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宦官), 만들어진 제 3의 性-환관 지망자의 범람

이양자200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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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宦官), 만들어진 제 3의 性-환관 지망자의 범람


 

환관, 만들어진 제 3의 性

 

(10) 환관 지망자의 범람

 

자궁(自宮)이라는 것은 형벌로써의 거세나 관(官)에서 강제적으로 행하는 거세 외에 민간에서 사정에 따라 자의로 거세하는 일을 가리킨다. 자궁은 자기 자식이나 또는 타인의 어린아이에게 행하는 경우와, 성인이 되어 본인이 자진하여 거세를 하는 경우로 구분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적 원칙을 토대로 하여 자유의사로 실시함에는 다름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자궁은 고대사회에도 있었다. 춘추시대의 패자로 널리 알려진 제(齊)의 환공(桓公)이 병으로 쓰러진 관중(管中)에게 그의 후계자를 선정하는데 수조(豎刁)의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물었다.

관중은 수조와 같이 임금을 곁에서 가까이 보필하기 위해 자궁을 했던 그의 태도는 사사로운 정을 멀리할 수 있을 뿐더러,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고 대답했다.

 이는 특필할 만한 내용이었기에 사마천도 기록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수조는 이처럼 자궁을 했던 사람으로 그 사람이야말로 자궁 환관의 시조라 볼 수 있다.

 

춘추(春秋)시대 이후, 전국(戰國), 진(秦), 한(漢) 시대에는 자궁 환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자궁 환관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연히 암암리에 거세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후한(後漢) 말기에는 자궁을 한 사람이 상당한 숫자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자궁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공인되었던 것은 역시 10세기에 시작된 송(宋)나라 때부터이다.

 

송(宋)시대에 자궁을 공인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실태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인민들 중에서 자궁을 희망하는 사람은 우선 병부(육군성)에 출두하여 성명을 보고하고, 그 다음 개운(開運)의 길일을 택하여 거세를 하도록 한다.

 병부는 그날을 기록해두고, 상소함과 동시에 사실인정을 하며, 상처가 다 낫기를 기다려 그를 후궁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이 자궁자(自宮者)가 정식으로 임관을 하면 자궁한 그날을 탄생일로 하고 운세를 지배하는 별[星]도 그날을 기점으로 하여 지금까지의 운세를 전환시켜 비로소 제2의 인생을 출발하도록 한다.

 

얼핏보면 이 공인 제도와 모순되는 점도 있으나, 송(宋)의 태조는 당(唐)대의 환관의 폐해에 진저리를 내어 궁정에는 환관을 50명으로 제한하였고, 백성이 아동을 거세하여 매매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는 형식적인 전면 금지보다는 환관의 수를 제한하여 환관의 폐해를 억제시키려는 목적을 함축하고 있다. 송대(宋代)에서는 태조의 방침을 역대의 황제들이 꾸준히 지켰으며, 한편으로는 재상의 실권이 막강했기 때문에 당(唐)과 비교해보면 환관의 폐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소화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류천자(風流天子)였던 휘종(徽宗)시대에는 실지회복이란 미명 아래 황제를 부추기어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서 나라를 멸망케 하는 원인을 제공했던 동관(童貫), 양사성(梁師成) 등으로 일컬어지는 국적급(國賊級)의 환관도 출현했다.

그러나 이때에는 자궁을 공인하여 신시대적인 의의를 창출하였던 점을 강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적인 안목에서 고찰하자면, 당대(唐代)에서 송대(宋代)에 이르는 기간에 중국사회는 커다란 시대적 전환을 경험한다.

당대에 존재했건 계급신분제가 대폭 철폐된 반면, 개인의 자유는 현저하게 신장되었다. 이와 더불어 부의 축적 정도가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기업정신이나 현실을 직시한 공리주의가 등장한다.

교양을 습득한 사람이 국가시험에 통과하면 신분의 제약을 받지 않고서 실력에 준하여 대신재상(大臣宰相)도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하층 서민계급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파악하여 영원한 밑바닥 인생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이는 환관이 되는 길이다.

 

이와 같은 사회의 기운이 보다 더 강렬했던 명나라 때에는 ‘자궁을 하여 사관이 되려는 자는 단지 일신의 부귀를 누리려는 목적 때문이다.’라고 단언을 했던 황제도 있었을 정도다. 이러한 예는 당시의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서양의 풍자화에 돈 때문에 악마에게 환영(幻影)을 파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곤 하는데 자궁 환관이 분명 이와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식욕과 색욕이 인간에게는 최대의 욕망이라고도 하지만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굶어죽을 것인가.’라고 할 정도로 극빈한 사람에게 색욕은 과연 어떤 형태로 충족되고 있는가.

 

북경에서 물을 팔고 다니던 남자가 있었는데 늦도록 부인이 없었기에 친구가 돈을 지불하고 아내를 맞아들였다.

그런데 신부의 머리수건을 벗기고 보니 백발이 가득한 할머니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 운이 좋았던 경우였으며, 결혼준비금이 없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무수했다.

이런 류의 남자들에게 남성의 심볼이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마치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치를 지닐 뿐이 아닌가.

그리하여 환영(幻影)을 악마에게 팔게 된다.

 한번 운이 열리면 실질적으로 대제국을 지배할 수도 있고 거액의 돈이나 막대한 재물, 향기로운 미녀, 웅장한 궁전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국가시험에 수석으로 통과하더라도 출세의 종착역은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 ; 首相)까지 이다. 그 수상을 아랫사람으로까지 할 수 있다. 물론 가능성은 바늘구멍을 들어가듯 어렵다 하더라도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해볼 때 자궁이야말로 인간을 악마에게 매매하도록 열어놓은 길과 무엇이 다르랴.

 

이러한 악마적 제도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가 명대(明代)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명나라는 건국 초기에 자궁 금지령을 발표했다, 이는 유사 이래 없었던 일이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 오랜만에 한민족의 손으로 정권을 되찾은 명(明)은 의기도 드높게 유교의 정신을 앞세워서 도덕강화를 소리높여 외쳤다.

명나라의 행정 법전인 《대명회전(大明會典)》에는 자궁은 불효죄의 명목으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의 기본은 자손을 양육하여 집안의 혈통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효행의 교과서인 《효경(孝經)》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을 항상 완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효의 근본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효의 근원을 망각하는 행위를 어찌 용납할 것인가. 그리하여 명(明)에서는 자궁은 반역죄와 같은 비중으로 처리하여 자궁자는 사형으로 다스렸고, 그 일족이나 정에 이끌려 은닉해준 자, 이웃의 조장(組長), 촌장(村長)도 무도 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일례로 명나라 중기에 해당하는 정덕(正德)초기에 자궁의 실상을 기록한 《황명실록(皇明實錄)》을 살펴보자. 이것은 정부가 편찬한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오늘날 환관은 황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권세를 장악했고 그 위광은 구족(九族)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를 보고 우민(愚民)은 다투어 자기 자식이나 손자를 거세하여 부귀를 꿈꾸고 있다.

그 수는 한 마을에서 수백 명을 헤아릴 정도이며, 제아무리 엄금을 하여도 근절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자칫하면 부정적인 사실이 밝혀져서 궁지에 처할지도 모를 정부의 발표가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 그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상상에 맡길 따름이다.

 

그런데 《황명실록》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편에서는 엄금을 하면서도 또 다른 편에서는 자궁자를 환관으로 등용했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뒤에 다루기로 한다. 어쨌든 《황명실록》은 환관 세력이 발호하면서 ‘자궁금지령’이 실행되지 못한 법안으로 끝나 버리고 만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실록을 세밀히 검토해보면, 관리들이 실제로 자궁자의 편의를 봐주었으며 또한 자궁을 인정해주기를, 말에서 떨어져서 생긴 상처의 결과라든가 또는 유년 때 병을 얻은 때문이라든가 등으로 위장한 사실을 알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너무도 위법이 엄청났고 속임수가 끝이 없자 금지령을 발표한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도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다시 한 번 명말에서 청초의 대학자였던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을 통해서 살펴보자.

"명(明)의 경태년(景泰年) 이후에 자궁을 하여 환관을 지망하는 자가 있어 조정에서는 어느 기간 이를 벌주었으나 결국에는 승낙하여 채용하였다.

그 결과 궁성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어떤 자는 가혹한 정부의 강제노동을 두려워한 나머지, 또 어떤 사람은 부귀를 얻기 위해 모두들 앞을 다투어 자신의 육체나 자손까지도 거세하여 환관을 취급하던 기관인 예부(禮部)로 몰려갔다.

이후로 날마다 밤마다 수백 수천의 인파가 밀려들어 마침내는 국가에 방대한 해독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실정을 극명하게 묘사한 사실 그대로이며, 이러한 현상이 사회문제로 발전했음은 당연하다.

 

이들 엄청난 수의 자궁자 집단을 목전에 두고 정부는 대책을 세우기에 부심했다.

환관의 정원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는 데가 자궁자들이 모두 적격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말 천계(天啓) 3년에 환관의 결원으로 3천 명을 모집하려 했을 때 응모자가 2만여 명에 달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예정인원에서 1천 5백 명을 증원하여 4천 5백 명을 채용했다. 그런데도 불합격자는 1만 5천여 명이라는 막대한 숫자를 기록했다.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죽음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몸을 팔기로 했던 무리들이 무참하게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장차 어떻게 되었을까.

정덕(正德)년간, 북경 주변의 거주자 중에서 채용되지 못한 자궁자 3천 5백여 명은 연명(連名)으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수용해줄 것을 호소했다.

정부는 그들을 수용할 장소로 북경 교외의 남원(南苑)을 지정했다. 이 지역은 과수원과 저수지가 있는 약 100평방킬로미터의 광대한 면적으로 이곳에 수용된 사람은 같은 정덕(正德)년 당시 수만 명을 넘었으며, 이들이 소비하는 매일 매일의 식량은 엄청난 양에 달했다.

 

이를 묵과해버릴 수 없었던 정부는 북경 성내에 숨어있던 자궁자의 무리를 모조리 시골로 쫒아버렸으나 본디부터 거처가 없는 패거리였으니 돌아갈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북경 교외에서 하북 남부의 하간(河間) 지방으로 이어지는 일대에는 실업자궁자의 무리가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통행하는 여행자에게 걸식행위를 하더니 마침내 강제로 사람들을 말에서 끌어내리고는 노상강도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늘상 있는 일이라 하여 지방 관리들이 전연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탓에 가장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무력한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노상강도 역시 환관지망자일 뿐이었기에 난폭히 굴었다 해도 상대방의 급소를 잡아채어 기절시키는 정도였으며 찌르고 상처를 낼 만큼 과감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다.

 

청조(淸朝)에서도 환관이 사용되었으나 숫자에 있어서는 도저히 명나라에 비할 정도가 못된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권세를 장악했던 서태후(西太后)시대가 되면 환관사상 최후로 꽃을 피우게 된다.

스탠드는 이 시기의 환관에 관하여 보고하기를, 자궁자의 7, 8할은 유아 때에 부모나 친척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또는 노후를 대비하여 저축을 하듯이 거세를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부모의 명령은 법률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아이들은 간단히 명령에 따랐다.

성인 자궁자는 20세 또는 그 이상의 나이가 되어서 고위층 환관들의 부귀가 부러워서 또는 안락한 생애를 보내고자 하는 희망에서 자궁을 하였는데, 스탠드는 이들을 가리켜 ‘게으름뱅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아가 스탠드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하여 이들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2, 3년 전에 결혼한 젊은 남자가 어찌된 영문인지 환관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어 식음도 전폐하고 밤이면 불면으로 괴로워했다.

거세 수술을 하자면 신허보증인이 필요했건만, 친척들은 남자의 광적인 욕망을 알아차리고는 모두들 보증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손으로 거세를 해버렸다. 그러나 사람이 워낙 변변치 못했던지라 고용이 되지 못해 결국엔 자살 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이 게으름뱅이의 예이다.

 

다음의 예는 그 당시 영국공사관 앞에 위치한 숙왕부(肅王府)에서 근무했던 환관의 경우이다. 그는 결혼을 한 후 겨우 1년 만에 보통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식칼로 스스로 자궁을 하고 나서 이곳 왕부(王府)에 직책을 요구했던 사람으로 스탠드가 그를 알게 된 때는 그가 취직한 후 5년이 되었을 때이다.

그는 가끔씩 하루나 이틀은 집으로 돌아가 부인과 딸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자궁을 하게 된 동기는 돈 많은 친구를 보고나서 자기와 비교해보니, 자신의 앞날이나 처자문제 등이 너무 한심해 보이는 데다가 풍족한 생활을 염원한 나머지 택한 방법이라 하였다.

 

이제 남은 또 한 가지의 예는 스탠드가 경탄했던 유형이다.

함풍(咸豊)3년(1853)의 일이다. 어느 가난한 남자가 전당포에 가서 자기의 상의를 저당으로 하여 약간의 금액을 요구하자 주인은 말도 안된다고 거절을 했다.

화가 난 남자는 느닷없이 작은 칼을 꺼내더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양물(陽物)을 절단하여 계산대 위로 내던지고는 그것을 저당잡고 은 3량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경악한 전당포 주인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 결과 이 남자는 절에 이송되어 충분히 치료를 받은 뒤 왕부(王府)에 취직되었다 한다.

 

이상으로 자궁 환관이 출현한 경위와 그들이 특히 명청시대에 다량으로 등장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에 환관의 산지에 대하여 덧붙이고자 한다.

앞에서 당대 환관이 특산지로서 복건, 광동지방을 열거하였으나 명청시대에는 하북성이 자궁 환관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특히 하간(河間)지역이 중심지가 된다.

중국인에게 질문을 던지면 이 지역의 사람들은 환관이 되기를 즐겨했다는 대답을 한다고 한다.

 

스탠드에 의하면 처음에는 생활에 쫓기어 할 수 없이 자궁을 하였으나 자궁자가 비싼 값으로 매매되기에 이르자 점차로 관례가 되었다 한다.

더욱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서로가 항상 결속하여 동지 또는 동료를 키워나가는 중국인 특유의 파벌관계도 틀림없이 한몫을 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