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이 말하는 인간 육영수

이성도200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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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이 말하는 인간 육영수   글 김두영(전 청와대 부속실 행정관) 1991년 가정조선 8월호에서 전제   가족대신 지만씨 신병 인수해

내가 공직에 있던 지난 89년 2월 하순 어느날 오후였다. 서울지방 검찰청의 박광빈 검사라는 분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 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히로뽕 흡입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 조사가 다 끝났으니 신병을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차를 타고 오라는 곳으로 찾아가는 동안 갖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 짓을 했을까... 2월 하순이라고 하지만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소매깃의 바람이 차가웠다.

서초동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건물 지하실에 마약 단속반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 앞에는 벌써 신문사 차가 서너 대 와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표정한 수사관들이 대여섯 명 책상앞에 앉아 있었고 지만씨가 한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핼쓱한 얼굴에 초라하고 풀죽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만씨와 눈이 마주치자 울컥 목이 메어 와 아무말도 못하고 말았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 검사라는 분이 전후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만 씨가 자술 해 왔고 또 모든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뉘우치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병인수인으로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나를 부르게 된 것은 지만씨의 요청 때문이었노라고 했다. 신병인수서에 도장을 찍어 주고 지만 씨를 데리고 나왔다.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다 같겠지만 만약 박 대통령 내외분이 살아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떠했을까. 5월 16일 새벽, 혁명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됐다는 보고를 들은 박정희 장군 눈앞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세 살배기 지만군의 얼굴이었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쏟았던 육 여사는 아마 그 참담한 심경을 필설로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검찰에서 풀려나온 며칠 후에 지만 씨에게 내가 “왜 그런 것에 손을 댔느냐”고 물었더니 지만 씨는 “그 동안 너무 괴롭고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나면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 29주년 경축식장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지 어언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민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 그날의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득히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육 여사,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는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청와대 야당’으로서의 육 여사는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 남아 있다.     육 여사의 결벽으로 인한 감사패 소동   육 여사를 알게 된 것은 1968년 경 이었지만 내가 청와대 비서로 발탁되어 일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71년 9월이었다. 첫 출근을 한 다음날 느닷없이 김정렴 비서실장이 비서실 전 직원에게 보내는 지시 공문을 받았다. 내용은 비서실 직원은 누구나 막론하고 청와대 문구류나 기타 용품 등을 절대로 사적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지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육 여사가 첫 출근한 나에게 주고 싶은 주의 사항이었지만 혹 내 자존심이라도 건드릴까봐 김 실장을 통해 전직원에게 알리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 다음해 어느 날 배문 중학에 다니던 지만 군이 나에게 연습장으로 쓰게 종이 몇 장을 달라고 해 무심코 내 책상 위에 있던 갱지를 30여장 집어 주었다. 지만 군이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다가 육 여사와 마주쳤다. 육 여사는 그 종이를 되 받아 나에게 돌려주며 나와 지만 군을 함께 나무랐다. 사무실 용품을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집어다 써도 안되지만 더구나 갱지를 연습장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파기하는 서류 가운데서 한쪽만 인쇄된 종이를 모아 연습장으로 묶어 아들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 내외분의 근검절약 정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분은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을 아껴쓰는 철저한 수범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에 침실에 있는 변기 물통에서 물을 아껴쓰기 위해 넣어둔 두개의 벽돌을 발견하고는 그 방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내가 1975년 10월 부속실을 떠나 공보비서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 대통령이 그 동안 수고 했다는 뜻으로 나에게 약간의 위로금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1975년 10월 22일 박정희’라고 자필로 쓴 메모지를 봉투에 함께 넣어 주었다. 그런데 그 메모지 우측 상단에는 ‘1974년 월 일’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74년에 쓰다 남은 메모용지를 버리지 않고 75년 10월에도 계속 썼던 것이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육 여사가 새옷을 입으면 많은 여성들에게 같은 옷감이라도 더 고급스러워 보이거나 외국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를 방문하는 여성 가운데는 간 혹 육 여사에게 옷감 제조 회사를 묻거나 심지어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서 옷감을 만져보는 여성들도 있었다.

육 여사는 천성적으로 결벽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 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꺼림직하거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밝히고 넘어가는 성미였다.

1970년 7월 25일 남산 어린이 회관 개관식 때의 일이었다.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장과 어린이 대표들이 초청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어린이 회관 건축에 협조한 20여 명에게 육 여사가 직접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던 내가 감사패 문안을 읽고 육영재단 상임이사 였던 정모씨가 감사패를 육여사에게 넘겨줬다. 그런데 감사패를 잘못 집어서 받을 사람과 감사패의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그냥 전달했으면 식이 끝나고나서 서로 바꾸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육 여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르다고 정 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황한 정 이사가 이것저것 감사패를 찾느라 마구 건드려 놓는 바람에 계속 감사패 이름과 사람이 틀려 나갔고 차곡차곡 쌓아둔 감사패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식장 안에 있던 어린이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KBS TV가 그 행사를 중계했으니 개관 첫날 어린이 회관은 크게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