돌려, 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작품의 특성을 찾아보자.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
먼저 밀레의 그림을 잘 살펴보자. 세 여인이 땅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추수하는 농부들이 흘린 보리 이삭을 줍고 있다. 여인들의 뒤로는 마치 땅이 지평선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 펼쳐져 있으며, 그 곳에서는 일단의 농부들이 추수에 열중이다. 그리고 이들의 왼쪽으로는 엄청난 크기의 보리 짚단들이 눈에 띈다. 수평선을 따라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마을의 모습이 뒷배경에 나타나고, 그 앞에 말을 탄 남자가 보이는데 일꾼들을 감독하고 있는 농장의 주인이다.
그런데 이들 농부들과 비교하여 전면의 세 여인은 이상하게도 고독해 보인다. 농부들과 여인들간의 거리도 무척이나 멀어 보이고, 아무도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이 여인들은 보리 추수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당시 사회의 가난한 소외자들이다. 농장주가 불쌍히 여겨 추수하는 농부들이 땅바닥에 흘린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소위 보리 이삭을 줍는 여인들인 것이다.
[생명을 불어넣는 회화 기법]
만약 눈을 감고 를 그려본다면,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삭을 줍고 있는 세 여인만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의 구도나 색깔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밀레의 탁월한 회화 기법 덕택이기도 하다. 밀레는 세 여인을 한 무리로 묶어 구성하였는데, 즉 여인들의 모습과 움직임을 단순화시켜 마치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시선을 그림 속 인물들의 세밀한 부분에 멈추게 하지 않고 전체 실루엣에 집중시킴으로써, 그림 속 인물들을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구성이 자칫 그림을 지나치게 무겁게 할 수도 있으므로, 밀레는 이를 피하기 위해 각 인물들에게 한 가지씩 중요한 움직임을 부여했다. 첫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 팔을 뻗치고 있고, 두 번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주워담고 있으며, 세 번째 여인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다. 결국 세 여인은 보리 이삭을 줍는 일련의 연속 동작을 각자 한 동작씩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밀레는 이 여인들을 반원 형태의 축을 중심으로 위치시킴으로써, 여인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인들이 하나의 보리 이삭이라도 더 줍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굽히고 일으키는, 연속적이고도 고된 동작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밀레는 이 그림을 현장에서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작업실에서 순전히 기억만으로 그렸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소외된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
19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한참 산업 혁명을 겪고 있었는데, 산업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가난한 농촌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었다. 따라서 과거 농촌 사회의 향수로 인해, 일단의 화가들이 농부들과 농가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밀레의 보다 2년 후에 그려진 쥘 브르통의 가 이같은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쥘 브르동의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밀레의 사회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밀레의 와 달리, 저녁 노을 속 웅장한 전원 풍경 속에서 그 날의 수확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밀레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당시는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기여서, 밀레의 작품들이 마치 민중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투쟁하라고 선동하는 것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유명한 연례 전시회인 살롱전에 전시된 밀레의 그림들은 당시 비평가들의 혹독한 비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레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외딴 농가에까지 밀레의 복제화를 걸어놓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예술품의 주 고객층이었던 부유한 부르주아들은 밀레의 그림들을 구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밀레는 1849년 퐁텐블로 근처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곳에 전원 경치를 중시하는 화가들이 모이게 되어 유명한 바르비종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밀레는 명예도 벗어 던지고 돈을 위해 부자들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으며, 농촌 사회를 한시도 떠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의 작품 세계만을 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