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桃花)라는 이름을 얻다

최주희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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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멍!! 멍!! 멍멍!!!!! 멍!! 멍!!!”

“에잉… 저 녀석이 왜 저리 짖어대는 게야!”


화로안의 군밤을 꼬챙이로 벌리려 애를 쓰던 노인.

곁눈질로 힐끔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밖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영감이 잠시 나가 보시구려.” 


온화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쭈그려 앉은 노인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파고들었다.

노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대신 꼬챙이를 쥔 양손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신경질적으로 군밤을 찔러댔다.


목소리의 주인은 노인의 뒤편에 누워있던 노부인.

누덕이불을 한껏 끌어당겨 얼굴은 코까지 파묻힌 채였다.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등짝을 풀질해 붙인 모양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하는 노부인이 마치 군밤이라도 되는 듯, 오늘 죄 없는 군밤부인은 한 시진 동안이나 잔인하게 노란 속살을 유린당하는 중이었다. 참다못한 노인은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 실같이 떴다. 그리곤 부인 쪽을 돌아앉아, 발가락으로 커다란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눌러왔던 불평이 터져 나왔다.


“마눌~ 쫌 일어나 보라고! 도대체 몇 시진 째 누워서만 뒹구는 게야! 가뜩이나 푹 퍼진 엉덩이로 또 부침개 부칠 일 있어?! 뱃살이 오 겹이 된지가 어제 일인데, 그 앞에 육겹님이 인사하고 있네 그려~! 쯧쯧… 걸어 다니는지 굴러다니는지 원…….”


어이쿠!

화들짝 놀라 움찔하는 노인.

미처 투덜거림을 끝맺기도 전에, 자신의 겁 없었던 발가락을 급히 회수했다.

말없이 누워있는 부인의 전신으로 이글거리는 화염을 본 것은 노인만의 착각이었을까?

노인은 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쪽문으로 향했다. 처량하게 꼬리를 축 늘어트린 꼴이 꼭 비 맞은 강아지새끼 모양이다.


“멍멍!! 멍!! 멍멍!!!!! 멍!! 멍!!!”

“저놈의 흰둥이 녀석은 오늘따라 왜 이리 짖어 대고 지랄이야? 눈 손님 처음 보나… 매타작을 해야겠구먼! 끌끌.”


노인은 괜히 애꿎은 흰둥이 녀석에게 화살을 돌렸다.

쪽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화풀이의 도구가 될 꼬챙이를 잊지 않고 손에 쥐어 들었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이나 계속되던 버티기(?)전투에서 승리한 노부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영영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더니, 노인이 자리를 뜨자마자 자세를 바꾸어 돌아누웠다. 푸짐한 부인의 몸집에 화롯불이 일렁거린다.


사실 이 저녁 무렵은, 하루 일과 중 노부인이 가장 사랑하는 찜질 시간이었다. 이미 불구멍을 활짝 열어놓고, 장작을 가득 넣어 방안을 후끈하게 데운 후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아랫목에 허리를 지져주는 시원함(?)은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할멈만의 즐거움이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방안에 군밤이 타들어 가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평온한 저녁이다.

할멈이 막 달콤한 잠을 청하려고 할 때였다.


「단영 !!! 어서 나와 보오!! 어서!!!!」


노부인의 머릿속으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전음이다!

명물인 야호가 예사롭지 않게 짖어 댈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했는데!

전음으로 그가 말하는 것은, 두 사람이 여기 장백산을 보금자리로 선택하고 들어앉은 후 십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의 울림을 털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노부인의 움직임은 예상 외로 매우 날렵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선으로 재빨리 문을 박차고 나섰다.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막 문을 나선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시리도록 하얀빛!

아침에 짓눈개비가 흩날리기는 했지만, 두 시진 사이 흠뻑 함박눈이 쏟아진 모양이었다.

세상이 온통 흰색천지다. 노부인의 깊은 눈동자가 슬픈 빛을 베어 물었다.

이곳에서 매년 한 번씩이니, 그동안 열 번이나 보아왔던 풍경이지만, 그녀는 또다시 그 기억이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이제 무던해 질 때도 되었건만…. 너무 아름다워서, 눈부신 세상이 너무나 서글퍼서 노신(老身)은 잠시 호흡을 멈췄다.

마음을 가다듬은 후, 흰 백지위의 점처럼 굳어있는 낭군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백아! 무슨 일이에요~?!”

“여, 여기......!”

“......”


두근!

단영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노인의 품에 들려있는 자그마한 비단 보자기를 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보자기를 살짝 헤집었다. 그 안에 눈빛처럼 뽀얀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흠칫 놀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눈밭위로는 어떠한 발자국도 없었다. 또한 인기척도 없었다.

이곳 장백산은 중원 내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산.

게다가 여기 천외봉은 누구의 인기척도 닿지 않는 첩첩산중이다. 두 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로 친우들을 제외하고는 근 십여 년간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백아와 단영, 그들의 친우라면 모두 무림의 역사 속에서 전설로 기록될 법한 인물들로, 그런 그들도 몇 해에 한번씩 이 천외봉에 올라오고 나면, 반나절은 힘들다고 투덜거리기 마련인 곳이 바로 여기다. 그런 이곳에, 보자기에 싸여진 채로 버려진 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곧바로 단영은 단전으로 기를 모았다. 분명 아이를 두고 간 사람이 있다면, 방위 환술을 펼쳐보면 그 흔적의 꼬리가 잡힐 터였다.

그때였다.


“소용없네. 내 이미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어.. 우리가 잡을 수 있는 흔적이라면 흰둥이가 짓기 전에 눈치를 챘을 테니. 끌끌...”

“......”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현 무림에, 두 사람의 이목을 동시에 속일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아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이라고 생각한 단영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자, 일단 어찌 되었던 안으로 데리고 들어갑시다. 이 추운 눈발을 맞으며 한 시진은 있었던 것 같으니..어찌하여 얼지 않았을꼬? 아하! 흰둥이 네 녀석이 품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주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야호는 낑낑거리며 노인의 다리에 몸을 비벼댔다.

아이가 놓여있던 자리에 야호의 털이 흩어져 있고 발자국이 지천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랬던 모양이다. 노인 옆에서 뚫어져라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노부인은 아이를 받아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안기자 아기는 붉은 색의 오동통한 조그만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양새가 너무 귀여워, 굳어있던 단영의 입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백옥처럼 뽀얀 피부에 제법 오뚝한 콧날하며 붉은 입술은 마치 작은 인형을 보는 듯 했다.


“아이를 두고 간 이가 사정이 있는 선인이라면, 연유를 대답할 수 있을 때 아이를 찾으러 올 게요. 혹여 하늘이 내린 아이라도 우리의 인연이니, 그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거두어야 할 것 같구려. 우리에게 해가 될 일도 아니고, 그렇다 하더라도 이 작은 생명을 모른 채 버려둘 수 없으니……. 데리고 들어갑시다. 천천히 이름도 짓...”

“도화에요, 이 고운 여자아이의 이름을 도화라고 정하겠어요!!”


노인의 말을 대번에 잘라먹은 노부인은, 혹여나 아기가 추울까 더욱 품에 꼭 끌어안았다.

놀랍게도 뽀얀 아이의 뺨에는 곱고 향기로운 복숭아꽃잎 한 장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 추운 겨울, 그것도 첫눈이 세상을 삼킨 오늘이다.

중원에서 도화(桃花)는 춘삼월이나 되서야 구경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뺨에 놓인 꽃잎은 방금 나무에서 떨어진 듯 아직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단영과 백아는 이 기이한 인연에 대해 쓸데없이 고민하며 시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빠른 결단을 내린 후, 판단의 결과를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지혜로운 이들이었다.


“그래도 아직 여아인지, 남아인지도 모르고 도화는 쫌…….”


노인이 작은 눈을 실룩이며 혼자 중얼거리는 동안, 노부인은 이미 아이를 안고 저만치 앞서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노인은 허둥지둥 부인을 뒤쫓아 따라 들어갔다.


절경의 천외봉에 한 폭의 수묵화 같이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삼키던 날, 아담한 초가집으로 이어지던 두개의 발자국도 서서히 눈에 잠기던 그 시간.

흰둥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명물 야호만이 같이 들어가지 못해 안타깝다는 듯 초가집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해 첫눈 오던 날, 도화는 백야와 단영부부의 소중한 아들이 되었다.

이날 자신의 뺨 위에 붙어 있던 복숭아 꽃잎을 평생 원망해야만 했던 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