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채플린의 영화를 접하기 전에 채플린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채플린을 경험했다. 영화 포스터, 그림, 상표, 광고에서 수없이 먼저 채플린은 이미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체였다. 영화 속의 인물을 이미 넘어선 그의 존재를 다시 영화 속에서 읽을 수 있을 때 찰스 채플린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영화 감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889년 영국 런던의 슬럼 가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뮤직홀의 공연자였다. 채플린이 처음 무대에 섰을 때는 5살이었으며 17세에 의붓형 시드니를 따라서 유명한 프레드카노의 극단에 들어가 판토마임 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빠리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의 멤버로 미국과 캐나다 해외공연을 하다가 1913년 맥 세네트에게 발탁되어 에서 활동하게 된다. 1914년 에서 가난한 영국 멋쟁이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35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곳에서 제작한다. 그 작품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방랑자를 묘사한 것이었는데 이같은 그의 개성은 30년이 지나도록 유지되었다. 방랑자의 독특한 성격인 오리처 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덥수룩한 복장에도 불구하고 멋쟁이 같은 풍채,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용감함과 멋진 매너, 지독한 독립심과 끊임없이 발휘하는 수완 등을 통해 그는 성공했다. 페이소스, 아이러니, 풍자성 등이 그의 영화의 주요소가 되 었고 지식인들은 그의 작품을 매우 심각하게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채플린의 작품에서 발견한 의미 이상의 진실이 채플린 영화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아함과 무언극의 적절한 타이밍은 페이소스가 그의 작품에서 주요 부분이었던 것처럼 에서 극치를 이룬다.
1919년 그는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를 설립하고 1923년 자작 시나리오 을 영화화한다. 이즈음 그의 첫이혼에 대한 스켄들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작품 활동에 열중, 등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들을 내놓는다. 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인 '방랑자'의 모습 이 사라지는데, 그 이후 방랑자처럼 공감을 받을 만한 하나의 캐릭터와 무성 영화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에 기초를 두었던 그의 명성과 성공은 퇴락하기 시작한다. 한편 그의 복잡한 사생활은 인기 하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네 번 결혼했으며 세 번 이혼하고 끊임없이 스캔들을 뿌렸다. 또 소득세 납부 회피와 의 표절죄로 고발되는가 하면 미국과 소련의 유대를 촉구하여 공산주의자로 몰리 기도 한다.
그가 선전 활동차 유럽을 여행할 때 채플린은 만약 귀국하면 공산주의자적인 행동에 대 한 책임을 추궁 받을 것이라는 미국의 경고를 받는다. 결국 그는 네 번째 아내와 함께 스위스에 정착한다. 1972년 아카데미 특별 상을 수상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20년 동안을 공산주의자라는 오해와 억측 속에서 살았다. 이후 영국이 낳았고 미국이 탄생시킨 위대한 예술가 찰스 채플린은 1977년 위스의 자택에서 88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 때문 인지 그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이것은 사회 비판 의식과 연결되어,자신의 작품에서 지적인 요소들을 발견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과격한 사상에 당연히 동조적이었다. 러나 특히 그가 가치를 두었던 것은 등에서 보여 주었던 개인의 자유라는 테마였다. 그것은 그의 인생, 신념, 작품들이 모두 나약한 사나이가 비개인적인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걸 그리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채플린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감독이다. 대부분의 희극 배우들은 판토마임이라는 무성 영화에나 적합한 연기 이외에는 별다른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무성 영화에 대한 미련에도 불고하고 유성 영화에서도 자신의 판토마임적 연기와 소리와 장점을 훌륭히 융화시켜 냈다. 그는 인물과 피사체를 촬영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화가 코미디임을 망각하지 않고 코미디에는 롱쇼트, 비극에는 클로즈업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냈다. 인물의 풀 쇼트나 미디엄 쇼트로 우리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아이러닉한 상황을 알고 웃을 수 있 다. 그러나 애수가 담긴 장면이나 감정 이입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더 가까운 거리의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관객에게 그 상황이 우 스운 상황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편집에 있어서도 의미전달을 짧은 커트의 연결에 의존하기보다는 롱 쇼트와 롱 테이 크를 선호함으로써 화면 구성의 의미층과 깊이를 중요시했다.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편집을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모 호성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하며, 그러한 채플린의 편집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찰스 채플린의 독특한 캐릭터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개성 있는 캐릭터로 지금까지도 패러디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의상은 의상만으로도 인물 의 성격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데 콧수염, 중절모, 지팡이 등은 형식을 매우 중요시하며 허영과 위세로 가득 차 있는 인물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큰 신발, 꼭 끼는 외투는 결국 주인공이 가난하며 별볼일없는 인물이 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채플린이 20세기 최초의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일관된 주제의식과 각본, 음악, 제작, 안무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언어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 그리고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 때문일 것이다.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페이소스와 유머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찰리 체플린
우리는 채플린의 영화를 접하기 전에 채플린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채플린을 경험했다. 영화 포스터, 그림, 상표, 광고에서 수없이 먼저 채플린은 이미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체였다. 영화 속의 인물을 이미 넘어선 그의 존재를 다시 영화 속에서 읽을 수 있을 때 찰스 채플린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영화 감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889년 영국 런던의 슬럼 가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는 뮤직홀의 공연자였다. 채플린이 처음 무대에 섰을 때는 5살이었으며 17세에 의붓형 시드니를 따라서 유명한 프레드카노의 극단에 들어가 판토마임 배우로 활동했다. 이후 빠리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의 멤버로 미국과 캐나다 해외공연을 하다가 1913년 맥 세네트에게 발탁되어 에서 활동하게 된다. 1914년 에서 가난한 영국 멋쟁이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35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곳에서 제작한다. 그 작품들 중 거의 대부분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방랑자를 묘사한 것이었는데 이같은 그의 개성은 30년이 지나도록 유지되었다. 방랑자의 독특한 성격인 오리처 럼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덥수룩한 복장에도 불구하고 멋쟁이 같은 풍채,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용감함과 멋진 매너, 지독한 독립심과 끊임없이 발휘하는 수완 등을 통해 그는 성공했다. 페이소스, 아이러니, 풍자성 등이 그의 영화의 주요소가 되 었고 지식인들은 그의 작품을 매우 심각하게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채플린의 작품에서 발견한 의미 이상의 진실이 채플린 영화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아함과 무언극의 적절한 타이밍은 페이소스가 그의 작품에서 주요 부분이었던 것처럼 에서 극치를 이룬다. 1919년 그는 그리피스,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를 설립하고 1923년 자작 시나리오 을 영화화한다. 이즈음 그의 첫이혼에 대한 스켄들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작품 활동에 열중, 등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들을 내놓는다. 에 이르러서는 주인공인 '방랑자'의 모습 이 사라지는데, 그 이후 방랑자처럼 공감을 받을 만한 하나의 캐릭터와 무성 영화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에 기초를 두었던 그의 명성과 성공은 퇴락하기 시작한다. 한편 그의 복잡한 사생활은 인기 하락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네 번 결혼했으며 세 번 이혼하고 끊임없이 스캔들을 뿌렸다. 또 소득세 납부 회피와 의 표절죄로 고발되는가 하면 미국과 소련의 유대를 촉구하여 공산주의자로 몰리 기도 한다. 그가 선전 활동차 유럽을 여행할 때 채플린은 만약 귀국하면 공산주의자적인 행동에 대 한 책임을 추궁 받을 것이라는 미국의 경고를 받는다. 결국 그는 네 번째 아내와 함께 스위스에 정착한다. 1972년 아카데미 특별 상을 수상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20년 동안을 공산주의자라는 오해와 억측 속에서 살았다. 이후 영국이 낳았고 미국이 탄생시킨 위대한 예술가 찰스 채플린은 1977년 위스의 자택에서 88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 때문 인지 그는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이것은 사회 비판 의식과 연결되어,자신의 작품에서 지적인 요소들을 발견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과격한 사상에 당연히 동조적이었다. 러나 특히 그가 가치를 두었던 것은 등에서 보여 주었던 개인의 자유라는 테마였다. 그것은 그의 인생, 신념, 작품들이 모두 나약한 사나이가 비개인적인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걸 그리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채플린은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감독이다. 대부분의 희극 배우들은 판토마임이라는 무성 영화에나 적합한 연기 이외에는 별다른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무성 영화에 대한 미련에도 불고하고 유성 영화에서도 자신의 판토마임적 연기와 소리와 장점을 훌륭히 융화시켜 냈다. 그는 인물과 피사체를 촬영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화가 코미디임을 망각하지 않고 코미디에는 롱쇼트, 비극에는 클로즈업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켜 냈다. 인물의 풀 쇼트나 미디엄 쇼트로 우리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아이러닉한 상황을 알고 웃을 수 있 다. 그러나 애수가 담긴 장면이나 감정 이입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더 가까운 거리의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관객에게 그 상황이 우 스운 상황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편집에 있어서도 의미전달을 짧은 커트의 연결에 의존하기보다는 롱 쇼트와 롱 테이 크를 선호함으로써 화면 구성의 의미층과 깊이를 중요시했다. 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편집을 최대한 절제함으로써 현실 세계의 모 호성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하며, 그러한 채플린의 편집 스타일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찰스 채플린의 독특한 캐릭터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성공한 개성 있는 캐릭터로 지금까지도 패러디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의상은 의상만으로도 인물 의 성격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인데 콧수염, 중절모, 지팡이 등은 형식을 매우 중요시하며 허영과 위세로 가득 차 있는 인물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큰 신발, 꼭 끼는 외투는 결국 주인공이 가난하며 별볼일없는 인물이 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채플린이 20세기 최초의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일관된 주제의식과 각본, 음악, 제작, 안무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언어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 그리고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 때문일 것이다.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페이소스와 유머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