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의 노래! -수정 합본 1-

김휘광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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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의 노래 !


2평 남짓한 공간에 작은 테이블이 놓여있고 검정가죽 소파에 남루한 차림의 한 노인이 긴 숨을 몰아쉬며, 회상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창문 없는 공간의 형광등은 조금은 바랜 회색 벽에 부딪혀 푸른빛이 감돈다.

노인은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본다. 남루한 옷차림과는 달리 또롯한 눈망울과 다부진 입술은 노인이 결코 녹녹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신념에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몇몇 서류뭉치와 파일이 있고, 컴퓨터의 자판은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두드려 지고 있다. 파일에는 관리번호 [NK-1932. NUREE-CHUN]이 찍혀 있고, 제목에는 [월남 경위조사서]라고 사인펜으로 쓴 듯 날림체로 갈겨 쓰 있다.

단단히 묶여 있는 서류뭉치와는 달리 파일은 이제부터 조사가 시작됨을 알 수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자판에 의해 쓰여 지는 문자가 깜박거리는 커서를 왼편으로 몰아가고 있다.


‘성명 : 천 누리’

‘직위 : 북한공산당 간부(함경북도 집단농장 책임자)’

‘월남경위 : 사랑하는 여인을 쫒아 월북하였다가 김일성체제 유지를 위해 숙청된 그녀의 삶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함. 그녀의 이름은 안성희이며, 무용가 최승희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있음. 그의 아버지는 ...................’


늙은 노인은 아마 당신 자신의 월남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의 분위기로 봐서는 ‘국정원’ 모처의 조사실 인 것 같다.

국민대통령에 의해 정보원이 민주화 되며 나름대로 분위기를 바꾼 듯 보였지만 그래도 그 분위기만큼은 바뀌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테이블의 원통플라스틱 병에 꽂힌 망개꽃과 한 송이 장미가 현재의 변화를 대변하는 듯 했다.

노인은 담배를 끄고는 다시 말을 잊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를 만난 것은.....”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의 한가운데 청년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인간의 처참한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리고 갈가리 찢어진 육신의 파편들과 포탄에 의해 타다만 시신이 있는 전쟁터에서 청년은 미친 듯 그 참혹한 시신들을 뒤지고 있었다.

“성희..., 성희야...”

“성희야~”

유독 인민군의 신음소리만을 쫒아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 다녔다. 간혹 처참한 시신을 보고는 헛구역질을 할 뿐, 특별히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엄청난 포화로 인하여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청년 단 한사람뿐이었다.


최후방까지 밀려난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전폭기와 전함을 이용한 함포사격으로 폭탄들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었다.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하여 한강허리를 자르는 인천상륙작전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고, 인민군은 고립되어 포탄세례를 받아 죽거나 혹은 산으로 도피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는 양상이었다.

낙동강에서 올라오는 국군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를 차단한 한⋅미연합군은 한강을 건너 북으로 진격과 함께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장에서 무엇을 찾고자 청년은 미친 듯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것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월북했다 그곳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안성희’가 북한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인민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종군위문단의 일행이 되어 남으로 진군하는 인민군을 쫒아 위문공연을 하던 중에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강이 봉쇄되고 폭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년은 어린시절 동양의 무희로 조선을 세계에 알린 무용수를 어머니로 둔 어린 소녀와 동무가 되어 그녀의 작은할머니 집에서 소꿉친구로 지냈다. 소녀의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 무용수로 그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공연을 하고 있기에 늘 언제나 작은 외할머니와 쓸쓸히 혼자 지내던 소녀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청년 역시도 좌익의 아버지를 두었고, 어쩌다 밤이 깊어 찾아오는 아버지를 잠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주변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엄마와 함께 종로에서 살고 있었다.

청년의 어린 시절은 일본의 핍박으로 언제나 불안해하는 엄마와 지내기에 일본이 원망스러웠고, 소녀는 일본열도를 열광시키는 춤꾼을 어머니로 둔 관계로 많은 시간을 일본에서 보내야 하는 어머니로 인해 일본이 원망스러웠다.

이 기이한 운명의 어린소년, 소녀는 앞으로 닥쳐 올 삶의 회오리를 모른 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게 되었다.


소년의 가정은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일본 순사에 짓밟혀 풍비박살이 나고 어린 소년을 데리고 야반도주한 어머니만이 유일한 가족이었다. 소년의 어린 가슴에 담긴 아버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앗아간 응어리였다.

그러한 아픔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지내던 중에 어린소녀가 담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땅바닥에 누군지 모를 얼굴을 그리며 혼자 놀고 있는 모습이 왠지 자신의 처량함을 보는 듯하였다. 여덟살 소년과 어린계집아이 성희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 뭐 해?”


“......”


“그게 누구야?”


“응, 엄마랑 아빠랑, 성희야...”

“지금 막 엄마랑 아빠가 집으로 오는 중이야...”


“너, 엄마 아빠 없구나.”

“죽었지, 그렇지?”


소년은 자신의 할아버지 집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을 기억하고 있기에 어린 소녀도 역시 그런 난리를 당하여 부모의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는, 그래서 골목 모퉁이에 앉아 슬픈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

그러나 어린꼬맹이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펴진 것은 일촌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린 소녀는 앙칼지게 고함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동동 굴리며 슬피 울었다.


“아니야!”

“엄마 아빠는 살아있단 말이야.”

“예쁜 성희에게 선물도 보내줬단 말이야”

“아냐! 아냐~”


어린 소녀의 고함이 어찌나 크던지 울음소리를 듣고는 할머니 한분이 골목 안의 대문을 밀치며 달려 나온다. 할머니는 어린 소녀를 달래 주었다.

처음에 소년은 왠지 자신이 울린 것 같아 도망치려 하였으나 토닥이는 자상한 할머니를 보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향에서 엄마에게 생 때를 설 때마다 그렇듯 토닥여 주고 자기의 편을 들어 엄마의 억척스런 손아귀에서 보호해 주곤하신 자신의 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계집아이와 싸움이라도 한 줄 아시는 할머니는 나의 팔을 잡고 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반항할 생각도 없었다. 어린계집아이 ‘성희’는 따라 들어오며 할머니에게 때려주라 이른다.

할머니는 나를 안방으로 들어가며 ‘이놈’하고 호통을 쳤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악의에 차 있지도 않았으며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외손녀를 달래주면서 화해를 시켜 혼자 외톨이가 된 어린 외손녀의 동무가 되어주길 바랬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계집아이가 불쌍하게 보여 말을 걸었던 것뿐인데, 할머니로부터 괜한 오해를 받는 것이 무척 화가 났다. 아니 어쩌면 나의 꿈을 짓밟힌 것 같아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나의 꿈은 장군이 되어 일본 왜놈을 무찔러 고향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아버지가 낮선 사람들과 밤이면 몰래 화톳불을 쬐며 독립이니 뭐니 하는 풍월을 잠든 척 하며 귀 따갑게 들었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꿈인데, 한갓 계집아이와 싸웠다는 오해가 무척 기분이 나쁜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팔을 뿌리치며 반항을 하였다.


“할머니, 나는 계집아이와는 싸우지 않아요.”

“싸우지 않는단 말이에요.”


고함치는 나의 무릎 앞에 할머니는 슬며시 과자상자를 내밀었다.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과자를 앞에 두고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이럴 때 우리 할머니였으면 슬며시 과자를 집어 내 손에 쥐어 주었을 텐데. 나는 오늘따라 할머니가 보고 싶어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성희는 나의 눈가에 맺힌 눈물 조각을 보자 조금은 불쌍해 보였는지, 어쩌면 자기와 비슷한 처지임을 직감했는지 조금은 수그러진 말투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할머니 울 엄마, 아빠 일본에 살아계신다고 말 좀 해줘.”

“엄마, 아빠 성희 만나러 곧 오실 거라 말 좀 해줘, 응?”


성희의 작은할머니는 나를 달래주며, 성희의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성희의 엄마는 춤꾼으로 조선과 일본 열도에서 가장 유명한 무용가이며, 지금 현재 일본에서 순회공연 중이라 어린 성희와는 잠시 해어져 있다는 것이다. 작은할머니는 어린소년인 내게 무슨 얘기를 해 본들 알아들을 수 있을소냐 만은 손녀를 위해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 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위로를 스스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희의 엄마는 현재 일본 열도를 순회공연 중이며, 순회공연이 끝나면 곧바로 영화를 찍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내년에나 조선에 오게 될 것이라 했다. 귀국해도 어린 딸 성희와 함께할 시간은 별로 없다는 말도 곁들이며, 나에게 사이좋게 지내기를 원한다.

성희는 엄마의 이야기에 연신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글거리기 까지 한다.

나는 왠지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나 보다는 그래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함께 있지만 나를 귀여워 해 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찾는 일본 순사의 가혹한 고문에 돌아가시고 나와 함께 밤을 도와 고향을 등진 어머니가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남몰래 쉬는 한숨으로 배게 삼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참았던 슬픔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나마 성희는 떳떳이 부모와 만날 수 있겠지만 내가 아버지를 만난 기억은 깊은 밤 어쩌다 도란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눈 비비며 일어나면 내 머리를 쓱 쓰다듬어 주시며 ‘우리 장군 씩씩하게 자라야 한다. 아버지가 없을 땐 네가 우리 집을 책임지는 거야, 알겠니?’ 하시며, 엄마를 지켜줘야 하고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씀만 하시곤 이내 밤을 쫒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분이 좋아진 성희는 내가 더욱 슬퍼져 눈물을 흘리자 나를 달래려 노력한다.

내 눈에 비친 성희는 고향 앞뜰에 핀 채송화를 닮았다. 참 예쁘고 마음도 착한 것 같다.

성희는 가장 맛이 있을법한 과자를 들어 나에게 먹어보라고 권한다. 나도 모르게 과자를 손으로 덥석 받아 쥐고 입 속으로 넣었다. 물론, 과자도 먹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사내대장부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 싶었다.


“나는 울지 않아.”

“장군은 울지 않는 거야.”


누가 묻지도 않은 답을 혼자서 내뱉고는 과자를 오물거려 먹는다. 난생처음 느껴지는 과자 맛이 너무나 황홀했다. 

언젠가 나의 할머니가 누룽지에 사카린을 섞어 기름에 볶아 주신 군것질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일거라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오늘 먹어보는 이 과자는 꿀보다도 달콤했고 부드럽게 녹아지는 맛이 일품이었다. 하나를 다 먹고 또 다른 과자를 먹으려 손을 내밀며 바라본 과자상자에는 일본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의 손은 과자를 집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나쁜 나라야’

‘일본 사람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헤꼬지 했어’

‘아버지와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나쁜 나라의 과자는 먹을 수 없어’

나는 내 마음속의 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나도 일본의 앞잡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이상 앉아 있지를 못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은 가정의 파탄을 가져온 나라요, 현재의 불행을 가져다 준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성희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연신 과자를 집어주고 먹어라 독려한다. 오랜만에 친구가 생겼고, 할머니를 통해 엄마의 자랑을 마음 것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다행한 것은 성희 스스로 엄마가 자기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내 가족이 아닌 남에게 인정받으므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다. 여느 집처럼 항상 함께 사는 존재도 아니었고, 설령 만날지라도 잠시 잠깐 얼굴을 보고 한번 안아주는 정도에 그치는 엄마 아빠의 행동에서, 어린 성희의 마음은 언젠가는 버림 받을지도 모르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여린 가슴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린 가슴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조국의 슬픔으로 외로움과 그리움을 친구 삼아 언젠가는 붙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에 대한 불안감을 형제처럼 껴안고 사는 나와, 우리 엄마는 날 다리 밑에서 주워 왔을 거라는 생각과 그렇기에 나를 버릴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에 늘 언제나 혼자 고독하고 외로움을 지우기 위해 집밖 골목길에서 언제 올지 모를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혹 엄마 아빠의 모습을 잊어버려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하여 땅바닥에 가족의 모습으로 낙서를 하는 성희와의 만남은 어린 시절 서로에게 너무도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서로 힘이 되어 지낸 어린 시절의 짧은 만남이지만 나에게는 인생을 걸어야 하는 운명 같은 만남이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 한사람 더 늘어난 것이었다.


1937년 어느 날, 성희는 큰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조선을 떠나 일본을 향했다. 작년 성희의 엄마가 조선에 와서 공연을 하면서 어린 성희를 데리고 호텔에서 함께 생활했다. 혼자된 작은할머니는 집에 남아서 몰래 눈물을 훔치는 날이 많아 졌다. 나는 성희가 떠난 빈자리를 대신해 작은할머니를 지켜주고 싶었다. 사나이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껏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내 행동양식이었다.

성희에게는 할머니가 두 분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이상함이나 특별한 의미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내가 소학교를 졸업할 때 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성희의 할아버지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고, 성희의 엄마는 작은할머니가 낳은 자식이라는 것과 성희의 엄마 역시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고향 강원도 홍천 제곡리에서 외롭게 혼자 떨어져 왕할머니의 손에 키워졌다고 하였다.

작은할머니는 당신이 박복하여 딸자식과 외손녀마저도 외롭게 자란다고 한탄을 하곤 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부터는 내가 손주가 되어주고 재롱을 부리는 것이 나의 책무요, 성희를 향한 그리움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나의 돌아가신 할머니의 그리움을 대리 만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작은할머니는 무척 자상하셨고, 사랑이 넘쳤다. 언제나 먹을 것과 학용품을 챙겨 주셨다. 성희는 일본에서도 역시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다고 작은할머니에게 투정어린 편지를 인편에 붙여오곤 했다. 물론 풍족한 학용품과 과자 등을 할머니에게 보내 주곤 하였는데, 아마 내게 직접 보내지 못하고 작은할머니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성희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경성사범학교 입학한 해, 1944년 봄 이었다.

1942년 이른 봄, 작은할머니께 전해진 편지에는 엄마의 조선군사보급회의 운영자금 조성을 위한 초청공연을 수락하여 함께 조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는데, 일본 천황의 부름으로 중국, 몽골, 만주 등의 군부대 위문공연과 겹쳐진 일정으로 인한 성희의 학업에 대한 공백이 너무 커 다음기회로 미루어야겠다는 뒤 늦은 편지는 세라복을 입은 성희를 만나고난 며칠 후 받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무척 세련되어 있었고, 아름다웠다. 내가 항상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려 성희가 어릴적 소꿉장난 시절의 이야기를 건네며 손을 잡을 때면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거릴 수 없어 슬며시 손을 빼기 조차할 정도로 조숙해 있었다. 조선에서 생활하는 학생의 행동과 사뭇 다른 자유분방한 행동에 무척 당황하면서도 싫지가 않았다.

작은할머니를 통해 보내온 사진을 보면서도 실물은 어떠할까 상상하던 모습 그 이상으로 예쁜 모습에 무척 행복했다.

성희는 조선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 장담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아빠로부터 일본의 정세와 심상치 않은 국제변화를 나에게 들려줄 때면 아직 어린 소녀의 깊은 사고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엄마와 아빠가 미국과 유럽을 공연하며 들려준 이야기며, 중국에서의 남경과 북경공연, 상해에서 중국 경극계의 명무가 매란방과의 만남, 중국에서 엄마가 만든 경극초빙위원회 설치 등이 모두 일본의 패망조짐이 보여 일본을 떠나기 위한 준비과정들이라 하였다.

금년 7월에 떠나는 군대 위문공연도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내린 결정이라 하였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기 며칠 전 어느 날, 엄마가 자기를 불러 앉히고는 엄마의 이상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에서 불어 닥칠 불길한 예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아빠도 엄마의 신끼 있는 행위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 결정을 따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지난 유럽 순회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과 독일은 동맹의 관계에 있는 국가였기에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은 유럽의 몇 개국을 돌아 독일의 가장 큰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무용단원 전부를 쉬게 하였다. 당시 매니저 역할을 하고 계신 아빠에게 이상한 꿈과 기운에 대하여 말씀 나누시며 적당한 핑계를 들어 관계자를 설득하게 하셨다. 아빠는 예술가인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여 기꺼이 수고를 하셨다. 그러나 다음날 찾아간 공연장은 폭격을 당해 형체도 없었다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신끼 있는 행동 이외 아빠 나름의 판단도 있었다. 아빠는 일본 몰래 독립지원을 하고 있었고, 해외공연을 통해 일본의 불리한 정세와 어쩌면 일본 본토도 안전치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기에 그날의 이야기는 사뭇 진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동경 스키나미쿠 에이 후쿠조 자택을 급히 매각하고 일본의 큰 짐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처분하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일본은 가지 않을 것이고 나와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라 조잘거렸다.

성희 엄마의 신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들어맞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고, 그녀의 집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만약 성희가 일본에 있었더라면 아마 그 참혹한 현실의 중앙에서 공중분해 되는 엄청난 불행을 겪었을 것이다. 설령 불행을 피했다 하더라도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보며 평생을 불행하게 지냈을 것이다.


1944년 7월, 성희의 엄마와 아빠가 군 위문 공연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자 성희는 큰할머니를 어렵게 설득하여 엄마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을 작은할머니와 함께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성희는 나에게 당장 함께 갈 것을 종용하였지만, 며칠 지나지 않으면 곧 방학을 맞이할 것인데, 지금 당장 함께 가기는 어렵다고 설득하였다.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지금까지 부모와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 언제나 공연과 공연준비로 바쁜 엄마 아빠의 일정은 어린 성희를 항상 외롭게 만들었다.

나에게 보내온 많은 외로운 날의 파편들이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성희의 생일에 보내온 눈물범벅이 된 편지와 심한 감기에 몸살을 앓아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병상에서 보내온 외로움의 편지 ..., 어릴적부터 혹독한 무용훈련으로 어리광 피우지 못했던 어린 계집의 슬픈 이야기는 나에게 보호본능을 유발했고, 바쁜 부모의 애정결핍으로 받는 상처는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랑으로 발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 그녀의 막무가내는 역시 통하였다. 외롭고 쓸쓸한 그녀의 맺힌 눈물방울은 나에게는 무거운 바위가 심장을 짓누르는 고통이요, 사랑스런 그녀의 애살스런 어리광은 하늘의 별이 하나도 없는 슬픈 밤이 될지라도 모두 따 주고 싶은 애절함으로 내 가슴을 녹였다.

나는 나의 어머님을 설득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언제나 나의 행동과 판단을 믿으시고 대견해 하시는 어머님을 거짓으로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작은할머니를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였다.


작은할머니는 나에게는 친할머니와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고, 어머니에게도 친정어머니와도 같은 존재가 된지도 여러 해 되었다.

아버님의 비정기적인 생활비로는 나의 학비는커녕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어려울 때 마다 작은할머니는 나의 집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슬며시 학비와 생활비를 두고 가시며, 마치 날 보러 온 냥 능청스레 내 방에서 웃음꽃을 피우시다 가신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내가 이만큼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작은할머니의 도움덕택이리라.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작은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것에는 나름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인연이 쌓이면 필연이 되고, 숙명적 운명이 된다고 했던가, 내가 한번은 어머니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외롭게 혼자 놀고 있는 조선의 조그만 계집아이를 일본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을 보고는 마치 지난날 성희 같아 참지 못하고 혼을 내 주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어머니께서는 매를 치시며 일본아이의 부모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라고 하셨다. 나는 잘못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로써 이 조선의 장군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 큰 인물이 될 것인데, 그 같은 일이 또 있다면 역시 참지 못하고 혼내 줄 것이기에 잘못을 시인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할머니 댁으로 도망쳐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었다. 이날 늦은 저녁에 어머니께서 작은할머니 댁에 찾아 왔던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작은할머니와 몇 말씀 나누시고는 그냥 돌아가셨다. 나는 궁금하여 작은할머니께로 엉금엉금 기어가 무릎을 베고 누워 얘기해 주기를 기다렸다.


“너희 아버지가 오셨다는구나.”


나는 화들짝 놀라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일본 순사가 우리 집을 기웃거리고 일본이 대동아공영이니 하며,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조선의 신체 건강한 형들을 무조건 학도병으로 끌고 가는 불안한 시절에 왜 하필 왔는지 무척 걱정이 되었다.


“요 녀석, 아버지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구나?”

“그래, 방법은 다르지만 너희 애비나 성희애비나 모두 다 훌륭한 일을 하시지...”


작은할머니는 어머니가 오신 것은 요사이 종로가 시끄러우니 ‘누리애비’를 며칠만 작은할머니 댁에서 지내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성희네는 친일파로 인식되어 온 터라 군인과 경찰과도 친하고 교분이 두터워 일본순사의 감시도 없을뿐더러 일본의 황실과도 교분이 있어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도 어수선한 시기에 오신 아버님이 무척 걱정이 되신 모양이었다. 내가 작은할머니 집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어머니조차 부탁하러 오신 것을 보면 무척 불안했던 모양이다.

아버님과 함께 오신 어머니는 오래 계시지 못하셨지만, 이날 우리 가족의 상봉과 작은할머니와의 만남으로 우리는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다. 아버님과 성희의 아빠는 같은 프롤레타리아 계열로써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성희아빠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만 사실은 많은 독립군자금을 확보하는 어려운 중책을 맞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은할머니는 우리아빠와 성희아빠가 모두 다 훌륭한 일을 하신다고 했던 것이다. 나는 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