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회장의 글.

문준희200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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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회장의 글.


 

김우중회장의 글...



6.25때 나의 가족은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이미 납치되어 안계셨고, 형님들은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신문팔이로 나섰다. 그때 열네 살이었다.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열네 살짜리 사내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신문팔이조차도 당시 신문사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옛 제자가 만들어 준 일거리였다.

그 때는 신문팔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내가 신문을 받아서 주로 팔던 곳이 방천 시장이었다. 나는 신문을 받아들면 중간에서는 한 장도 팔지 않고 방천 시장까지 달려갔다.

방천 시장에는 사람이 많은데 중간에 몇 장 파느라고
다른 사람에게 그 좋은 장소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중간에서 한두 장 파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다른 사람이 앞질러서 나보다 먼저 방천 시장에 달려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문을 파는 사람들 중에 항상 맨 먼저 방천 시장에 도착했다. 항상 1등이었다.

그러나 1등으로 도착한다고 해도 그 시장을 독차지할 수는 없었다.

신문을 한 장팔면 거스름돈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내가 아무리 맨 먼저 도착하여 열심히 신문을 팔더라도 3분의 1쯤 파는 사이에 뒤에 따라온 아이가 나를 앞질러서 팔아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100장을 팔아야 네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집에는 어머니와 두 명의 어린 동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그것은 거스름돈을 미리 삼각형으로 접어서 주머니에 잔뜩 넣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엇다.

언제나 1등으로 도착해 신문과 거스름돈을 던져 주고 돈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시장 전체에 내 신문만 팔 수는 없었다.

한 3분의 2쯤 가다보면, 또 뒤에서 다른 아이가 쫓아 와서 앞서 나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한 방법은
아예 신문 값은 받지 않고 신문만을 던져 주고 나서
나중에 그 길을 돌아오면서 느긋하게 신문 값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니까 이제 아무도 나를 뒤쫓아 올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그러다가 신문 값을 떼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두 사람에게 떼이더라도 신문을 다 파는 편이 더 이익이라고 나는 계산했다.

또 그 몇 달동안 내가 이런식으로 신문을 팔자
다른 신문팔이는 그곳에서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방천 시장을 나 혼자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대구에서 신문팔이를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가던 피난 시절에
나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경험한 적이 있다.

피난민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랬듯이 무척 가난하고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늘 배가 고팠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허기야말로 그 시절을 살아 내도록 용기를 준 유일한 활력이었다.

아버지가 납북되시고 형이 군에 입대해 버린 바람에 집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신문팔이를 하루를 공치면 네 식구가 밥을 굶는다는 절실함이 1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뛰어 다니게 만들었다.


신문을 다 팔고 밤 늦게 들어가면 어머니와 동생들은 대개 그 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나와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종일토록 고생하고 돌아왔지만 밥상에 네 식구가 마주 앉았을 때
그 밥은 왜 그렇게 맛있고 그 때의 기분은 왜 그렇게 행복하던지.

그렇지만 초라한 밥상이나마 그렇게 항상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은 죄다 판자집으로 되어 있는데다 노천 시장이었기 때문에 날씨가 궂으면 철시를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도 공치고 마는 것이다.

100부를 다 팔아야 우리 식구가 굶지 않는데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와 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이 자고 있었다.

다른 때는 늘 나의 귀가 시간을 기다리던

가족들이 내가 오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 버린 이유는 뻔했다.

밥이 딱 한 그릇밖에 없으니 굶고 자는 것이었다.
한 그릇을 내 앞에 내놓으며 어머니는 말씀하였다.

“우리는 먼저 먹었다. 시장하지? 어서 먹어라.”

미리 동생들을 재운 어머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밖에서 돌아온 형 몫의 밥 한 그릇을 위해 허기진 배를 안고 억지로 잠을 청한 동생들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도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나는 밖에서 오뎅이랑 사 먹었더니 배가 불러요. 어머니랑 동생들이나 드세요.”

어머니와 나는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우리의 가슴으로 차오르던 뜨겁고 뭉클한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의 학창 시절에는 가난했다.
나만이 아니라 그 시대 모든사람이 대체로 가난했다.
그 때는 우리 나라의 1인당 GNP라고 하는것이 고작 50달러 정도였다. 1만 5천 달러에 육박하고 있는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그때의 우리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야 요즈음도 있지만

그 때는 정말 다들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때 우리 집은 장충동에 있었는데 학교가 있는 신촌에서부터

장충동까지 늘 걸어 다녀야 했다.

항상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시절 내게는 꿈이 있었다.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한밤중에 학교 도서관을 나설때

또는 그 먼 통학길을 걷다가 문득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내좁은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뿌듯함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때는 세계가 내 것만 같았다.
아니 그 때의 기분은 우주라도 싸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늘 가난했지만 나는 한 번도 그것 때문에 풀이 죽어 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값진 젊음이 있었고 그 젊음의 상표나 다름없는 원대한 꿈이 가슴을 가득 체우고 있었다.

도대체 풀이 죽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가난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꿈의 크기만큼 부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가슴 속을 뿌듯하게 만드는 그 꿈 하나 때문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던 때가 젊은 시절이다.


역사는 꿈꾸는자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