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그너와 어머니 요한네 로지네 바그너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 지 정확하게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당시 알려진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한다. 그래서 바그너의 어린 시절은 예술계에서 활동을 하였던 계부 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계부 가이어도 일찍이 1821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며 그 이후 바그너의 가족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감명을 받으며, 자신도 지휘자가 되고 싶어 한다. 바그너는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3세의 나이로 호프만(E.T.A. Hoffmann)과 셰익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그 결과 김나지움 학창시절(1828부터 라이프치히의 김나지움을 다님)에 로이발트(Leubald)라는 드라마를 만든다. 물론 이시기에 나타나는 바그너의 작품들은 아직 천재성이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이러한 그의 어설픈 어린 시절의 작품들은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계속 작업되어 끝을 맺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다(바그너의 주요작품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거의 26년에 걸쳐 완성된다). 끈기와 인내로서 노력한 몇 년의 세월들은 바그너를 능력있는 예술가로서 승격시킨다. 그러나 바그너는 김나지움의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1830년 부활절을 기하여 니콜라이 학교를 떠나게 되며, 그 이후 1831년 2월까지 토마스 학교에 다시 편입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결국 대학 입학시험도 보지 못한 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대학에 지원을 시도해 본다. 다행이도 바그너는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않고도 그 대학에서 음악학도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게 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등록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특히 바그너는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테오도르 바인리크의 제자가 된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한 첫 오페라《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낭만적 오페라《요정 Die Feen 1833-1834, Würzburg》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코믹오페라《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4-1836, Magdeburg》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바그너는 1836년 11월에 여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이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으로 향하고, 비극적 그랜드오페라《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이 때부터 이들은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된다. 플라너와 결혼은 불행하게 끝나고,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문학적,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된다. 미완성이던《리엔치 Rienzi 1838-1840, Riga/Paris》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를 작곡한다. 1842년《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1843년 1월 2일에 그의 지휘로《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자마자 바그너는 그 해 2월부터 1849년까지 드레스덴의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는 바그너가 절정기에 도달하는 낭만적 오페라를 작곡한 때인데, 즉《탄호이저 Tannhäuser 1842-1845》와《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이 그것이다. 1846년 4월,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제9번 교향곡》을 바그너가 처음으로 지휘하기도 하는데, 베토벤에 대한 바그너의 존경심과 그의 음악적인 영향은 훗날에까지 계속된다. 1849년 36세때 드레스덴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1849년~1858년)을 하게 된다. 1850년 8월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낭만적 오페라의 대표작인《로엔그린 Lohengrin》이 초연되고, 1852년에는 취리히 망명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Wesendonk)부인 마틸데(Mathilde)와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베젠동크가곡집》으로 작곡하게 되는데, 이 가곡들은 불멸의 음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 1849)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를 비롯한 많은 저서들과 연속 4부작 시리즈《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 속하는《라인의 황금(Das Rheingold)》과《발퀴레(Die Walküre)》등의 음악극(Musikdrama)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기존의 낭만적 오페라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의미한다. 1853년에는 바그너가 취리히에서 그 유명한 5월의 콘서트를 갖게 되는가 하면 런던에서는 8개의 연주회를 갖기도 한다. 리스트의 방문은 물론이고, 1857년에는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뷜로우(Hans von Bülow)가 결혼 기념여행으로 부인 코지마(Cosima: 리스트의 딸,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후에 함께 생활하게 된다)와 함께 방문을 한다. 취리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바그너는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베네치아, 루체른,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 1859년에는 불멸의 음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57-1859》이 완성되며 1861년에는《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트리스탄과 이졸데》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4년 5월,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그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아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1861-1867》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전처 미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크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지크프리트의 목가 Siegfried Idyll》을 작곡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각각 1869년과 1870년에 뮌헨에서 초연된다. 1872년부터는 스위스 지역을 떠나 독일 바이로이트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바그너의 59살의 생일을 기념하여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1876년 4년만에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를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리히터(H. Richter)의 지휘로 대규모의 악극《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종교적인 성격의《파르지팔 Parsifal 1877-1882》인데 이 작품도 1882년에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며 그리고 그곳에서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에 있는 하우스 반프리드(Haus Wahnfried)의 정원에 묻혀있다.
◎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손수 쓴 것은 아마도 그의 악극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많은 음악론도 집필했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체예술(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시·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 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하여야 하고, 음악 스스로가 규정적(規定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 이와 같은 그의 예술론은 주로《로엔그린》이후《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기까지의 창작활동 중지기간에 씌어졌다. 이 예술론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중의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① 극의 전개와 심화에 관현악을 참가시키기 위하여 도입동기(導入動機)를 유효적절하게 썼다.
② 무한선율(無限旋律)이라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양식에 의하여 음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 극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③ 화성의 표현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대담한 반음계적 사용으로 음의 조성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④ 관현악 구성은 대규모화하여 표현의 폭의 넓이와 섬세함에는 종전의 낭만파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로서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많은 예술론을 저술하여《독일음악론 Über Deutsches Musikwesen》(1840),《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1849),《미래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1850),《오페라의 사명에 대하여 Über die Bestinnung der Oper》(1871),《오페라와 희곡 Oper und Drama》(1851),《독일예술과 독일정치 Deutsche Kunst und Deutsche Politik》(18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Tannhauser》Manuscript 1845. Trumpet 2 part
*~* 루트비히 2세의 예술 열정 *~*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왕인 루트비히 2세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였으며, 성장하면서부터는 시와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심취하였다. 또한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이 직접 성을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루트비히는 아직 왕세자였던 1861년에 오페라《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 바그너가 그의 대표작《탄호이저》의 흥행에 실패하여 지독한 곤궁 속에 빠져 있을 때, 루트비히는 바그너가 음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와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의 슬픈 전설에 푹 빠져 있었던 루트비히는 부왕의 성인 호엔슈반가우성에 있는 많은 벽화들을 보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으며, 후에 노이슈반슈타인성에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는《로엔그린》에 등장하는 백조를 좋아하여 성 안의 문고리는 모두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벽화와 커튼의 장식에도 역시 수많은 백조가 그려져 있다. 또한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 내부를 바그너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배경을 그린 벽화로 장식하였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지팔》과《로엔그린》의 장면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오페라《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나머지 방들도《트리스탄과 이졸데》와《니벨룽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들을 모티프로 한 회화들로 가득 차 있다.
바그너 (1813~1883)♪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5.22 ~ 1883.2.13)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그너와 어머니 요한네 로지네 바그너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 지 정확하게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당시 알려진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을 한다. 그래서 바그너의 어린 시절은 예술계에서 활동을 하였던 계부 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계부 가이어도 일찍이 1821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며 그 이후 바그너의 가족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감명을 받으며, 자신도 지휘자가 되고 싶어 한다. 바그너는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3세의 나이로 호프만(E.T.A. Hoffmann)과 셰익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그 결과 김나지움 학창시절(1828부터 라이프치히의 김나지움을 다님)에 로이발트(Leubald)라는 드라마를 만든다. 물론 이시기에 나타나는 바그너의 작품들은 아직 천재성이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이러한 그의 어설픈 어린 시절의 작품들은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계속 작업되어 끝을 맺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다(바그너의 주요작품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거의 26년에 걸쳐 완성된다). 끈기와 인내로서 노력한 몇 년의 세월들은 바그너를 능력있는 예술가로서 승격시킨다. 그러나 바그너는 김나지움의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1830년 부활절을 기하여 니콜라이 학교를 떠나게 되며, 그 이후 1831년 2월까지 토마스 학교에 다시 편입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결국 대학 입학시험도 보지 못한 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대학에 지원을 시도해 본다. 다행이도 바그너는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않고도 그 대학에서 음악학도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게 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등록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특히 바그너는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테오도르 바인리크의 제자가 된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한 첫 오페라《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낭만적 오페라《요정 Die Feen 1833-1834, Würzburg》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코믹오페라《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4-1836, Magdeburg》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바그너는 1836년 11월에 여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이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으로 향하고, 비극적 그랜드오페라《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이 때부터 이들은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된다. 플라너와 결혼은 불행하게 끝나고,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문학적,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된다. 미완성이던《리엔치 Rienzi 1838-1840, Riga/Paris》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를 작곡한다. 1842년《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1843년 1월 2일에 그의 지휘로《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자마자 바그너는 그 해 2월부터 1849년까지 드레스덴의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는 바그너가 절정기에 도달하는 낭만적 오페라를 작곡한 때인데, 즉《탄호이저 Tannhäuser 1842-1845》와《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이 그것이다. 1846년 4월,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제9번 교향곡》을 바그너가 처음으로 지휘하기도 하는데, 베토벤에 대한 바그너의 존경심과 그의 음악적인 영향은 훗날에까지 계속된다. 1849년 36세때 드레스덴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1849년~1858년)을 하게 된다. 1850년 8월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낭만적 오페라의 대표작인《로엔그린 Lohengrin》이 초연되고, 1852년에는 취리히 망명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Wesendonk)부인 마틸데(Mathilde)와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베젠동크가곡집》으로 작곡하게 되는데, 이 가곡들은 불멸의 음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 1849)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를 비롯한 많은 저서들과 연속 4부작 시리즈《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 속하는《라인의 황금(Das Rheingold)》과《발퀴레(Die Walküre)》등의 음악극(Musikdrama)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기존의 낭만적 오페라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의미한다. 1853년에는 바그너가 취리히에서 그 유명한 5월의 콘서트를 갖게 되는가 하면 런던에서는 8개의 연주회를 갖기도 한다. 리스트의 방문은 물론이고, 1857년에는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뷜로우(Hans von Bülow)가 결혼 기념여행으로 부인 코지마(Cosima: 리스트의 딸,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후에 함께 생활하게 된다)와 함께 방문을 한다. 취리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바그너는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베네치아, 루체른,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 1859년에는 불멸의 음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57-1859》이 완성되며 1861년에는《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트리스탄과 이졸데》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4년 5월,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그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아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1861-1867》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전처 미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크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지크프리트의 목가 Siegfried Idyll》을 작곡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각각 1869년과 1870년에 뮌헨에서 초연된다. 1872년부터는 스위스 지역을 떠나 독일 바이로이트로 거처를 옮기고 이곳에서 바그너의 59살의 생일을 기념하여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1876년 4년만에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를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리히터(H. Richter)의 지휘로 대규모의 악극《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종교적인 성격의《파르지팔 Parsifal 1877-1882》인데 이 작품도 1882년에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며 그리고 그곳에서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에 있는 하우스 반프리드(Haus Wahnfried)의 정원에 묻혀있다.
◎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손수 쓴 것은 아마도 그의 악극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많은 음악론도 집필했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체예술(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시·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 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하여야 하고, 음악 스스로가 규정적(規定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 이와 같은 그의 예술론은 주로《로엔그린》이후《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기까지의 창작활동 중지기간에 씌어졌다. 이 예술론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중의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① 극의 전개와 심화에 관현악을 참가시키기 위하여 도입동기(導入動機)를 유효적절하게 썼다.
② 무한선율(無限旋律)이라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양식에 의하여 음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 극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③ 화성의 표현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대담한 반음계적 사용으로 음의 조성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④ 관현악 구성은 대규모화하여 표현의 폭의 넓이와 섬세함에는 종전의 낭만파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로서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많은 예술론을 저술하여《독일음악론 Über Deutsches Musikwesen》(1840),《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1849),《미래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1850),《오페라의 사명에 대하여 Über die Bestinnung der Oper》(1871),《오페라와 희곡 Oper und Drama》(1851),《독일예술과 독일정치 Deutsche Kunst und Deutsche Politik》(18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Tannhauser》Manuscript 1845. Trumpet 2 part
*~* 루트비히 2세의 예술 열정 *~*
독일 남부 바이에른의 왕인 루트비히 2세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였으며, 성장하면서부터는 시와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심취하였다. 또한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이 직접 성을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루트비히는 아직 왕세자였던 1861년에 오페라《로엔그린》을 보고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 바그너가 그의 대표작《탄호이저》의 흥행에 실패하여 지독한 곤궁 속에 빠져 있을 때, 루트비히는 바그너가 음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고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브라반트의 왕녀 엘자와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의 슬픈 전설에 푹 빠져 있었던 루트비히는 부왕의 성인 호엔슈반가우성에 있는 많은 벽화들을 보면서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껏 펼쳤으며, 후에 노이슈반슈타인성에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는《로엔그린》에 등장하는 백조를 좋아하여 성 안의 문고리는 모두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벽화와 커튼의 장식에도 역시 수많은 백조가 그려져 있다. 또한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 내부를 바그너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배경을 그린 벽화로 장식하였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지팔》과《로엔그린》의 장면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에는 오페라《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나머지 방들도《트리스탄과 이졸데》와《니벨룽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들을 모티프로 한 회화들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