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잊게될 날만을 기다리며 -사랑을 말하다-

전우석2006.10.27
조회23
  갑자기 잊게될 날만을 기다리며 -사랑을 말하다-

'이러고 있으면 평생 벗어나지 못할거야.'

요즘 부쩍 심해지는 기억의 습격에 몇일째 술로 마음을 달랬던 남자.

만신창이가 된 속으로 눈을 뜬 아침..

'이렇게 살 순 없다!' 결심하고 느닷없는 방청소를 시작합니다.

 

'몇일 뒤엔 죽도록 후회하겠지..' 생각을 하면서도

남자는 그녀의 글씨가 적힌 노트의 한 페이지를

북~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 넣습니다.

볼 수는 없지만 버릴 수는 없어서 그대로 엎어놓았던 액자속의 사진도

한참을 들여다보면 결국 버리지 못할거 같아서

고개는 저만큼 돌린 우스운 꼴로 그대로 휴지통으로..

 

화장실 선반도 뒤집니다.

언젠가 남자의 이마에 여드름이 났을때

집에선 앞머리 올리고 있으라고 그녀가 선물했던 플라스틱 머리띠.

오랫동안 하고 있으면 손오공처럼 머리가 아파지던

그 싸구려 머리띠도 이젠 휴지통으로..

 

또 기억의 습격 당하지 않기 위해서, 한가지도 남기지 않기 위해

책상서럽까지 꼼꼼히 다 열어본 남자는 허연 방 천장이 찍혀있는

폴라로이드 사진도 찾아냅니다.

폴라로이드 필름이 비싸다는걸 몰랐던 그녀가

아무렇게나 셔터를 눌러버려서 찍힌 어이없는 사진.

 

"이 필름 한 장이 얼만줄 알어?" 소리쳤다가

그깟 필름때문에 화를 내냐면서 그녀가 더 화를 냈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싸웠던 기억의 증거품.

비닐처럼 질긴 폴라로이드 사진이지만

손아귀에 힘을 줘서 기어이 반으로 찢어버립니다.

 

손때가 묻어서 눈이 다 없어진 엽기토끼 열쇠고리도 떼어냅니다.

갑자기 열쇠 두개만 달랑거리는 허전한 모습이 됐지만

여행 다녀온 이들이 사다준 쓸데없는 열쇠고리들이 많으니까

그 중 아무거나 매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대청소는 그후로도 한참이 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앉아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곤하던..

 바퀴달린 책상의자까지..

동생의 것과 바꿔치기한 후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방을 둘러보던 남자.

그제야 자신이 무슨짓을 했는지 알아차립니다.

 

『그가 방금 저지른 일은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을

다시한번 마음속에 새녀넣은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내방에 왔었다..

그녀가 이 곳에 앉았었다..

그녀가 이 의자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웃었다..

그녀가 내 폴라로이드 사진을 빼앗아 아무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그 일로 싸웠지만 곧 더.. 사랑하게 됐다..

그 사진이 이 책상 서랍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

 

「헤어지는 것만 아니면 시키는대로 다 할게」

그대의 처분만 기다리던 그때처럼..

「잊게만 해주면 뭐든지 다 버릴게」

기억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갑자기 사랑했던 것처럼 갑자기 잊게될 날만을 기다리며.. 사랑을..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