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 (1841~1904)♪

신문섭2006.10.20
조회141

                  안토닌 드보르작                

            Antonin Dvorak (1841.9.8~1904.5.1)

 

드보르작은 프라하 교외 넬라호제베스 푸줏간 겸 여관업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드보르작은 가업을 이어받기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16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고학으로 졸업 후 레스토랑·호텔 등에서 비올라를 켜오다가 1862년 프라하 카렐 코므자크 악단의 비올라 연주자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이 악단이 프라하 가설극장(假設劇場-훗날의 국민극장)이 신설되자 그 오케스트라에 통합되고, 1866년 그곳 지휘자로 취임한 B.스메타나의 영향을 받아, 당시 고조된 민족운동의 와중에서 음악가로서 체코의 민족문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연주와 작곡생활을 본격적으로 병행하기 시작했다. 1872년 애국적인 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 찬가가 호평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고, 1874년에는 성·아달베르트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얻기 위해 매년 작품을 제출하던 중 1877년 심사원이던 J.브람스에게 인정되어 베를린의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면서 유명해졌다. 이때부터 여러 연주자가 그의 실내악이나 관현악곡을 베를린·런던에서도 연주하게 되어, 그의 명성은 국내외로 퍼졌으며 1878년부터 지휘를 시작하여 1884년 이후 영국을 9회나 방문하여 자작곡을 지휘, 대환영을 받았다. 드보르작은 또한 일찍이 바그너와 브람스가 매료된 바 있는 슬라브 특유의 민속적 요소에도 눈을 떴다. 자식들을 잃고 슬픔 속에서 작곡한 교회음악《스타바트 마테르》, 브람스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슬라브 무곡 1집》 등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드보르작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40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적인 작곡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891년 프라하음악원 교수가 되고, 차이코프스키의 초대로 러시아를 방문했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지휘자로서도 명망을 얻은 드보르작은 1892년에 미국 뉴욕의 내셔널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 취임하여 도미했고 1895년까지 일했다. 그 당시에 쓰인 것이 미국에서의 신선한 인상을 소재로 교향곡 9번《신세계 From the New World》와 현악 4중주 12번 같은 곡이었다. 1895년 4월 미국 생활을 마치고 프라하로 되돌아온 그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과 창작에 전념하여, 1901년 프라하음악원 원장이 되고, 오스트리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나, 1904년 그 곳에서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보르작 (1841~1904)♪

 

드보르작은 2년간 오르간학교에서 공부한 이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베토벤, 슈베르트를 연구하였다. 한때 그는 바그너, 리스트에도 열중하였으나 자연스레 물이 흐르는 듯한 음악 속에 체코민족의 애환을 담은 독자적인 작풍(作風)을 이루었다. 표제음악 전성기에 절대음악(絶對音樂)을 많이 작곡한 그는 브람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는 교향시와 오페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미국 체류 중에는 니그로나 아메리칸 인디언 음악에 흥미를 느껴 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을 썼으며, 이런 작품이 그의 대표작처럼 되었으나, 미국 체류시대 이외의 것도 재인식되었다. 주요작품으로 오페라《루살카》외 6, 교향곡 9, 교향시 5, 교향서곡 5, 바이올린협주곡 ·첼로협주곡 각 1, 현악4중주곡 8, 피아노3중주곡 3편 등이 있다. 200곡이 넘는 그의 작품들에선 체코 민속음악 형식이 가미된 이성주의와 후기 낭만주의의 표현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드보르작 (1841~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