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김연진2006.10.07
조회180

▶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내일은 ‘국민화가’의 50주기 그러나 추모행사·기념전시는 없다
작년 위작시비 이후 이름만 나와도 꺼린다
死後도 쓸쓸한 그 이름, 이중섭 
 

▶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오는 6일은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타계한 지 꼭 50주년이 되는 날. 하지만 이날은 미술인 30여명이 서울 망우리에 있는 이중섭의 묘소를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는 예정된 공식 추모행사가 없다. ‘국민화가’의 50주기이건만 올 한 해 내내 기념전시 한 번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모든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이중섭에서 손을 뗐다. 경매에서도 1년이 넘도록 이중섭 작품은 다루지 않는다. 작년 한 해 미술계를 흔들었던 이중섭 위작 사건의 여파다.“이중섭 50주기는 미술계는 물론 문화관광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인데, 모두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고 있으니 통탄할 일입니다.” 이중섭 연구가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씨의 말이다.


이중섭 위작 사건은 작년 3월 서울옥션에서 거래된 작품 5점 등의 진위(眞僞) 여부를 놓고 관계자들이 맞고소까지 한 사건. 검찰은 해당 작품들에 대해 사실상 위작 판정을 내렸고, 이후 이중섭은 한국 미술계에서 ‘피해야 할 화가’가 돼 버렸다.


미술계에서는 이중섭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고 있다. 이중섭이 전시나 경매에 나오면 십중팔구 진위 시비가 붙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7월 덕수궁미술관 전시 때 나온 이중섭의 ‘물고기와 아이들’(1952~1953)은 감정위원 4명 중 1명이 위작이라고 주장하자 이런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는 “정확한 증거 없이 어느 한 사람이 가짜라고 의견만 내면 선정적으로 다뤄지니, 소장자는 물론 화가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고 말했다. 한 큐레이터는 “이중섭 작품만 등장하면 근거 없이 진위 시비가 붙는 이상한 관행이 생겨서 소장가들이 전시에 작품 내놓기를 꺼리니 전시기획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술시장에서도 이중섭은 사라진 지 오래다. K옥션 김순응 대표는 “과거엔 이중섭의 드로잉이나 수채화도 좋은 것은 억대에 팔렸으니 박수근보다 더 블루칩 화가였는데, 이제는 컬렉터들이 굳이 이중섭 작품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아 시장이 다 죽었다”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김현숙씨는 “이중섭에 대해 너무 작품의 가격과 진위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니 그의 예술적 가치가 얘기되지 않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며 “전시를 하기 어려우면 학술행사라도 해서 이중섭 50주기의 의미를 새겨야 할 텐데 미술계가 너무 소극적이어서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이규현기자 [ kyu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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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50주기

 

▶타계 50주년 이중섭, 다시 죽다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김춘수·내가 만난 이중섭). 피란지 부산에서 이중섭은 물감과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부두 막노동으로 연명했다.

 

그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가에 보내놓고 그리움과 미안함이 담긴 편지를 수없이 띄웠다.

 

▶6·25가 끝나갈 무렵 시인 구상(具常)이 폐결핵으로 쓰러졌다. 원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이중섭이 한참 지나서야 병문안 와서 도화지를 불쑥 내밀었다. 큰 복숭아 속에 아이가 청개구리와 노는 모습을 그린 종이였다. “무슨 병이든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잖아! 그걸 상(常)이 먹고 얼른 나으라고.” 가난한 이중섭에겐 과일 사 올 푼돈마저 없었다.

▶평안도 부잣집 아들 이중섭이 1950년 12월 월남해 처음 몸을 의탁한 곳이 서귀포였다. 네 식구가 몸을 포개야 하는 단칸방이었다. 그는 가족을 먹이기 위해 바다에 나가 게와 물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었다.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했던 서귀포 시절은 그나마 행복했다. ‘황소’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 환상’ 같은 걸작을 그려냈다. 그래서 서귀포시와 조선일보는 해마다 9월이면 ‘이중섭 세미나’를 서귀포에서 연다.

▶오늘 6일 이중섭이 떠난 지 50년 된 날이다. 그러나 변변한 추모행사 하나 없다고 한다. 올해 기념전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이중섭 세미나’가 거의 유일한 행사다. 경매에서도 이중섭 작품은 썰렁한 신세다. 작년 한 해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위작(僞作) 파문 탓이다. 작년 3월 경매시장에 나온 작품에 송사(訟事)가 붙었고 검찰이 이 작품들을 사실상 위작으로 판단하면서 그리 됐다.

▶“내 그림은 모두 가짜야.” 이중섭이 둘둘 만 작품 뭉텅이를 불살라버리라고 후배 김광림에게 줬다. 1955년 첫 개인전을 연 뒤 그림값을 떼어먹혀 낙담하던 끝이었다. 그림을 간수했다 고이 돌려준 시인 김광림은 요즘의 위작논란을 씁쓸해한다. 이중섭은 티없는 세상을 그리며 세속을 불태운 자유인이었다. 걸작을 낳은 창작기는 고난이었고 생의 끝은 적막했어도 훗날은 영광이었다. 다만 얄팍한 세태가 그의 맑고 영원한 예술혼을 지금 잠깐 시샘해보는 것일 뿐이다.


 

           김기철 논설위원 kichul@chosun.com                                       -  조선일보(만물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