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몇 가지 사건을 접하면서,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고, 행인들을 관찰하면서 느끼게 된 그들(나도 포함될)의 문제점을 통렬히 꼬집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아니, 주체할 수 없이 잘난척이 하고 싶어져서, 이 글을 쓴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하면 어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어떤이는 소름이 끼칠만큼 독특하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적이건, 독특하건간에 이들중 대다수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데-그것이 어떤 종류의 갈증이든 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시달리고 있는 '갈증'의 원인에 대해서 도무지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에 갈증이 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무언가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적신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저를 괴롭히는 그 공허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된 '갈증'이라는 것 자체를 지각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니, 이들은 끊임 없는 공허와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제 인생의 문제점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식으로 해결되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안착되고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또 동시에 그에 천착하고 만족하려고 노력해보아도, 그 타는 목마름이 그들의 평안하고 안락한 삶에 달라붙어 끊임 없이 그들에게 술을 권하고 탈선을 권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마름에 시달려 생겨난 '불만'이라고 하는 놈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하고 조용한 일상의 가치를 결코 인정하지 못하고, 그 평안과 고요가 권태와 무기력으로 느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갈증은 우리 삶에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 중 하나로 근래에 화두가 되고 있는 '불륜'의 문제를 집어보자. 물론, 이 문제는 결혼하지 않는 내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 군상의 행태로 관찰해 볼 수는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불륜'이라는 화제는 이미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적인 이슈로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우선, 불륜에 빠져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만이 아니라는 점은 특기 할만다. 그들은 소위 '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갖는 것에 오히려 더 만족감을 느끼고, 또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그들이 꿈꾸는 것은 단지 '쾌락'이 아니라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당연히 '애인'과 의 '로맨스'를 거쳐 결혼했을 것으로 사료되어야 하는 그들이, 왜 그토록 '애인'과의 '로맨스' 갖기를 열망하게 되었는가.
이유는, 아마도 그들은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거나,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일상이라는 괴물 앞에서 그 사랑이 여지 없이 녹아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참 슬픈일이다. 그러면, 우선, 그들은 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결혼을 일종의 통과 의례로 여겨서 나이가 차자 '적당한 것으로 사료되는' 사람과 '적당히' 결혼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결혼을 '사회적 계약' 관계로 파악하여 애시당초 결혼의 요건에 '사랑' 따위를 포함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해보지도 않은 인간형들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들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결혼했으나 일상 앞에 그 사랑이 무너진 경우, 이것은 어쩌면 그들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상대방이 아니라, 그들의 '판타지'였는지도 모른다. 즉,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 여러가지 경우의 수의 바탕에 깔려있는 거대한 명제 하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불륜 따위에 빠저 '로맨스'를 갈구하게 될 가능성은 없거나 매우 적다는 것.'
즉, 불륜을 예방(?)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과 결혼할 것.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스를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미래를 공유할 것.' 이란 결론을 얻게 된다. (물론, 사랑이 변질되거나, 인간성이 변질되는 등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진정 상대를 배려한다면, 아마도 이런 문제는 셋이 아니라 '둘'이서 해결하려 들것이기 때문에, 나는 우선 사랑의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 이 가능성은 묵인하도록 하겠다.)
자, 그러면, 대한 민국 기혼자의 50%이상이 불륜중이거나, 불륜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두었다는 충격적인 통계 수치는 근본적으로 그 통계 범위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 명제에 벗어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난다.
또, 그러면, 그들은 왜 '결혼'이라는 거사를 치루면서, 왜 저런 근본적인 고찰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결혼을 '욕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율배반적으로 '결혼' 그 자체만을 욕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원치 않는데 나이가 차서 그저 결혼을 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나이가 찼는데도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너무 조바심을 친 나머지 쫓기는 결혼을 하면서도, 이것이 내가 진정 욕망하는 것인가 고찰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경제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결혼'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든가 간에, 나는 결혼이라는 중대한 계약의 바탕이 되는 성사 요건은 '사랑'이라고 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거대하며, 본질적인 문제 제기다. 내게 '왠 이상주의'냐고 핀잔을 줄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무척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다. 왜냐하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내가 상대방을 닮은 아이를 낳고 그와의 슬하에서 성장시켜 이 사회를 이루게 될 다음 세대를 이루는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사랑'이 '역사'를 이루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낳게 될 아이가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라면, 제대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나는 그의 가정으로 편입되어 그가 내 앞에 있게해 준 모든 가족 구성원을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근원에 대해서 그 만큼의 애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말이다. 상대방도 나의 근원에 대해서 경외감을 갖고 애정을 쏟고 배려해야 하는데,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매일 살을 부대끼고 살아야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저렇게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어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도 동등히 적용되는 문제다. 당신과 상대를 반반씩 닮은 아이를 기르게 될텐데,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서 비롯된 제 아이가 어찌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비롯된 제 씨앗만 하겠는가 말이다.
애시당초,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면, 사랑의 근원에 대해서 물었다면, 결코 사랑없이 결혼하리라는 '야망'따위는 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데, 결혼과 같은 거대한 현실에 가져다 붙이냐는 반론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사료되는 '감정의 널뜀'이 부질 없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인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며, 폭 넓은 이상의 공유고, 그를 바탕으로 한 무한한 애정과 용납이다.
결혼한 상대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며,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와(그녀와) 제 삶의 이상을 공유하며, 그를 바탕으로 한 공고한 애정을 갖고 상대를 용납해 준다면, 어찌 그 공동체에 균열이 생겨서 타는 목마름(그러니까 일종의 애정결핍)을 갖고 신기루 같은 '로맨스'를 찾아서 캬바레나 전전하게 되는 결과가 나오겠는가 말이다.
결혼을 욕망하려면, 근본적인 사랑부터 욕망했어야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난 뒤에야, 사랑하는 상대와의 미래를 욕망했어야 옳다.
시작부터 그들은 제 삶에서 제가 무엇을 정확히 원하는지 알지 못했던 자들이다. 결혼해서 '안정'만을 찾으려고 생각했다면, 제가 얻은 안정에 만족해야하고, 결혼해서 '공동체'를 원했다고 하면 죽도록 제 공동체를 지켜낼 일이다.
그러나, 아무 방향성도 없이, 제가 무엇을 원하는 가에 대해서 일말의 고찰도 없이, 때되서 결혼하고, 결혼해보니 공허하고, 마누라나 남편의 애정이 얄팍해서 쓸쓸한 맘이 드니까 캬바레나 전전하고, 골프 강사의 미끈한 몸매에 발정이나서 그들과의 달콤한 로맨스나 꿈꾸며 일상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제 욕망에 대해서 고찰하지도 않고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의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래서, 갈증이 인생의 습도를 빨아먹어 부서지게 바삭바삭해지거나, 혹은, 좌절된 욕망이 누적되어 내면에 습기가 쪄들어 눅눅해지지 않고, 항상 신선하고 동력에 넘치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결정하고, 전략을 세워서, 적당한 속도로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파악하고 정확히 추구하는 사람에게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돈을 욕망하는지, 사랑을 욕망하는지, 명예를 욕망하는지, 그리고, 그런 욕망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것을 욕망하는지, 그 욕망을 얻고 나면 그것에 내게 어떤 효용이 있는 것인지 제대로 고찰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공허에 시달리고 목마름에 말라죽지 않는다. 부질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사막의 신기루를 따라 걷는 것과 같고, 비껴나간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잠시의 달콤함이 지나고나면 더 큰 갈증이 덮쳐와 결국은 탈진해, 사막 한가운데서, 혹은 망망대해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자, 뒤돌아 생각해보라.
당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욕망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를 실현할 치밀한 계획을 세워보고, 그를 좇아 뛸 치열한 열정을 쟁여두어야 목마름에 죽지 않는다.
제 욕망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한, 제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이해조차 못하는 한, 몸으로 파고드는 권태와 가슴을 쥐어짜는 갈증에 시달리다 세월에 마모되어가는 당신의 육신과 더불어 당신의 영혼도 그렇게 메말라 스러져갈 것이 틀림없다.
욕망에 대한 고찰
근래 들어 몇 가지 사건을 접하면서,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리고,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고, 행인들을 관찰하면서 느끼게 된 그들(나도 포함될)의 문제점을 통렬히 꼬집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아니, 주체할 수 없이 잘난척이 하고 싶어져서, 이 글을 쓴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아하면 어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어떤이는 소름이 끼칠만큼 독특하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적이건, 독특하건간에 이들중 대다수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데-그것이 어떤 종류의 갈증이든 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들이 시달리고 있는 '갈증'의 원인에 대해서 도무지 고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삶에 갈증이 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무언가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적신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저를 괴롭히는 그 공허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된 '갈증'이라는 것 자체를 지각하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니, 이들은 끊임 없는 공허와 목마름에 시달리면서도 제 인생의 문제점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떤 식으로 해결되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아무리, 안착되고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또 동시에 그에 천착하고 만족하려고 노력해보아도, 그 타는 목마름이 그들의 평안하고 안락한 삶에 달라붙어 끊임 없이 그들에게 술을 권하고 탈선을 권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마름에 시달려 생겨난 '불만'이라고 하는 놈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평안하고 조용한 일상의 가치를 결코 인정하지 못하고, 그 평안과 고요가 권태와 무기력으로 느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갈증은 우리 삶에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 중 하나로 근래에 화두가 되고 있는 '불륜'의 문제를 집어보자. 물론, 이 문제는 결혼하지 않는 내가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간 군상의 행태로 관찰해 볼 수는 있는 문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불륜'이라는 화제는 이미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사회적인 이슈로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우선, 불륜에 빠져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만이 아니라는 점은 특기 할만다. 그들은 소위 '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갖는 것에 오히려 더 만족감을 느끼고, 또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그들이 꿈꾸는 것은 단지 '쾌락'이 아니라 '로맨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당연히 '애인'과 의 '로맨스'를 거쳐 결혼했을 것으로 사료되어야 하는 그들이, 왜 그토록 '애인'과의 '로맨스' 갖기를 열망하게 되었는가.
이유는, 아마도 그들은 처음부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거나,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일상이라는 괴물 앞에서 그 사랑이 여지 없이 녹아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은 참 슬픈일이다. 그러면, 우선, 그들은 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들은 결혼을 일종의 통과 의례로 여겨서 나이가 차자 '적당한 것으로 사료되는' 사람과 '적당히' 결혼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결혼을 '사회적 계약' 관계로 파악하여 애시당초 결혼의 요건에 '사랑' 따위를 포함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찰해보지도 않은 인간형들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들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결혼했으나 일상 앞에 그 사랑이 무너진 경우, 이것은 어쩌면 그들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상대방이 아니라, 그들의 '판타지'였는지도 모른다. 즉,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 여러가지 경우의 수의 바탕에 깔려있는 거대한 명제 하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불륜 따위에 빠저 '로맨스'를 갈구하게 될 가능성은 없거나 매우 적다는 것.'
즉, 불륜을 예방(?)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과 결혼할 것.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스를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미래를 공유할 것.' 이란 결론을 얻게 된다. (물론, 사랑이 변질되거나, 인간성이 변질되는 등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진정 상대를 배려한다면, 아마도 이런 문제는 셋이 아니라 '둘'이서 해결하려 들것이기 때문에, 나는 우선 사랑의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 이 가능성은 묵인하도록 하겠다.)
자, 그러면, 대한 민국 기혼자의 50%이상이 불륜중이거나, 불륜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두었다는 충격적인 통계 수치는 근본적으로 그 통계 범위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 명제에 벗어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난다.
또, 그러면, 그들은 왜 '결혼'이라는 거사를 치루면서, 왜 저런 근본적인 고찰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결혼을 '욕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이율배반적으로 '결혼' 그 자체만을 욕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하면, 원치 않는데 나이가 차서 그저 결혼을 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나이가 찼는데도 남들 다하는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너무 조바심을 친 나머지 쫓기는 결혼을 하면서도, 이것이 내가 진정 욕망하는 것인가 고찰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경제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결혼'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든가 간에, 나는 결혼이라는 중대한 계약의 바탕이 되는 성사 요건은 '사랑'이라고 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거대하며, 본질적인 문제 제기다. 내게 '왠 이상주의'냐고 핀잔을 줄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무척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근본적인 문제다. 왜냐하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내가 상대방을 닮은 아이를 낳고 그와의 슬하에서 성장시켜 이 사회를 이루게 될 다음 세대를 이루는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의 '사랑'이 '역사'를 이루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낳게 될 아이가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라면, 제대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또한, 나는 그의 가정으로 편입되어 그가 내 앞에 있게해 준 모든 가족 구성원을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데,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근원에 대해서 그 만큼의 애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말이다. 상대방도 나의 근원에 대해서 경외감을 갖고 애정을 쏟고 배려해야 하는데,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매일 살을 부대끼고 살아야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저렇게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어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함께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도 동등히 적용되는 문제다. 당신과 상대를 반반씩 닮은 아이를 기르게 될텐데,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서 비롯된 제 아이가 어찌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비롯된 제 씨앗만 하겠는가 말이다.
애시당초,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면, 사랑의 근원에 대해서 물었다면, 결코 사랑없이 결혼하리라는 '야망'따위는 품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데, 결혼과 같은 거대한 현실에 가져다 붙이냐는 반론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고 사료되는 '감정의 널뜀'이 부질 없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근원적인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며, 폭 넓은 이상의 공유고, 그를 바탕으로 한 무한한 애정과 용납이다.
결혼한 상대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며,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와(그녀와) 제 삶의 이상을 공유하며, 그를 바탕으로 한 공고한 애정을 갖고 상대를 용납해 준다면, 어찌 그 공동체에 균열이 생겨서 타는 목마름(그러니까 일종의 애정결핍)을 갖고 신기루 같은 '로맨스'를 찾아서 캬바레나 전전하게 되는 결과가 나오겠는가 말이다.
결혼을 욕망하려면, 근본적인 사랑부터 욕망했어야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고 난 뒤에야, 사랑하는 상대와의 미래를 욕망했어야 옳다.
시작부터 그들은 제 삶에서 제가 무엇을 정확히 원하는지 알지 못했던 자들이다. 결혼해서 '안정'만을 찾으려고 생각했다면, 제가 얻은 안정에 만족해야하고, 결혼해서 '공동체'를 원했다고 하면 죽도록 제 공동체를 지켜낼 일이다.
그러나, 아무 방향성도 없이, 제가 무엇을 원하는 가에 대해서 일말의 고찰도 없이, 때되서 결혼하고, 결혼해보니 공허하고, 마누라나 남편의 애정이 얄팍해서 쓸쓸한 맘이 드니까 캬바레나 전전하고, 골프 강사의 미끈한 몸매에 발정이나서 그들과의 달콤한 로맨스나 꿈꾸며 일상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사실 제 욕망에 대해서 고찰하지도 않고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의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래서, 갈증이 인생의 습도를 빨아먹어 부서지게 바삭바삭해지거나, 혹은, 좌절된 욕망이 누적되어 내면에 습기가 쪄들어 눅눅해지지 않고, 항상 신선하고 동력에 넘치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결정하고, 전략을 세워서, 적당한 속도로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파악하고 정확히 추구하는 사람에게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돈을 욕망하는지, 사랑을 욕망하는지, 명예를 욕망하는지, 그리고, 그런 욕망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것을 욕망하는지, 그 욕망을 얻고 나면 그것에 내게 어떤 효용이 있는 것인지 제대로 고찰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공허에 시달리고 목마름에 말라죽지 않는다. 부질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사막의 신기루를 따라 걷는 것과 같고, 비껴나간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잠시의 달콤함이 지나고나면 더 큰 갈증이 덮쳐와 결국은 탈진해, 사막 한가운데서, 혹은 망망대해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자, 뒤돌아 생각해보라.
당신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욕망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를 실현할 치밀한 계획을 세워보고, 그를 좇아 뛸 치열한 열정을 쟁여두어야 목마름에 죽지 않는다.
제 욕망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한, 제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이해조차 못하는 한, 몸으로 파고드는 권태와 가슴을 쥐어짜는 갈증에 시달리다 세월에 마모되어가는 당신의 육신과 더불어 당신의 영혼도 그렇게 메말라 스러져갈 것이 틀림없다.
건강하게 욕망하고, 정당하게 추구하라.
바르게 추구되는 모든 욕망은 실현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