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의 원세개 - 서평(조병한 교수)

이양자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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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원세개 - 서평(조병한 교수)

 

〈書 評〉


李陽子,『朝鮮에서의 袁世凱』(신지서원, 2002)


曺秉漢교수(西江大)



怪傑 또는 ‘大盜’라는 좋지 못한 호칭이 붙은 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세개는 중국 근대사에서 부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악명 높은 종래의 역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권모술수에 뛰어난 일세의 수완가로서 청말부터 민국 초년까지 중국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중한 것이었으므로 중국사 연구에서 큰 비중을 갖고 있다.

 

그는 戊戌變法운동과 義和團운동의 진압에 기여한 민족반역자로서 알려져 있고 특히 辛亥년 共和혁명의 성과를 찬탈해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이 되고 皇帝체제를 부활하려다 실패한 공화국의 배신자로서 비난을 받아왔다.

민주적 발전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 위와 같은 발자취는 원세개의 의심할 여지없는 죄증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그가 淮軍 출신의 洋務 관료 인맥을 이어, 張之洞, 盛宣懷 등과 더불어 1900년대 西太后 중심의 新政 개혁의 주요 인물이며 청일전쟁 패전 후 新軍 건설의 중심으로서 공화혁명 시기 최대의 실력자였음은 1910년대 초기 공화 정국에서 그의 주도권 장악이 그리 간단치 않은 역사적 배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같은 원세개의 괄목할 세속적 성공은 1882년 壬午軍亂부터 1894년 청일전쟁까지 10여년간에 걸쳐 조선을 무대로 한 淸왕조의 내정, 외교 간섭활동에서 그가 이룬 ‘공적’에까지 소급된다.

李陽子 교수의 저서,『朝鮮에서의 袁世凱』(2002, 신지서원)는 바로 이 시기 청 北洋대신 李鴻章의 정치적 비호하에 원세개가 조선에서 사실상의 ‘監國대신’으로서 조선의 屬國化를 추진해간 무자비한 활동에 관해, 내정, 외교, 경제 정책 및 海關, 借款, 電信, 汽船 등 각종 근대 사업의 도입 과정에 걸쳐 광범위한 서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목과 같이 조선 주재 시기 원세개의 저서로 끝나지 않고 이 시기 청과 조선 양국간의 관계사를 총체적으로 서술한 연구서라 할 것이다.

 

청일전쟁후 1992년까지 거의 1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간의 국가간 관계가 단절된 동아시아 근대의 역사적 특성으로 인해 개항후 조선과 청의 관계는, 청일전쟁후 한국을 병탄해간 일본 제국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관심을 덜 받게된 결과, 개항후 근대 초기의 역사에서 중국이 조선의 근대화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과소 평가하기 쉬웠다.

 이 책에서 원세개를 중심으로 사실상 이 시기 청의 속국화정책을 전반적으로 다룬 것은 한국사의 소홀히 다루기 쉬운 중요한 영역을 밝힌 것이며, 20세기 말 100년만에 한중관계가 재개되고 중국의 세계사적 지위가 복구되는 시점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에서의 원세개의 활동은 李鴻章의 대외정책 노선을 조선 현지에서 충실히 집행함으로써 이홍장이 대표하는 淸末 洋務운동 후기의 세계인식 및 대외관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가장 유효한 창구가 될 수 있다.

1876년 조선과 일본간의 병자수호조약, 1881년 이래 미국 등 서양과의 수교, 개항 이래 중국의 조선정책의 변천과정은 서구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의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대적 전환의 시작에 따른 양무시기 중국 정권의 새로운 국가인식과 대외반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원세개의 활동에 역점을 둔 이 책에서는 위와 같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대적 개편과정에 대한 더 깊은 분석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李鴻章으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노선의 洋務派와 이에 대항하는 유교 정통주의의 淸流派, 두 정파간의 조선정책의 차별성이 간략히 언급되는 가운데 1885년 이홍장 정책의 조선 현지 집행자로 승진한 원세개는 수완가로서 그의 기민함과 공을 서두르는 야망, 청류파 張건과의 접촉을 통해 단순한 이홍장의 대리인에 머물지 않고 더욱 능동적인 침략성을 드러내 조선의 종속화를 강화하는 ‘공정’을 세운 과정이 이 책 속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근래 국내의 연구동향에서 볼 때, 사실 조선과 중국간의 이른바 전통적 ‘事大’, ‘宗藩’ 관계란 것은 다분히 儀禮的 차원에서 중국 중심 국제질서를 반영한 것으로 각국의 多元的 小中華 관념이 공존하는 특수한 형태의 세계관을 집약한 관념이었다.

따라서 그 관계는 역사 시기와 각국의 사정에 따라 상대적 차별성을 갖기 마련인데,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 제국주의 질서가 새로운 세계질서로서 동아시아를 덮쳐 왔을 때 중국은 전통적인 의례적 ‘사대’관계를 실질적 속국화 정책의 근거로 이용함으로써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내에서 자국의 국가이익을 강화하려 한 것이었다.


이 같은 원세개로 대표되는 청의 조선정책은 당시 국제환경에서 가능한 한도까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확대한 것으로서, 청의 내정 간섭은 1882년 임오군란을 틈탄 청군의 주둔과 大院君 납치 등으로 시작되어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에 의해 원세개와 청군이 추방되기까지 날로 강화되어 조선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내정, 외교, 나아가 근대적 개혁정책의 수행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사정이 이 책 속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물론 1876년 개항 이후 1882년 임오군란까지, 또는 청이 추방된 1895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까지 상대적으로 외세의 압력이 감소했던 小康期에 조선의 高宗, 閔妃 정권과 兩班 지배층이 이 적은 기회나마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없었던 책임은 면할 수 없고, 또 청의 경쟁자로서 자본 축적을 위한 일본 明治정권의 조숙한 조선 침략도 비판받아야 한다.

그렇다 해도 1882년부터 1894년까지 중국의 내정 간섭의 시기는 날로 높아가는 제국주의의 격랑 속에서 조선에게는 짧지만 사실상 자주 개혁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던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황금같은 시기가 유실되는 데 청과 원세개가 상당한 책임이 있음은 이 책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1884년 甲申政變에서 원세개의 능동적 군사 개입으로 反淸 급진 개화파 金玉均 등의 좌절된 데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 책에서 깊이 다루지 않았지만, 비록 조선 개혁파의 취약성을 인정한다해도 사실상 조선 지배층내 소수파의 첫 번째 자주개혁의 기회가 청에 의해 유실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임오군란 직후 1882년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체결은 경제면에서 청의 조선 속국화정책의 출발이었다.

이 책에는 갑신정변 진압의 ‘공적’으로 1885년 조선 내정, 외교를 감시하는 요직에 오른 26세의 젊은 출세주의자 원세개는 이홍장의 속국화 정책의 더욱 적극적 집행으로 조선에서 일본, 서구, 특히 러시아와 대항하는 과정에서 조선 고종 정권의 외교적 자주화, 자립적 내정의 시도를 사사건건 봉쇄해 조선의 國權에 대한 유린을 감행함과 아울러, 조선의 수도 漢城과 內地를 청 商人의 영업에 개방한, 위의 수륙무역장정을 강력히 집행하고 심지어 청 상인의 조선 내지 밀무역까지 지원하는 파렴치한 침탈행위를 자행함으로써 당시 세계 제국주의의 不平等條約에서 전례없는 利權 침탈의 선례를 만들어 열강, 특히 일본이 그 이권의 균점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음이 특히 주목할만 하다.

 

이 책에 서술된 청의 해관 독점, 그리고 전신, 기선 航運을 독점하려는 원세개의 일본과의 경쟁은 조선이 중국 양무운동의 부속품으로 종속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차관 교섭과 歐美에의 외교관 파견을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을 봉쇄한 원세개의 내정 간섭과 경제 침탈, 이에 대한 고종, 민비 정권의 소극적이지만 끈질긴 저항이 이 책에 서술된 것은 이 시기 국권 확립과 근대화 추진의 과제를 둘러싼 위기적 상황을 나타내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원세개가 집행한 淸의 조선 속국화 정책은 1905년 일본의 乙巳保護條約 이전 시기에서는 가장 강도높은 외세 침략의 형태였으며, 젊은 날 조선 침탈에서 ‘공적’을 이룬 원세개는 끝내 청의 國權주의자로서 공화국의 민권을 진압하는 중국사의 역사적 악역도 맡았던 것이다.

 10명의 처첩 중 3명의 조선인 처를 두었다는 원세개의 사생활 지적도 흥미 있지만 이양자 교수의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이 교활한 인물을 통해 근대 초기 한중관계사를 재강조하는 데 기여한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중국사연구』제19집에서 轉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