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가끔 비행기의 바닥이 ‘꿍!’ 하고 울리면 스튜어디스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떴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어설픈 무(無)의 상태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나는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늪의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딘가에 있는 중심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그 힘은 점점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내게 새겨진 사회화의 기억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69년 시월의 대기 속으로 증발해갔다. 가끔 찾아드는 자아의 자각은 ‘존재하지 않는 자유’를 방해했다. 그럴 때면 나는 울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내가 세상에 ‘없었던 행복’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나는 실향민이었다. 나는 때때로 울면서 잠을 깬다. “엉엉” 소리 내 우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보다 더 깊고도 짙은 슬픔이 그 안에 담겨있다. 어떨 땐 잠이 깬 후에도 이불 속에 새우처럼 움츠려 있기도 한다. 예컨대, 고등학교 이 학년 당시의 꿈속에서는 중국의 탁구선수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끝부분에서 비행기에 오르는 그녀를 보며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잠이 깬 후에도 한 동안 계속 흐느꼈던 적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평소에는 그럴 이유가 없는 대상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한 번은 ‘손 승호 아저씨’가 나의 꿈에 등장하셨다. 내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거라곤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내 아버지의 지인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어느 겨울에 대구포를 쌀자루 같은 것에 잔뜩 담아다 주셨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내 인생의 어느 겨울은 자루 속 대구포를 난로에 야금야금 구워먹는 재미있는 시간으로 새겨졌다. 지금까지도 그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 겨울이 꽤 행복했나 보다. 그 분과 나는 내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까지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꿈속의 행위가 왜 나를 슬프게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분에 대한 정보가 슬픔과 연결될만한 어떠한 연결고리를 딱히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이유를 굳이 찾아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제된 ‘헤어짐’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강둔치의 좁은 차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저 멀리 한강 다리의 아치 너머 가을하늘을 발견했다. 거기에서는 먹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화선지처럼 구름의 대륙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 혁명 사이로 파란 배경이 드러났다. 얼음처럼 맑은 빛깔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파랑이 흑백의 배경에 떨어진 물감 방울 같았다. 나는 자동차를 길 한쪽에 세우고 차창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내게로 들어왔다.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 하는 나에게 바람은 빨간 사과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그 향기는 나를 초등학교 시절로 데려갔다. 운동회가 끝났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는 색종이 조각들과 만국기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색종이들은 아이들의 함성을 들으며 박에서 쏟아져 내리던 기쁨을 못 잊어서, 만국기는 이어달리기의 열기위에서 펄럭이던 뜨거움의 여운에 사로잡혀서 갈 곳을 몰랐다. 나는 만국기와 색종이와 지나치게 말끔한 하늘을 남겨두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자장면을 사 주셨다. 나는 입 주위와 코끝에 자장을 묻혀가며 행복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그냥 날 바라보셨다. 이제 그 시선은 없다. 그 시선의 배경이던 그 날의 스산한 바람도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나는 잡아둘 수 없는 현재의 무엇인가를 붙잡음으로 해서, 이미 사라진 과거의 무언가를, 언젠가 사라질 미래의 어떤 것을 보상받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항공사에서 제공한 종이도 천도 아닌 담요를 코끝까지 끌어 덮었다. -조규찬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가끔 비행기의 바닥이 ‘꿍!’ 하고 울리면
스튜어디스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떴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나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가 어설픈
무(無)의 상태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나는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늪의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딘가에 있는 중심이 나를 끌어당긴 것이다.
그 힘은 점점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내게 새겨진 사회화의 기억은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69년 시월의 대기 속으로 증발해갔다.
가끔 찾아드는 자아의 자각은 ‘존재하지 않는 자유’를 방해했다.
그럴 때면 나는 울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내가 세상에 ‘없었던 행복’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짧은 순간, 나는 실향민이었다.
나는 때때로 울면서 잠을 깬다.
“엉엉” 소리 내 우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보다 더 깊고도 짙은 슬픔이 그 안에 담겨있다.
어떨 땐 잠이 깬 후에도 이불 속에 새우처럼 움츠려 있기도 한다.
예컨대, 고등학교 이 학년 당시의 꿈속에서는
중국의 탁구선수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 끝부분에서 비행기에 오르는 그녀를 보며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잠이 깬 후에도 한 동안 계속 흐느꼈던 적이 있다.
또 어떤 경우는,평소에는 그럴 이유가 없는 대상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한 번은 ‘손 승호 아저씨’가 나의 꿈에 등장하셨다.
내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거라곤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내 아버지의 지인이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어느 겨울에 대구포를
쌀자루 같은 것에 잔뜩 담아다 주셨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내 인생의 어느 겨울은 자루 속 대구포를
난로에 야금야금 구워먹는 재미있는 시간으로 새겨졌다.
지금까지도 그 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걸 보면,
그 겨울이 꽤 행복했나 보다.
그 분과 나는 내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까지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꿈속의 행위가 왜 나를 슬프게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분에 대한 정보가 슬픔과
연결될만한 어떠한 연결고리를 딱히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이유를 굳이 찾아본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제된 ‘헤어짐’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강둔치의 좁은 차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저 멀리 한강 다리의 아치 너머 가을하늘을 발견했다.
거기에서는 먹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화선지처럼 구름의 대륙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그 혁명 사이로 파란 배경이 드러났다.
얼음처럼 맑은 빛깔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파랑이 흑백의 배경에 떨어진 물감 방울 같았다.
나는 자동차를 길 한쪽에 세우고 차창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내게로 들어왔다.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해 하는 나에게 바람은 빨간 사과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그 향기는 나를 초등학교 시절로 데려갔다.
운동회가 끝났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는 색종이 조각들과 만국기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색종이들은 아이들의 함성을 들으며 박에서
쏟아져 내리던 기쁨을 못 잊어서,
만국기는 이어달리기의 열기위에서
펄럭이던 뜨거움의 여운에 사로잡혀서 갈 곳을 몰랐다.
나는 만국기와 색종이와 지나치게 말끔한 하늘을 남겨두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자장면을 사 주셨다.
나는 입 주위와 코끝에 자장을 묻혀가며 행복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그냥 날 바라보셨다. 이제 그 시선은 없다.
그 시선의 배경이던 그 날의 스산한 바람도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나는 잡아둘 수 없는 현재의 무엇인가를 붙잡음으로 해서, 이미 사라진 과거의 무언가를,
언젠가 사라질 미래의 어떤 것을 보상받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항공사에서 제공한 종이도 천도 아닌 담요를 코끝까지 끌어 덮었다.
-조규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