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그.

강동근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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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의 열정을 지닌 한 젊은 교사가 시골 학교로 새로 전근을 왔다. 그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시 한편씩을 써내게 했고, 그중에서 한 아이의 시를 최고의 작품으로 뽑았다. 그리고 그 아이를 불러 반드시 시인이 되어야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일상사들에 묻혀 그 일은 곧 잊혀졌지만, 소년의 마음은, 연금술을 거친 금속처럼, 되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었다. 내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만의 신비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들과 놀 때나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가 혼자 뒷산이나 마을 앞 강으로 걸어나가면 갑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내면 세계였다. 강에 자란 휘어진 풀들, 수면에 비친 영혼, 서리 내린 들판, 작고 흰 돌멩이, 무덤가에 죽어 있는 풀벌레등이 내게 무엇인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옮기는 순간 본래의 색채를 잃고 퇴색하곤 했다.

신비주의를 뜻하는 '마스티시즘'은 고대 희랍어인 '마스테스'에서 온 단어로, '입을 닫고 비밀을 지킨다'는 뜻이다. 일부러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과 상관없이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신비다. 존재를 압도하는 경험이 언어적인 표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인에게 이 신비에의 체험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시는 영혼과 세상을 연결해 준다. 그리고 그곳에 인간이 서있는 자리를 재확인 시켜준다. 시드니 레베트는 썼다.

 

매 순간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라.

 

하나의 산, 하나의 별

구불거리는 강줄기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너에게 찾아오리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시는 인간 영혼의 자연스런 목소리다. 그 영혼의 목소리는 속삭이고 노래한다.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고 귀를 귀울여야한다. '삶을 멈추고 듣는 것'이 곧 시다. 시는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그 상처와 깨달음을. 그것이 시가 가진 치유의 힘이다.

우리의 육체적은 존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며 이 지구 차원에서 육체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삶은 영혼 여행의 일부다. 흔히들 시를 감상적인 문학 장르로 치부하지만, 시는 감상이 아니라 이 불가사의한 삶에 대해 인간의 가슴에 던지는 질문이다. 시는 진정한 삶을 살도록 자극한다. 아랍계 미국 시인 나오미 쉬하브 니예는 '너무 늦기전에 자신의 삶을 살라'고 충고하고 있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걸어다니라.

당신이 언제라도 떨어져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라.

자신의 시간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라.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사용한 언어들이 '다른 어떤 장소'에서 온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언어들은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주위에서 늘 쓰는 그런 언어가 아니었다. 훗날 나는 그것이 영혼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다.
그 이듬해 겨울, 나는 몸이 몹시 아팠다. 작은 시골이라서 엄마등에 업혀 마을에 한 명밖에 없는 공중 보건의에게 가서 가끔 주사 한 대를 맞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머리가 허연 그 늙은 의사는 술을 너무 좋아해 코가 빨간 사람이었다. 겨울 내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방안에 누워 시름시름 앓던 나는, 어느날 방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는데 봄빛이 완연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마당으로 내려가 화단의 흙을 살살 파보았더니 연초록 싹들이 흙을 밀치며 일제히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방안으로 돌아온 나는 엎드려'봄'에 대한 시를 썼다. 그리고 곧 병이 나았다. 시를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때로 우리는 삶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삶에 상처받는 사람들이다. 상처로 마음을 닫는다면, 그것은 상처 준 이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삶과의 단절이고, 고립이다. 고립은 서서히 영혼을 시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