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김수민200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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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3

무라카미 류 -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릴리, 자동차로 드라이브한 적 있지? 몇 시간씩 걸려 바다나 화산으로 가는 거야. 아침에 아직 눈이 따끔거릴 만큼 졸릴때 출발해서 도중에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물통의 차를 마시기도 하고, 낮에 점심 식사로 풀밭에 앉아 주먹밥을 먹기도 하는 그런 흔햬빠진 드라이브 말인데.

  그 달리는 차 안에서 말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겠지? 아침에 출발할 때 카메라의 필터가 안 보였는데 어디에 넣어 두었을까? 라든가, 어제 낮에 텔레비전 프로에 나온 그 여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또는 구두끈이 끊어질 것 같다든가, 교통사고가 날까 봐 겁이 난다든가, 벌써 내 키도 성장이 멈췄네, 라든가 아무튼 별의별 생각을 다 하지 않아? 그러면 떠오른 그 생각이 차에서 보이는 풍경과 겹쳐져 가는 거야.

  집이나 논밭이 계속 다가왔다가 다시 뒤로 달아나잖아? 그러니까 머리 속의 상념들과 밖의 경치가 서로 섞여 버리는 거야. 길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비틀비틀 걸어오는 양복을 입은 술 취한 사람들이라든가, 손수레에 귤을 가득 싣고 가는 아주머니라든가, 꽃밭이라든가, 항구, 화력발전소가 말이야. 눈에 들어왔다가 금방 사라지니까, 머리 속에서는 앞서 생각하고 있던 것과 섞여 혼합돼 버리는 거야. 이해하겠어? 카메라의 필터와 꽃밭, 그리고 발전소가 하나가 되는거야. 그래서 나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과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천천히 머리 속에서 섞여서, 꿈이라든가 예전에 읽은 책이라든가 기억들을 찾아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뭐라고 할까, 하나의 사진, 기념사진 같은 정경을 만들어 내는 거야.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계속 그 사진 속에 추가해 가다 보면 나중에는 그 사진속의 사람들이 말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움직이기도 하지. 움직이게 하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말이야, 반드시 굉장히 거대한 궁전 같은 것이 생겨나. 여러 인간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궁전 같은 것이 머리 속에서 완성되는 거야.

  그리고 나서 그 궁전 안을 들여다보면 재미가 있어. 마치 이 지구를 구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완성된 궁전 안에는 무엇이든 다 존재하고 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는 거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궁전의 기둥도 여러 가지 양식으로 세워져 있고, 모든 나라들의 요리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어.

  영화 촬영 세트와는 비교도 안 돼. 훨씬 거대하고 정교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맹인, 거지, 불구자, 광대, 금테로 화려하게 의상을 장식한 장군과 피투성이 병사, 여장한 흑인, 프리마돈나, 투우사, 보디빌딩선수, 사막에서 기도하는 유목민 등등 말이야. 그러한 모든 사람들이 궁전의 회의장에 모여 무엇인가를 하는 거야. 나는 그 것을 지켜보는 셈이야.

  언젠가 궁전을 바닷가에 두지. 아름다워야 하고, 내 궁전이니까.

  말하자면 자신이 놀 수 있는 유원지를 만들어 두고, 언제든 가고 싶을 때는 스스로 동화나라로 가서 스위치를 올리고 인형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렇게 즐기는 중에 차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겠지? 짐을 나른다거나, 텐트를 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거나, 남들이 말을 걸어오거나 하면 말이야, 애써서 소중하게 만들어 놓은 나의 궁전을 지키느라 고생을 하게 되지. 다른 사람이 이것 봐, 여기 물은 깨끗하군. 아직 오염되지 않았어, 하는 따위의 말을 걸어 오면 내 궁전이 다 부서져 버리는 거야. 릴리도 알겠지?

  언젠가 화산에 갔을 때 말이야. 규슈에 있는 유명한 활화산이었는데,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솟구치는 불티와 화산재를 보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 속의 궁전을 폭파시키고 싶어졌어. 아니, 화산의 유황 냄새를 맡았을 때 이미 다이너마이트에 연결된 도화선에 불이 붙었던 거야. 전쟁이 벌어진 거야, 릴리. 궁전이 공격을 당하고, 의사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군대가 방향을 지시하지만 이미 늦었어. 서 있는 발 아래가 터져서 날아가는 거야. 이미 전쟁이 일어났고, 물론 그 전쟁은 내가 일으켰지만, 순식간에 궁전이 폐허로 바뀌는 거야.

  내 맘대로 만든 궁전이니까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어. 나는 항상 그런 식으로 해 왔으니까. 드라이브할 때면 언제나 말이야. 그러니까 비 오는 날 바깥을 실컷 봐 두는 건 이래저래 도움이 되는 거야.

  요전에 잭슨 일행과 함께 가와구치 호수에 갔을 때 LSD를 했었어. 그 때 또 궁전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궁전이 아니고 도시가 됐어. 도시 말이야.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공원, 학교, 교회, 광장, 무선탑, 공장, 항구, 역, 시장, 동물원, 관청, 도축장 등이 있는 도시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생김새나 혈액형까지 결정했어.

  나는 생각해. 내 머리 속 얘기를 누가 영화로 만들어 줄 수 없을까? 그걸 언제나 생각해.

  한 여자가 유뷰남을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서 외국 아이를 죽였어. 그 아이의 엄마가 그 사실을 모른 채 폭풍우 속에서 우연히 그 남자를 도와 주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 여자아이가 태어나. 그 여자아이는 자라서 갱의 정부가 되고, 그 갱에게 사랑을 받지만 결국 지방검사가 쏜 총에 죽고 만다는 줄거리 말이야. 그 지방검사의 아버지가 전쟁중에 게슈타포였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 여자아이가 가로수 옆을 걸어가는데 브람스의 음악이 흐른다는 식의 영화는 아니야.

  큰 소의 살에서 한 부분을 잘라내 자그마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야. 이해하기 어렵지? 말하자면 자그마한 스테이크라도 역시 소를 먹은 건 먹은 거니까. 내 머리 속 궁전이나 도시를 잘게 잘라 가지고, 소를 자르는 것처럼 말이야. 하나 하나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든,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분명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

   그 영화는 거대한 거울 같은 영화가 될 거야. 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영상화되어 다 비치는 큰 거울 같은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그런 게 있다면 꼭 보고 싶어.

  그 영화의 시작 장면을 가르쳐 줄까? 헬리콥터가 있지. 그걸로 예수 그리스도의 상을 운반해 오는 거야.

  어때, 좋지 않아?"

 

 

 

  "요전에 구로카와를 만났어. 그 녀석은 절망하고 있다고 했어. 말뜻은 이해가 잘 안 됐지만 절망한댔어. 알제리로 간대. 게릴라가 되어서. 뭐, 나 같은 놈에게 그런 얘기 한 걸 보면 정말 가지는 않겠지만. 류는 그 녀석의 생각과 다른 거지?"

  "구로카와? 응, 그 사람과는 달라. 나는 그저 지금 텅 비었어. 완전히 비어 있는 거야. 옛날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비어서 아무것도 없어. 텅 비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잠시 동안은 여러 가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되어 가는 대로 보고 있을 참이야. 여러 가지를 그저 봐 두고 싶은 거야."

 

 

 

  "(...)참, 언젠가 내 생일에 네가 플루트를 불어 주었잖아. 레이코 가게에서 말이야. 그 때 무척 기뻤어. 그 때 뭐랄까, 내 가슴이 뭉클해졌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좋은 기분이었어. 굉장히 근사한 기분이랄까, 표현이 잘 안 되지만 싸운 놈과 다시 화해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어. 난 그 때 생각했어. 너는 정말 행복한 녀석이라고. 네가 부러웠지. 남들에게 그런 멋진 기분을 들게 하는 네가 말이야.

  나 자신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아무것도 잘 하는 게 없어. 여태껏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하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녀석들에게는 나름대로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마약 중독자지만. 이제는 종종 헤로인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마약을 얻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런 때 나도 생각하는 게 있어.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 말이야. 아니, 나와 헤로인 사이에 뭔가가 있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거야. 사실은 그것을 맞고싶어 몸이 벌벌 떨리고 미쳐 버릴 지경인데도 나와 헤로인만으로는 왠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물론 주사를 맞고 나면 그런 생각은 싹 사라져 버리지만. 그런데 그 부족하다는 것이란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레이코나 어머니는 아니야. 내 생일에 네가 불어 준 플루트 소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언젠가는 너에게 말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어.

  류, 너는 어떤 기분으로 플루트를 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주 마음이 편안했어. 그 때 플루트를 불던 류가 변함없이 언제나 계속되길 바라.

  주사기 속에 헤로인을 빨아들일 때마다 생각하곤 해. 이제 나는 끝장이다. 내 몸이 썩었으니까, 하고.

  이것 봐. 머리 속살이 이렇게 말랑말랑해졌잖아. 아마 얼마 못 가서 죽을 거야. 그렇지만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 후회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으니까.

   다만 그 때, 플루트 소리 들었을 때의 그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좀더 알고 싶어. 그것만은 분명해.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헤로인을 끊으려고 마음 먹게 될까? 그렇진 않을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닌데, 넌 정말 플루트를 계속해야 돼. 내가 헤로인 팔아서 돈 벌면 아주 좋은 플루트 사 줄게."

 

 

 

 

  모두들 돌아간 뒤, 빈 방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둡게 느껴진다. 빛이 약해서가 아니고 빛줄기로부터 내가 멀어진 것 같다.

 

 

 

  아아! 생각해 보면 사실 나는 언제나 아픈 거야. 아프지 않을 때는 고통을 단지 잊어버리고 있을 뿐이야. 아프다는 것을 잊고 있는 거지. 내 뱃속에 종기가 생긴 탓이 아니야. 사람은 누구라도 언제나 아픈 거야. 그래서 심하게 아프기 시작하면 어쩐지 안심이 되는 거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느낌이 들어서, 아프고 괴롭지만 안심하는 거야.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배가 아팠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는 말야. 모래 언덕 위에서 미사일을 향해 외치는 거야.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그만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거야.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이나, 현재의 자신이나,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물어 볼 사람도 없고, 몹시 외로워져서 심한 고독감에 휩싸였던 거지. 그래서 미사일을 향해 마음 속으로 외치는 거야. 폭발하라고, 제발 폭발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