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회랑 너머의 소나무들,그리고 다보탑과 석가탑이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곳이 또한말없음의 말을 전하는 불국사의 '무설전(無說殿)'이다.
# 클라이막스와 내리막길
절정에 오르면 더 이상 갈 데가 다.
산 정상에 올랐다면 빨리 내려와야 되고,영과 육의 황홀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면 극과 극의 허무한 괴리 현상을 추슬러야 한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도 저마다의 영광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지속적으로 그 영광을 이어가려면 정상에 오를 때보다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신라 천년 동안 가장 절정의 클라이막스는 8세기 중반 불국사를 창건한 경덕왕 때이다. 그 결과가 완벽한 종합예술로 불국토의 이상세계를 구현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절정의 국력을 위해서 몸부림친 결과 약소국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된 신라가 문화의 절정을 구가하기까지는 70여 년이 걸린 것이다. 호족연합체로 국가를 이룩한 고려도 건국 70여 년이 지난 성종대가 되어서야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화를 꽃피웠고,칼로써 왕업을 이룩한 조선도 수많은 골육상잔의 피비린내를 뿌린 다음 30여년이 흐른 세종 때 와서야 비로소 문화의 열매가 익었던 것이다.
다만 바탕의 축적이 약했다면 신라도 절정에 오른 뒤에 급격히 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부족한 조건에서 힘과 역량을 키운 것이라 클라이막스에 올랐다고 급격히 사그라지지는 않았고 계속 꿈틀대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49대 헌강왕 때 다시 한 번 반짝했으나 지는 해는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지듯이 불에서 한바탕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망해 간 것이 신라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에서 인간 중심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르네상스의 문예부흥도 절정에 달하자 숨 돌릴 여유도 없이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보다 700여 년 전에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지만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은 신라는 분명 위대했다.
# 현세의 불국토를 향하여
지금이야 어느 정도는 노력으로 신분상승과 권력,부를 이룰 수 있지만 예전에는 한번 정해진 신분은 평생을 안고 가야했기에 현세 아닌 다음 세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삶이,현실이 힘들수록 내세에서는 이별 없고,눈물 없고,먹을 것 많은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길 꿈꾼다.
삼국유사의 대성효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즉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는 설화는 워낙 유명하다.
간단히 줄이면,"모량리에서 태어난 대성은 워낙 가난하여 부자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한다. 흥륜사 법회를 위하여 시주를 하면 시주한 것의 만 배를 얻고 안락하고 장수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님을 설득하여 고용살이를 하면서 얻은 밭을 보시한다.
그 뒤 대성은 죽고 보시의 덕분인지 부귀영화의 상징인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 전생의 홀어머니도 모셔다가 함께 봉양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재산을 법회에 보시(布施)하고 소원을 이루고,다시 효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건 설화에서 강조되는 이 보시는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6종의 다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지계와 인욕, 정진과 선정, 그리고 지혜를 합하여 6바라밀(六波羅密)이라 한다.
아무튼 대성은 첫 번째 보시를 통해 속전속결의 보답을 받는다. 죽자마자 재상가에 태어나고 가난했던 전생의 부모도 모시는 일거양득을 취했으며 속된 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횡재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때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어서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대 대상(재상) 대성이 신묘년(751)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갑인년(774)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성이 죽은 그해에 완성했더라도 최소 24년이 걸렸고 "스님은 39년 만에 완성했다 하네"라는 19세기 이종상의 '등불국범영루' 시의 구절대로라면 불국사는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도 죽고 38대 원성왕 6년(790)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 불국사의 백미
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의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국사 현장기행이나 TV 방송을 하더라도 아무런 떨림이 없는데 내 스타일대로 불국사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는 난감했다.
경주와 관련한 책을 쓰면서 불국사,석굴암을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 뺄 수도 없고 그래서 졸저인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을 쓰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부분을 쓰기가 제일 난감했고 어려웠다.
기행을 원하는 이들과 인연이 되어 답사 안내를 할 때 나는 초보자의 경우에는 불국사,석굴암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 다만 서양 사람들은 석굴암에는 데리고 가지 않고 불국사에는 데리고 간다. 한국인의 경우는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중급 이상이라고 여겨질 때만 불국사에 데리고 간다.
뭐니뭐니 해도 불국사의 가장 큰 기막힘은 차안과 피안,너와 나,성과 속,추함과 아름다움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대석단이다.
연화 칠보를 올라 극락에 들어가는 안양문이 있고 백운 청운교를 지나 붉은 구름이 어려 있는 현실세계의 극락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에서 내려다 본 청운 백운교는 얼마나 긴장스러운 아름다움인지…. 화려한 아름다움의 다보탑에는 눈길이 가지 않고 석가탑에 눈이 꽂힌다. 절제된 완벽한 아름다움,팽팽한 긴장이 절정을 그리며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석등은 여전히 사방에 지혜를 내보내고 소맷돌은 여전히 기막힌 곡선을 주어 땡땡한 긴장의 아름다움을 품어내고 있었다.
석가탑은 북쪽 회랑에서 보는 맛이 제일 매력적이다. 무설전(無說殿) 강당은 말로 설법하는 곳인데 말없음이라…. 설한 바 없이 설함의 이 기묘함.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김대성과 불국사
[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 김대성과 불국사
'無說… 진리란 무슨 말이 필요한가'사진 설명: 불국사 대웅전 앞 마당,회랑 너머의 소나무들,그리고 다보탑과 석가탑이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곳이 또한말없음의 말을 전하는 불국사의 '무설전(無說殿)'이다.
# 클라이막스와 내리막길
절정에 오르면 더 이상 갈 데가 다.
산 정상에 올랐다면 빨리 내려와야 되고,영과 육의 황홀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면 극과 극의 허무한 괴리 현상을 추슬러야 한다.
개인이나 기업 국가도 저마다의 영광을 위해서 몸부림친다. 지속적으로 그 영광을 이어가려면 정상에 오를 때보다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신라 천년 동안 가장 절정의 클라이막스는 8세기 중반 불국사를 창건한 경덕왕 때이다. 그 결과가 완벽한 종합예술로 불국토의 이상세계를 구현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절정의 국력을 위해서 몸부림친 결과 약소국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된 신라가 문화의 절정을 구가하기까지는 70여 년이 걸린 것이다. 호족연합체로 국가를 이룩한 고려도 건국 70여 년이 지난 성종대가 되어서야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화를 꽃피웠고,칼로써 왕업을 이룩한 조선도 수많은 골육상잔의 피비린내를 뿌린 다음 30여년이 흐른 세종 때 와서야 비로소 문화의 열매가 익었던 것이다.
다만 바탕의 축적이 약했다면 신라도 절정에 오른 뒤에 급격히 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부족한 조건에서 힘과 역량을 키운 것이라 클라이막스에 올랐다고 급격히 사그라지지는 않았고 계속 꿈틀대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49대 헌강왕 때 다시 한 번 반짝했으나 지는 해는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지듯이 불에서 한바탕 몸부림치다가 서서히 망해 간 것이 신라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신에서 인간 중심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르네상스의 문예부흥도 절정에 달하자 숨 돌릴 여유도 없이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보다 700여 년 전에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했지만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은 신라는 분명 위대했다.
# 현세의 불국토를 향하여
지금이야 어느 정도는 노력으로 신분상승과 권력,부를 이룰 수 있지만 예전에는 한번 정해진 신분은 평생을 안고 가야했기에 현세 아닌 다음 세상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삶이,현실이 힘들수록 내세에서는 이별 없고,눈물 없고,먹을 것 많은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길 꿈꾼다.
삼국유사의 대성효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즉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는 설화는 워낙 유명하다.
간단히 줄이면,"모량리에서 태어난 대성은 워낙 가난하여 부자 복안의 집에서 품팔이를 한다. 흥륜사 법회를 위하여 시주를 하면 시주한 것의 만 배를 얻고 안락하고 장수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님을 설득하여 고용살이를 하면서 얻은 밭을 보시한다.
그 뒤 대성은 죽고 보시의 덕분인지 부귀영화의 상징인 재상 김문량의 집에 다시 태어나 전생의 홀어머니도 모셔다가 함께 봉양한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재산을 법회에 보시(布施)하고 소원을 이루고,다시 효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창건 설화에서 강조되는 이 보시는 차안에서 피안의 세계로 가는 6종의 다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지계와 인욕, 정진과 선정, 그리고 지혜를 합하여 6바라밀(六波羅密)이라 한다.
아무튼 대성은 첫 번째 보시를 통해 속전속결의 보답을 받는다. 죽자마자 재상가에 태어나고 가난했던 전생의 부모도 모시는 일거양득을 취했으며 속된 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횡재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때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어서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대 대상(재상) 대성이 신묘년(751)에 처음으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갑인년(774)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성이 죽은 그해에 완성했더라도 최소 24년이 걸렸고 "스님은 39년 만에 완성했다 하네"라는 19세기 이종상의 '등불국범영루' 시의 구절대로라면 불국사는 혜공왕이 죽고 선덕왕도 죽고 38대 원성왕 6년(790)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 불국사의 백미
우리나라 사람치고 경주의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국사 현장기행이나 TV 방송을 하더라도 아무런 떨림이 없는데 내 스타일대로 불국사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는 난감했다.
경주와 관련한 책을 쓰면서 불국사,석굴암을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 뺄 수도 없고 그래서 졸저인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을 쓰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 부분을 쓰기가 제일 난감했고 어려웠다.
기행을 원하는 이들과 인연이 되어 답사 안내를 할 때 나는 초보자의 경우에는 불국사,석굴암에 데리고 가지 않는다. 다만 서양 사람들은 석굴암에는 데리고 가지 않고 불국사에는 데리고 간다. 한국인의 경우는 문화재에 대한 식견이 중급 이상이라고 여겨질 때만 불국사에 데리고 간다.
뭐니뭐니 해도 불국사의 가장 큰 기막힘은 차안과 피안,너와 나,성과 속,추함과 아름다움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대석단이다.
연화 칠보를 올라 극락에 들어가는 안양문이 있고 백운 청운교를 지나 붉은 구름이 어려 있는 현실세계의 극락 자하문이 있다. 자하문에서 내려다 본 청운 백운교는 얼마나 긴장스러운 아름다움인지…. 화려한 아름다움의 다보탑에는 눈길이 가지 않고 석가탑에 눈이 꽂힌다. 절제된 완벽한 아름다움,팽팽한 긴장이 절정을 그리며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석등은 여전히 사방에 지혜를 내보내고 소맷돌은 여전히 기막힌 곡선을 주어 땡땡한 긴장의 아름다움을 품어내고 있었다.
석가탑은 북쪽 회랑에서 보는 맛이 제일 매력적이다. 무설전(無說殿) 강당은 말로 설법하는 곳인데 말없음이라…. 설한 바 없이 설함의 이 기묘함.
그래 진리란 무슨 말이 필요한가.
'말없음의 말함'이 기막힌 화두를 품고 불국사를 맴돌다 왔다.
이재호 기행작가
석굴암 본존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