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Rosso 2 Maggio

백지현200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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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Rosso 2 Maggio

2. 5월 Maggio

 

비는, 벌써 나흘째 계속 내리고 있다.

눈을 떴는데, 침실이 어두컴컴하고 물 소리가 들리면

기운이 쭉 빠진다. 비는 좋아하지 않는다.

낮에 이렇게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도, 무릎 뒤에 닿는

소파의 질감은 물기를 머금고 있고,

페이지를 넘길 때도 눅눅한 종이 냄새가 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특히 그렇다.

긴츠부르그의 건조한 문체마저도.

부슬부슬 귀를 적시는 빗소리.

"내내 책만 읽고 있네."

오늘 아침, 안젤라가 그렇게 말했다.

아침이래 봐야 거의 점심때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늦잠을 자고 막 일어난 안젤라는 어젯밤 화장도 지우지 않고 잤는지

눈 밑 여기저기 마스카라가 눌러 붙어 있었다.

"일본 문학?"

"아니오."

나는 읽고 있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고 책을 덮으면서,

들어올려 보인다. 이탈리아의 현대소설이다.

"마빈이 아오이 씨, 일본에 있는 대학에서 일본 문학 전공했다고

 그러던데,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그냥 훑었을 뿐이에요."

이번에는 안젤라가 어깨를 으쓱한다. 안젤라는 토론을 좋아한다.

그림과 조각, 문학과 연극, 건축에 관해서 읽고, 때로는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그에 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차, 끓일까요?"

내가 묻자, 안젤라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아침에는 별로 먹고 싶지 않으니까."

방 안은 바깥처럼 어둡고, 모든 것이 물 소리에 갇혀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유난히 정직해져 있었다.

안젤라에게는 정체 모를 동양여자 - 남동생의 여자친구 - 일

나 자신을 생각 했다.

"실은 마빈이 다른 얘기도 해 줬어. 비오는 날에는 아오이 씨,

 우울해 한다고. "

마빈의 말대로다.

"미안, 독서를 중단하게 했나 보네. 책 읽어요."

안젤라가 그렇게 말하여,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자 4시였다. 마빈과의 약속 시간은 7시다.

나는 책을 덮고, 욕조에 물을 받는다.

저녁 나절의 목욕은, 내가 반듯한 사회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게 해 주어 좋다.

지금의 자신에게 어울리는 행위인 듯한 기분이다.

목욕을 끝내고 레코드를 들으며 외출 준비를 했다.

라벨.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다.

마빈은 디지털 음이 아닌 레코드 음을 좋아한다.

엷은 회색 속옷에 살짝 향수를 뿌리고, 풍성한 검정 정장에

엷은 물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브러시로 머리를 빗고, 굽이 넓은 단정한 구두를 신는다.

열어 둔 창문에서 물기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어온다.

차갑고 눅눅한 밀라노의 공기.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있는,

친숙한 안개와 안개비 내음. 이미 폐 속에 녹아 있는.

캔 맥주를 마신다. 베란다에 나가자 회색으로 번진

좁은 거리가 보이고, 양쪽으로 빽빽하게 서 있는

수많은 차가 비에 젖어 조용히 빛나고 있다.

마빈은 약속 시간에 정확하게 돌아왔다.

"Perfect!"

나를 보자마자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굉장히 아름다워."

우리는 중앙역 옆에 있는 호텔로 손님을 픽업하러 갔다.

"당신이 선물하는 걸로 해 줘."

뒷좌석에 놓인 상자를 가리키며 마빈이 말한다.

아마 또 포도주잔이겠지.

"알았어요."

이렇게 마빈의 접대에 동행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나는 오늘 접대할 손님의 이름과

회사명, 가족 구성 등등을 기억한다.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넘어 있었다.

안젤라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우리들이 돌아오자 방으로 들어갔다.

"마빈."

나는 샤워를 하고, 허리에 목욕 타월만 두른 차림으로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마빈의 등에다 말했다.

왜, 라고 대답은 하면서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하였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불렀나?"

2분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서야 마빈이 돌아본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다거북 같은 가슴팍.

"그래요."

"뭔데?"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페데리카 얘기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요?"

"물론이지."

나는 침대에서 나와, 서랍장에서 마빈의 잠옷을 꺼내 왔다.

"어릴 적에 당신을 귀여워해 주었다는 할머니잖아?"

마빈이 잠옷에 팔을 끼면서 말한다.

그래요. 이번 주말에, 오랜만에 뵈러 다녀올까 하는데."

"좋지."

다시 침대를 삐걱거리며 잠옷 차림의 마빈이 옆에 눕는다.

향긋한 비누 냄새.

"그런데, 이번에는 나 소개시켜 주는 거야?"

이전부터 마빈이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페데리카도 마빈을 만나고 싶어한다.

"아니오."

내가 말한다.

"주말에 당신은 안젤라 누님하고 외출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가끔은 둘이서 나갈 필요도 있잖아요."

마빈은 씁쓸하게 웃는다.

"아주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했군."

이런 때 마빈은 절대로 마음 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하지만 좋아. 당신이 그러라니까, 누나한테 물어 보지."

"물어 보는 게 아니고, 그러자고 하세요."

나는 마빈의 자상함을 이용하고 있다.

"알았어. 그렇게 할께."

마빈은 나를 등뒤에서 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등으로 마빈의 가슴을, 무릎으로는 마빈의 무릎을 느낀다.

그리고 마빈이 잠들 때까지, 그 자세로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비소리가 귀를 때린다.

옛날,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엄마가 수를 헤아리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한없이 한없이 긴 노래.

 

   하나, 하면 하루밤 새면 시끌시끌하고 시끌시끌하고

   집 안을 꾸미고 소나무 장식 소나무 장식.

   둘, 하면 어린 솔잎은 색도 고와서 색도 고와서......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이 노래를 끝까지 알고 있는 학생은

결국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좋은 노랜데. 끝까지 가르쳐 줄래."

그런 식으로 말한 것도, 미국에서 건너온 쥰세이뿐이었다.

쥰세이는 대신, 중국인 가정부한테서 배웠다는 애절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목소리가 예뻤다.

나는 일어나, 잠든 마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단한 턱, 짧게 돋아 있는 수염, 긴 속눈썹,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마빈,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나를 꼭 껴안아 주는 마빈. 잠자는 마빈의 몸에 다리를 휘감고,

움푹한 어깨에 얼굴을 부빈다. 마빈의체온, 마빈의 냄새.

마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헤치고 들어오거나

모든 것을 알려 들지 않는다. 혼자서 점점 상처받아

흥분한 두더지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슬픈 얼굴로 내게

말없는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

 

눈을 떠 보니 마빈의 팔 안에 있었다. 비는 그쳤다. 창문을 열자 투명한 공기가 오랜만에 빛의 입자를 머금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정도 일찍 아파트를 나셨다.

산타 마리아 델 레 그라치에 교회의 중정은 밀라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네 그루 백목련과 네 마리 개구리가 분수를 에워싸고 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녹음.

회랑 돌담에 걸터앉아 소설을 마저 읽었다.

모두가 조금씩 불행해져 가는 이야기.

마빈의 아파트가 이 교회 옆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기뻤다.

매일 산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빈은 교회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것도 잘 됐다 싶었다.

혼자가 되기 위해 오는 장소. 돌담은 어제까지 내린 비를 머금어

싸늘하고 축축했다. 하지만 5월의 태양에 이끌려 거리로 나온

성급한 관광객들은 짧은 바지에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어슬렁거리고 있다. 입장이 제한되어 있는 수도원의 식당

- 최후의 만찬이 있는 곳 - 입구에는 벌써 긴 줄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책을 덮고 쿠폴라를 올려다본다. 투명한 하늘빛을 배경으로,

하얀 회벽과 거뭇거뭇한 벽돌이 빛을 받아 눈부셨다.

이른 봄날의 동물원 속 동물 같다. 즐겁고 조금은 쓸쓸하다.

지나와 파올라의 가게는 마음에 들고,

점원이란 것도 적성에 맞는다. 사무적인 면에서는 꼼꼼하지만,

정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므로.

사랑받은 여성의 인생을 상징한다는 보석에 매료되어

시작한 일이었다. 지금도 보석을 좋아한다.

특히 앙티크 보석은.

가게 문을 열고 유리창을 닦는다. 계산기에 잔돈을 집어 넣는다.

창 너머로 늘 보는 얼굴들이 늘 보는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라디오를 켜 일기예보를 듣는다. 새로 들어온 물건이 있으면

장부에 기록하고 쇼케이스에 진열한다.

" 일이란 그런 게 아닐까."

언제였던가, 마빈은 그렇게 말했다.

" 지나친 열의나 이상(理想)은 일의 질을 떨어뜨리는데,

  아오이는 너무 진지하단 말이야. 봄날의 동물원이 왜 나쁜건지,

 나는 전혀 모르겠어. 사랑스럽잖아."

물론 마빈의 말이 옳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일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세일 안내장을 보낼 사람들의

주소와 이름을 적는다. 벨이 울리고, 오늘의 첫 손님을 위해

문을 열었다.

 

토요일은 여름 같은 날씨였다.

페데리카가 사는 케프렐로 거리 주변은 조용하지만 휑하고,

시간에 뒤쳐져 있는 듯한 주택가다.

한산한 빵집과 세탁소를 지나

일방 통행로를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 왼쪽에 4층짜리

모래색 벽의 아파트가 서 있다. 차창을 활짝 열고,

얼빠진 듯 환한 햇빛 속을 천천히 달린다.

길가에 말라빠진 검정 개가 누워 있었다.

앞뜰에는 등나무 꽃이 한창이었다.

포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뽀얗고 엷은 보라색.

등나무 아래는 색깔이 선명한 베고니아 화분이 몇 개 놓여 있다.

옛날에 여기서 살았었다. 젊었던 엄마 아빠와,

현관을 일본의 전통 인형과 종이 풍선으로 장식하고.

건물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온도가 3도 정도는 내려간 듯한

느낌이다. 그늘 같은, 땅 속 같은, 막 수확한 채소 같은 독특한 냄새.

튼튼한 이중 문이 달려있고,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뭐가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스러울 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는 느림보 엘리베이터.

페데리카는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다.

금속 문을 열자 동시에 말린 과일 냄새가 흘러나온다.

벽 한가득 매달아 둔 레몬과 오렌지 껍질,

시나몬, 말린 정향나무 꽃.

" 봉 조르노(Buon giorno)."

페데리카의 포옹은 가벼운데도,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곳에는

신기하리만큼 그 감촉이 오래 남아 있다.

" 봉 조르노."

나는 금방 열 살짜리 아린애가 되고 만다.

페데리카는 언제든 내 편이었다.

첫 기억은 디딤돌과 겨울 나무들.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구름 낀 추운 날의 풍경, 엄마의 트위드 코트. 초등학교,

다니엘라, 발레 레슨. 동양인이 아직 드물던 때였다.

" 어머니는 건강하시니?"

레모네이드를 따라 주면서 말한다.

" 네, 아마 그럴 거예요."

엄마와 아빠는 지금 영국에 있다. 회사가 정한 부임지.

" 아마라니, 너도 참 너무하구나."

페데리카는 피식 웃으며 내 팔을 톡톡 쳤다. 듬직하고 골격이 큰 손,

긴 손가락. 세월을 헤치고, 매끄럽게 마르고 주름진 피부.

오븐으로 구운 채소와 파스타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거실 의자에 앉았다.

하얀 천을 덮어 놓은 2인용 딱딱한 의자.

페데리카는 담배를 한 대 천천히 피운다.

" 건강하게 보이니 다행이로구나, 머리가 많이 자랐어."

" Si(네)."

이 거실 창문은 늘 기억하고 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도,

커튼의 모양도.

" 너 귀국했을 때는, 머리가 너무 짧아서 남자애 같았었다."

페데리카는 어렴풋이 미소짓는다.

" 그 스타일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이 집은 변함없다. 몇 번이고 빨아 낡은 레이스 테이블 크로스,

선반에 세워 둔 잡지, 페데리카가 피우는 담배의 달큰한 내음.

"미국 남자랑은 잘 돼가니?"

네, 라고 나는 짧게 대답한다.

화분 둘레로 조그만 벌레가 기어가고 있다.

페데리카는, 잘 됐구나,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공중에 매달린 채,

우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창문으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도쿄에서 있었던 일을, 그 나날들의 신비로운 흥분과 열기를

페데리카는 알고 있다. 내가 써 보낸 무수한 편지,

꼭꼭 채워 넣은 기억. 다니엘라와 마빈은 모르는 나의 4년간.

" 마빈은 할머니를 굉장히 만나고 싶어해요.

  안부 전해 달라고 몇번이나 당부했어요."

" 고맙구나."

페데리카는 키가 크고, 허리 둘레만큼은 박력이 있지만

다른 부분은 야위었다. 거의 늘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굽 높이가 적당한 구두를 신고, 남편이 선물했다는 묘안석 반지를

한시도 뺴놓지 않는다. 그 녹아 흐를 듯 색이 깊은 커다란 돌은,

마치 페데리카의 손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반지를 동경했다.

"언제 소개해 줄 건데?"

언젠가는, 이라고 대답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멋진 점심, 고마웠어요. 정말 맛있었어요."

" 나야말로 포도주, 고마웠다. 가끔은 얼굴이라도 보여 주려므나.

  행운을 빌게."

귓전에서 조그맣게 키스 소리가 울린다. 순간적으로 닿은

페데리카의 볼이 차갑다. 문이 닫히자 복도는 어둡고,

굉음이 울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다시 맑게 개인

한낮의 햇살 속으로 나갔다.

 

그 다음 주, 나는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마빈과 안젤라, 다니엘라와 루카가 축하해 주었다.

피체리아에 몰려가 식사를 하고, 그 다음은 집에서 술을 마셨다.

루카가 주특기인 하모니카를 연주해 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생일은 행복한 날도 특별한 날도 아니다.

언제부터일까.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다.

나이 따위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5월은 아름다운 달이야."

브랜디 칵테일을 마시면서 안젤라가 말했다.

"아오이한테 잘 어울려."

"고마워요."

나는 말하고, 커다란 잔에 담긴 빨간 포도주를 흔든다.

마빈은 소파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내 어깨를 안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마빈의 가슴에 안기면

편안하다. 청결하고 마음 놓이는 살 냄새.

낮에는 마빈과 산책을 하고, 라 페르라에서 선물을 같이 골랐다.

평상복과 속옷을 두 벌씩, 우유색과 살구색이다.

아오이한테는 검은 색도 어울릴 텐데, 라고 마빈은 말하지만,

나는 도저히 검정 속옷을 입을 마음이 일지 않는다.

매끄러운 감촉의 실크를 만지작거리면서,

마빈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마빈은 정말 완벽하다.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다니엘라는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무렴, 이라고 대답한다.)

그 날 밤에는 늦게까지 픽셔너리를 하며 놀았다.

픽셔너리는 그림을 그려서 단어를 맞추는 미국식 게임.

뜻밖에도 루카가 이겼다. 다들 한껏 마시고, 한껏 웃었다.

한 문제를 맞출 때마다 다니엘라와 루카는 키스를 나눈다.

친구가 있는 밤을 좋아한다. 시끌시끌하고 행복하다.

"만나고 싶다."

욕조에 걸터앉아, 내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마빈이 말했다.

새벽 2시의 목욕탕은 밤과 뜨거운 물 냄새.

"누구를?"

포도주가 몇 잔이나 온 몸을 내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양손을 흔들흔들 흔들어 본다.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스물여섯 살의 아오이를."

마빈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말한다.

"사랑했어, 아주."

마빈의 두 손이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온다.

귓전에서 속삭여, 나는 몸을 틀고 마빈의 입술을 찾는다.

탄탄하게 근육이 발달한 허벅지에서 무릎으로 손을 미끄러뜨린다.

물을 잠그고, 우리는 그대로 침실에 가 사랑을 나누었다.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일하러 나가는 마빈을 배웅하고, 나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마빈의 베개에 얼굴을 묻는다. 정말 날들이 쉼 없이 흘러간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가게로 갔다.

알베르토가 새로운 시리즈의 샘플 - 가느다란 은 끈으로 커다란

얼음사탕 같은 천연석을 둘둘 묶은 디자인이다 - 을

몇가지 보여 주었다. 장미 석영과 비취, 수정,

여름다운 반투명한 돌들.

나는 공방에서 일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좋아한다.

큼직한 작업대, 은색과 녹슨 쇠 같은 색의 다양한 도구,

버너의 불꽃. 작업대 위에는 세 종류의 액체가 들어 있는 유리병

 - 투명한 것은 물, 분홍색은 알코올, 반딧불이를 녹인 듯한 엷은 연두색 액체는 용접을 촉진하는 용제. 알베르토가 가르쳐 주었다 - 이

놓여 있다. 라디오에서 낮게 흐르는 가요곡,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알베르토의 의지에 찬 옆얼굴.

같은 표정으로 스케치북을 향하는 사람을 알았었다.

아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벌써 몇 년 전, 먼 장소에서의 일이다.

오후, 오니키스 반지가 하나 팔렸다.

일이 끝난 후 슈퍼마켓에 들렀다. 로마 쌀과 골리아(Golia)를 산다.

골리아는 마빈이 좋아하는 리코리스 사탕으로

그의 생활 필수품이다. 저녁 시간의 슈퍼마켓은 싫다.

살 것만 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 식사 후, 마빈과 안젤라가 다툼을 하였다.

아니 안젤라가 거의 일방적으로 화를 낸 것이지만,

제기랄, 하고 마빈이 갑자기 내뱉듯 말해 놀랐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마빈과 다툰 일이 었다.

안젤라는, 마빈이 자기를 방해꾼처럼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마빈이 몇번이나 부정하는데도 그렇게 말했다.

이제 그만 좀 해. 마빈은 분노에 얼굴을 비틀고 말하고,

마시다 만 커피 잔을 테이블에 그대로 남겨 두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거들게."

내가 그릇을 헹구고 있는데, 코가 빨개진 안젤라가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금방 끝나니까."

"하게 해 줘."

부탁이야, 라고 말하기에 나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

안젤라가 설 자리를 마련했다.

안젤라가 헹군 그릇을 내가 받아 식기 세척기에 집어 넣는다.

"방해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기어코 안 하네."

안젤라가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안젤라는 내 얼굴을 보고, 그리고 슬며시 웃는다.

뒤로 꽉 묶은 갈색 머리, 아무렇게나 비져 나와 있는 잔 머리,

앤디 워홀의 고양이가 프린트 된 티셔츠.

"알고 있잖아요?"

안젤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빈의 어디가 좋은데?"

대신 그렇게 묻는다.

"올바른 것."

나는 잠시 생각하고서 그렇게 대답했다.

"올바른 것?"

"네. 그리고 허벅지."

안젤라는 또 내 얼굴을 본다.

"허벅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멋져요."

"정말?"

그럼 다음에 잘 봐 두어야겠네.

안젤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샤워를 하고, 어제 선물 받은 포근한 평상복

 - 입으면 사르륵 피부에 녹아든다 - 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잠든 마빈의 얼굴을 보면서 마빈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의 어디를 좋아하는 것일까.

올바른 것. 물론 그렇다. 마빈은 공정하고 명석하다.

허벅지. 이건 절대적이다. 마빈의 허벅지는 정말 아름답다.

기지.

관대함.

차분한 말투.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마빈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땀이 돋은 마빈의 이마를 만지면서,

하나라도 더 많이 생각해 내려 했다.

하나라도 더 많이 세어, 무엇인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리라.

듬직한 체구, 얼굴에 얼굴을 갖다 대고 숨소리에 귀기울인다.

나는, 잠든 마빈의 몸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살며시 껴안는다.

 

5월 마지막 토요일에 다니엘라를 만났다.

"그럼 안젤라는 지금 파리에 있다는 말이지?"

구름진 하늘 아래, 우리는 산 바빌라 광장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푸르츠 젤리를 먹고 있었다.

"응."

"그 말다툼 때문에?"

이 곳은 다니엘라가 좋아하는 카페다.

옥외인데도 테이블도 의자도 차분한 색상에 고전적이다.

"아닐거야. 그녀는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데다,

   '파리를 아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다니엘라가 영어로 흉내내었다.

"한 일주일 정도 있다 돌아오겠다고는 했는데."

어제 아침, 공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마빈을 뿌리치고,

리무진 버스가 출발하는 중앙역으로 택시를 타고 간

안젤라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안젤라는 비유하자면 야생 담비같다.

"그래서, 대체 밀라노에는 얼마나 있을 작정인 걸까?"

엄마와 똑같은 말투로 다니엘라가 말한다.

고등학생 시절분터 일란성 모녀라 불리웠다.

조그만 찻잔에 각설탕을 두개나 넣고, 스푼으로 휘휘 저으면서.

"좀 쌀쌀하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처럼 더웠는데."

오랜지 젤리를 한 개 입에 넣는다.

"아직 5월인걸 뭐."

다니엘라는 말하고, 달콤하고 미적지근한(아마도) 커피를

홀짝거렸다. 알고있다. 다니엘라는 나를 심술궂다고 생각하고 있다.

심술궂어졌다고. 아니면 말이 없어졌다고.

아니면 대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러워졌을 뿐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마도 게으르게.

그래서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군.

마빈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뭐 할 일 있어?"

또 비가 내릴 것 같다, 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니엘라의 손가락 끝을 보고 물었다.

단정하게 손질된 달걀형 손톱.

바람에 나무들이 가지째 일제히 흔들렸다.

불온한 소리, 물기를 머금은 공기의 냄새.

"호스트에나 들를까 하는데."

"루카 씨 것 사려고?"

호스트는 남성용 옷가게다. 다니엘라는 고개를 젓는다.

"아빠 것. 내달이면 예순둘이야."

나는 풍채가 좋고 상냥한 다니엘라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건강하시니?"

"그야 물론."

다니엘라는 웃는다. 고등학생 때, 곧잘 차를 가지고

학교로 데리러 와 주었다. 먼저 다니엘라를 태우고,

인터내셔널 스쿨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는

그대로 어디론가 놀러 가곤 했었다.

"그럼 나도 마빈한테 폴로 셔츠나 사 줄까."

계산을 치르고 우리는 카페를 나온다.

옅은 먹물을 뿌린 듯한 바람이 흐르는 밀라노의 거리.

마빈은 스위스로 바캉스를 가자고 했다.

 

 

- 에쿠니 가오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