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정병모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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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항아리 뒤에 책, 책 위에 소반, 그런데 소반 뒤에 오히려 오이가 담긴 접시가 놓인 공간구조가 마치 메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다.  부분.

  

 

 

구조적인 세계

 

     민화의 매력은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보다 대상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짜임의 세계에 있다. 그림 속의 대상들을 하나하나 분해한 뒤 이들을 새로운 구조 속에 재편성한다. 민화가들은 대상을 똑같이 그리기 보다는 생각하고 느끼고 아는 대로 표현하는 것을 즐겼다. 현대화가 이우환이 민화를 "구조적인 회화"라고 평한 것은 이러한 특징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민화는 시각의 세계가 아니라 개념의 세계이고,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이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기묘한 공간구조와 치밀한 장식성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일본민예관(이미지 출처 : 반갑다 우리민화)
 



     일본민예관 소장 두 점의 는  쉽게 알 수 있는 물건들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 물건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한참을 들여다 보아도 알쏭달쏭하다.  윗 그림에는 항아리와 접시들이 맞물려 있는 공간처리가 절묘하고, 책갑 위에 책갑이 놓여 있는 모습은 쌓기놀이의 한장면처럼 아슬하다. 아랫 그림도 공간의 맞물림이 기가 막히다. 왼쪽 항아리는 펼친 책 앞에 있고 그 위에 안경이 붙여있듯이 놓여 있다. 이 책 뒤에는 오른쪽 항아리가 있다. 그런데 책 위에 있는 소반의 왼쪽은 아래와 반대로 접시 앞에 위치해 있다. 왼쪽 항아리의 아랫부분은 책 앞에 있지만, 윗부분은 책 뒤에 있는 소반 뒤에 있는 것이 마치 메비우스의 띠를 연상케 한다. 기기묘묘한 공간 속을 헤메고 나면, 그 다음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책장과 그릇의 표면에 베풀어진 치밀한 무늬이다. 현실성을 떠난 공간은 유난히 세밀하게 그려진 장식적인 무늬들에 의하여 독특한 환상으로 피어난다. 절묘한 공간과 섬세한 장식성의 조화가 이 작품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이 는 일본 문화계에 민화열풍을 일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 1957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 그림에서 받은 감동을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글 속에 풀어놓았다.  그것도 병중에 썼다고 하니, 얼마나 감동이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제자인 염직공예가 세리자와케이스케는 이 그림을 보고 무심코 한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고 불가사의한 화경(畵境)이라고 극찬하였다. 민화를 통해 받은 감동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일본 문화계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켰고, 1970-80년대 한국민화의 수집이 붐을 일어났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서양의 근대미술 교육을 받은 그는 공간이 깊어질수록 점으로 모아지는 선투시법(linear perspective)이 합리적이라고 믿었는데,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공간의 표현도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그가 느낀 이 그림의 불가사의한 세계인 것이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이형록 삼성미술관 리움(이미지 출처 : 삼성미술관 리움 홈피)

    

   궁중의 책거리에는 민화의 책거리와 달리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실제 작품은 전하지 않지만 김홍도가 제작한 책거리는 척면법으로 그려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척면법은 대상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으로 서양화의 투시도법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9세기 전반 책거리로 유명한 이형록(李亨祿, 1808-?)이 그린 궁중의 책거리(호암미술관 소장)를 보면, 척면법이 어떤 기법을 가리키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선투시법에 의하여 깊이 있는 공간의 전개되고 명암법에 의하여 중후한 조형까지 갖추고 있다.  

 

 

선문대학교박물관  (이미지 출처 : 선문대박물관 도록)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가 민화로 그려지면, 그 깊이 있는 공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터럭만 한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 평면으로 바뀐다.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가 그러한 예이다. 이 그림은 첫눈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기 쉽지 않다. 오른쪽은 사슴과 꽃이 분명한데, 왼쪽은 무엇인지 파악하지 어렵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책장과 책들, 그리고 과일과 문방구로 구성된 책거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책 표지의 문양들이 다채롭고 장식적이며,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마치 구성적인 추상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전혀 깊이감이 없는 평면적인 공간에 납작하게 눌려 펼쳐진 것이다. 그런데 책문양의 장식성은 전혀 손상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민화에서 장식성은 필사적으로 수호해야 할 그 무엇이다.

 

   다시 오른쪽의 사슴과 화분에 시선을 옮겨가면, 민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묘사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의 반반이 서로 다르다. 왼쪽은 장식적인 구성이라면, 오른쪽은 간략한 구상의 형상이다. 마치 김흥수가 추상과 구상을 나란히 배치한 "하모니즘(hamonism)"의 회화를 연상케 한다. 구상적인 형상을 추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비결이 민화에 있는 것이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세리자와케이스케 미술관(이미지 출처 : 반갑다 우리민화) 

    

      세리자와케이스케 미술관 소장 는 민화 책거리에서 보았던 평면성과 장식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구운몽은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소설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었던 소설이다.  화면 아래로부터 가운데가 꺽여진 성벽, 그 뒤의 마당,  ㄷ 혹은 ㅁ자집, 국화꽃과 매화나무, 동산과 팔선녀(八仙女)로 공간이 진행된다. 몇 겹의 층층 공간에서 펼쳐져야 할 장면이 놀랍게도 한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문설주, 담, 건물 벽, 문, 지붕 등이 반복적인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기하학적인 구성 가운데 구상적인 인물들의 표현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면 왜 민화가들은 평면적인 공간을 선호한 것일까? 평면성은 민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회화의 전반적인 특징이다. 이는 오랜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숙성된 미의식이다. 이른 시기의 그림인 고구려고분벽화도 평면적 공간 속에서 형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중국의 송, 원대 불화의 영향을 받은 고려불화를 보더라도 깊이 있게 전개된 중국불화의 공간감과 달리 평면적이고 개념적인 공간이 전개되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유난히 민화에서는 평면적인 표현을 선호한다. 이것이 단순함을 좋아하는 서민들의 취향일 것이다. 

 

     문자도 역시 책거리 못지 않게 구조적인 성격이 뚜렷한 제재이다. 민화 문자도의 획들을 여러가지 조형으로 구성하는데, 이는 한국 민화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민예관 소장 문자도는 한 글자 안에서 다양한 이미지의 결합의 보여준다.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제(悌)자는 글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이미지로 자유롭게 결합되어 있다. 1획과 2획은 새 중에서 형제의 우애가 깊은 할미새를 그리고, 3획은 이 새들이 깃든 고목을 그렸다. 4, 5획은 탐스럽게 핀 모란꽃이 자신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고, 나머지 획은 모래결 같은 질감의 해서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묘미는 고목 아래에는 검고 굵은 테두리에 거북 등문양이 베풀어진 사각형이다. 이 제자도의 다른 부분은 사실적인 형상이 조합인데, 이 부분만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꾸몄다. 그래도 이 기하학적인 문양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전체와 어우러져 있다. 오히려 이 사각형이 이 그림에서 시선을 끄는 포인트가 되고 있다. 구상과 추상의 절묘한 조화와 대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일본민예관 (이미지 출처 : 반갑다 우리민화)


  

   같은 일본민예관 소장된 는 다양한 조형이 아니라 유사한 조형의 쌓임에 의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첫획은 신자를 대표하는 상징인 청조(靑鳥)를 묘사하였다. 청조는 장수의 대표적인 신인 서왕모(西王母)의 메신저로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로로 긋는 2획은 복잡한 짜임을 보인다. 굵고 검은 테두리가 처진 것들이 책들이다. 책들을 쌓아서 2획을 나타내었다. 신(信)자의 2획이 "ㅣ"의 세로 획이란 점을 떠올려 보면, 간단한 선 하나를 풍부한 조형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획도 마찬가지이다. 3획은 점 하나인데, 이 또한 책들을 쌓아올린 모습으로 표현하고  가운데 구멍 사이로 건물 일부가 보인다. 그리고 나머지 획들은 운동감이 강한 초서로 그렸다. 간단한 글자지만, 조선의 민화가는 복잡한 짜임으로 구성하였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일본민예관 (이미지 출처 : 반갑다 우리민화)

   

     중국 호남성 동정호 주변의 경치를 그린 소상팔경도는 조선시대 그려진 중국 산수화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었던 제재이다. 고려후기부터 조선시대 내내 문인들에 의하여 시로써 또는 그림으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그만큼 소상팔경은 조선인에게 있어서 중국 산수화의 대표적인 절경으로 인식되었다. 19세기에 와서 문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소상팔경도가 민간으로 전해진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구라시키민예관 (이미지 출처 : 반갑다 우리민화)

    

 

     구라시키민예관 소장 은 소상팔경도 가운데 모래펄에 기러기들이 내려앉는 '평사낙안(平沙落雁)'과 동정호에 뜬 가을달의 정취를 그린 '동정추월(洞廷秋月)'을 결합하여 그린 것이다. 이것은 민화에서만 가능한 기발한 착상이다. 화면 아래의 갑옷 같은 호수가 3단의 산봉우리가 화면을 이끌고 있고 맨 위의 산봉우리가 왼쪽에 점점 작아져 점으로 이어지는 기러기 때가 줄지어 내려앉고 중앙에는 보름달이 수줍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산과 호수는 평사낙안과 동정추월 두 주제의 공통된 배경이고 줄지어 내려오는 기러기 때와 보름달 등 각기 특징적인 도상을 상단에 함께 배치하였다.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산봉우리, 호수, 그리고 나무의 표현이다. 산봉우리는 삼각형을 이은 톱니 모양으로 그렸는데, 그 사이에 먹으로 검게 칠한 산을 두어 원근을 나타내었다. 또한 이들 산에 듬성듬성 솟대처럼 나무들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산들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약간 경사를 두고 흘러내린다면, 호수는 거꾸로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약간 치켜 올라가 대응을 이루고 있다. 추락하듯이 내려오는 기러기 때를 보면, 4,5번째 기러기들이 춤을 추고 있다. 나무도 춤을 추고 기러기도 춤을 추니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화가의 기분이 흥겨운 것 같다. 삼각형 모양으로 획을 그은 산의 테두리 바로 밑에는 담묵으로 음영을 넣었다. 매우 단순화된 표현이지만 나무에서 보듯이 활력이 넘친다. 화면 전체에 흥겨운 분위기가 떠돌고 산, 나무 그리고 기러기에서는 가락이 느껴진다.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정선, 삼성미술관 리움(이미지출처 : 삼성미술관 리움 홈피)

 

 

구조적인 세계 / 민화와 상상력 5

                           삼성미술관 리움이미지 출처 : 꿈과 사랑)

 

 

     소상팔경도가 중국을 대표하는 산수화라면, 조선을 대표하는 산수화는 금강산도이다. 금강산도하면 18세기에 활동한 정선(鄭敾, 1676-1759)을 금세 떠올린 것이다. 금강산도는 그에 의하여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선의 (호암미술관소장, 도 24)는 부드러운 미점(米點)의 토산과 날카로운 수직준의 암산이 마치 태극도(太極圖)처럼 음양의 원리에 의하여 상대화합되어 있는 천하의 형상이다. 그리하여 정선의 금강산도는 다른 화가의 금강산도에 비하여 경물들이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민화에서는 금강산에 대하여 이와 전혀 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호암미술관소장 는 정선의 금강산도와 정반대의 인식이 나타난다. 이 그림의 작가는 금감산의 일만이천봉을 봉우리별로 하나하나 해체하여 균등하게 나열하였다. 정선과 같이 응집된 구조가 아니라 나열식의 구조인 것이다. 정선은 잘 알려져 있듯이 금강산을 실제 답사하고 그린 것이지만, 호암미술관본을 그린 민화가는 금강산을 가보지 않고 귀로만 들은 금강산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금강산도는 사실적인 성향이 강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민화에서는 오히려 사실성보다 구조적인 성향이 돋보인다.그 이유는 민화가들이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고 기존의 그림을 자기나름대로 변형시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화에서는 실제적인 사실성보다 개념성이 두드러진다. 

   

    조선시대 민화가들은 기존의 형상들을 해체하여 다시 쌓거나 다시 나열하며, 성격이 다른 여러 조형들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로 조화시킨다. 그것은 구조적인 구성으로, 추상적인 세계로, 또는 해학적인 변형으로 또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민화에서만 볼 수 있는 놀라운 상상력이다. @ 정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