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경남고 출신 김종원 총각과 경여고 출신 이양자 처녀가 인연을 맺어 결혼식을 올린 것이 1965년 4월 12일이니 올해로서 꼭 42년이 된다. 참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이제와서 생각하니 마치 쏜 화살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
큰 딸 문희가 마흔 두 살, 큰 아들 형욱이가 마흔 살, 작은 아들 형열이가 서른 여섯 살. 우리 두 사람의 역사와 사랑의 결실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참으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하고 패기만만한 모습이 마치 야생마 같았던 그이도 이젠 일흔이 넘은 온순한 반백의 노인이 되었다. 그 야생마를 길들여 보겠다고 등에 타고 뛰어 보려다 수십 번을 곤두박질하며 떨어져 상처 입었던 야심만만했던 로데오 선수인 그 아내도 이젠 정년퇴직을 하고 주름진 얼굴로 그이를 쳐다보고 있다.
가난하게 성장하여 오직 의지와 자존심 하나 만으로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온 경남고 출신인 그이 옆에서 애 셋 낳고 함께 살아온 40 여년의 세월은 퍽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과 가치가 있었다. 나로 하여금 전략가가 되게 하였으며 강인한 인내자가 되게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집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이 어려운 세월동안 우리를 지탱해 줄 수 있었던 요목들은 예쁘고 총명하게 잘 자라 준 우리 애들과 두 사람 다 깊이 빠져들 수 있게 해 준 학문이라는 영역의 오묘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대학에 전임이 된다는 건 참 어려웠다. 애들이 둘이나 다 자라도록 전임이 되지 못한 그이는 어느 날 내 패물을 다 꺼내 보라고 하면서 팔아서 청계천에 시계점포라도 하나 열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으며 결혼 5년 만인 1969년 12월에 그이는 한양대학교 전임이 되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교수 생활도 순조롭지 않았다. 학교의 중앙부처인 기획실에 보직을 맡으면서 그 당시 사립대학이 가지고 있던 부정부패에 맞서며 항거하였기 때문에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는 충분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승진시키지 않는 학교의 처사에 그는 크게 분노하였다.
때마침 부산대학교 사학과에 교수로 계시던 경남고 은사 민성기 선생님이 상경하셔서 부산대학으로 가자고 권유하셨지만 그이는 거절하였다. 아직 서울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끝마치지 못했고 한양대학교의 처사에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후 2년여가 더 지나서 민선생님이 다시 오셔서 부산대학에 와 줄 것을 간곡히 권유하심으로 결국 우리는 1979년 9월 부산으로의 가족 대이동이 이루어졌다.
애들은 “모두 서울로 가려고 애쓰는데 왜 우리는 시골로 내려가느냐?”고 불평하였다.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우리들이 한국에서 서울에 사느냐 부산에 사느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설득으로 무마시켰다. 이렇게 우리 그이는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지방으로 역이동의 시초를 연 학자가 되었다.
가난하고 자존심 강하고 강직한 그이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의 전략적 계획은 결혼 처음부터 시도되었다. 나는 3 가지 점에 유의하여 계획의
주안점을 두었다.
첫째 “그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느끼게 하자”였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중․고․ 대학을 모두 고학한 사람이다. 가진 게 있을 리 없다. 새 구두․ 새 양복․ 새 바바리코트․ 새 외투․새 담배 파이프․ 새 담배쌈지․ 새 가죽 가방...등등 모든 것을 새 것으로 자신의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 했다. 가난한 신혼의 생활 속에서 나는 거의 나를 위한 쇼핑을 한 일이 없다. 그이의 것을 사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또 부르주아는 더욱 아니지만 프티 부르주아 정도는 된다는 의식과 감성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점점 그의 의식은 변해갔다.
두 번째는 고전음악에 대한 인식과 감성의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선창”이나 “돌아가는 삼각지”나 “울고 넘는 박달재” 등 트롯풍의 흘러간 옛 노래만 알았지 거의 고전음악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방에서 만나 모차르트 음악이 나와서 조금만 더 듣고 가자고 하면 “모짜르트 고 뭐고 시끄럽다. 가자!”고 하는 그이였다. 작은 포터블 전축을 하나 마련하여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부터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기질과 성품으로 봐서 고집세고 끈질긴 작곡가 베토벤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이는 밤낮 없이 들었다.
옛 SP판은 오래 들으면 원래의 원음이 나왔는데, 그야말로 그렇게 다 닳도록 들었다. 운명․영웅․환희 등 베토벤 교향곡을 마스터하였고 그 다음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로 넘어갔다.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온갖 외제 오디오 기구와 시스템을 다 사다 놓고 갖추려고 노력하였고, 이제 파가니니는 그이가 가장 즐겨 듣는 바이올린 곡목일 정도로 수준은 향상되었고 정서는 함양되었다.
세 번째는 그이의 취미생활의 지평을 넓혀 주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부산으로 이사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부산대학에 강의를 하기 위하여 정문을 통과하는데 뒤에서 “너 양자 아니냐” 하는 얘기에 뒤돌아보니 옛날 경남여중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억석 선생님이셨다. 나는 그 때 반장을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부임해 오신 선생님은 첫 담임반의 반장이므로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한다고 하셨고 부산대학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리고 당시 선생님은 부산 애란회 회장으로 계셨다. 이 때부터 우리는 난초와 인연을 맺게 되어 난초 구하고 사는 재미와 난초 키우기와 난초 전시회 열기 등등 난초라는 아름다운 식물을 통해 그이의 정서는 더욱 부드럽게 함양되어 갔다.
나의 전략적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자존적 강직성의 성품을 다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지름길이 있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라도 정식으로 갔다. 또한 그는 거의 결백증에 가까운 여성관계를 고집한다.
그의 끈질긴 성품은 중․고 6년에 걸친 일기 쓰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고학하던 그 가난함 속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많은 한문을 섞어가며 철두철미하게 일기를 써 왔었다.
그 낡은 일기장을 1년 여에 걸쳐 컴퓨터 작업을 통해 다 기록을 마친 그이의 이야기 보따리는 머지않아 아들들이 책으로 내어 주리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집에 관한 한 예를 보여주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 초부터 확인한 우리 두 사람의 피 형은 그이가 O형이고 나는 A형이었다.
큰 딸애가 국민 학교에 들어가자 학교에서 검진 결과 A형이라는 혈액형의 이름을 받아왔다. 그리고 둘째인 큰 아들은 O형이라고 했다. 둘 다 우리 애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셋째인 둘째 아들이 국민 학교에서 피검사를 한 뒤 피 형이 AB 라고 손바닥에 써가지고 온 것이다. 아니? 어째 이런 일이? 하고서는 학교의 검사는 사람이 많으니 잘못 뒤바뀐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한양대학 병원에 진료 받을 일이 있어서 갔다가 피검사를 다시 해 보니 역시 AB형이 아닌가!
그래서 엄마 아빠 둘 중 피검사가 잘못된 것이리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 뒤 큰 딸애가 장티부스에 걸려 수혈을 받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A형이 아니고 B형이었다. 이 이후 나는 피검사를 해보니 정확하게 RH-A형이었다. 그렇다면 이 애 셋이 모두 우리 애가 되려면 그는 분명히 B형인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이는 피검사도 해보지 않고 확인 없이 그냥 지내고 있다. 그는 분명히 B형일 것이다. B형 남자, 여러 가지 피 형의 증상으로 보아 그는 B형의 남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면 모두들 재미있어 하며 웃는다.
우리가 처음 살림을 시작한 곳은 서울의 수유리의 장미원 근처였다. 위치는 옛날 상업은행 야구장의 Back net 쪽에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경고의 기별 야구경기대회...
그리고 회식과 그 뒷풀이 등의 정겹고 재미있었던 추억이 지금도 머리에 선하다. 항상 빠지지 않는 달콤한 감초같은 김경희 씨, 그리고 야구부 캣쳐였던 정병섭 씨, 허완구 씨, 김철규 씨, 이건섭 씨 등등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많은 친구분들... 지금은 70이 넘은 노인네가 되었지만 마음도 모습도 아직 옛날 그대로인 것 같다.
우리집은 돈은 없지만 공부는 많이 하는 집이다. 특히 중국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워낙이 엄마 아빠가 역사 공부만 하고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니 모두 그 공부는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자란 때문일까?
큰 딸이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기에 그냥 하라고 했다. 큰 아들은 공대에 가겠다기에 거기로 보냈고, 둘째 아들이 또 난데없이 역사 공부를 하겠다 고하기에 우리는 말렸다. 못먹고 산다고… 그래도 하겠다기에 큰 애 보고 너는 공대니까 돈벌면 동생 좀 도와 주도록 하라고 부탁까지 하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우리 집엔, 사위와 큰 아들이 공대 박사지만 그이와 나, 큰 딸, 작은 아들은 모두 중국사 전공으로 박사를 받은 문학박사다.
우스개 소리로 네 사람이 모이면 중국사 연구회요, 논문을 함께 내어 책을 출판하면 중국사학잡지가 된다고 하며 웃는다. 또한 특이하게도 며느리 둘은 모두 영문학 석사다.
우리 집에는 가가(家歌)가 있는데, 그 제목이 “의지와 공부 그리고 정직이다”
“날이 새도 의지! 해가 져도 의지! 날이 새도 공부! 해가 져도 정직!” 그것이다. 그이만 빼고 우리 모두 함께 부르며 박장대소를 한다.
다행이 자식들이 모두 자기가 앉을 자리들을 다 차지하고 사회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니 큰 부자는 아니라도 흐뭇한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또한 미국과 중국에서 박사를 딴 두 아들이 외국에 남지 않고 조국으로 돌아와 우리 곁에 와서 살기에 더 더욱 고맙다.
주역풀이 하는 한 점술가가 우리 부부의 사주, 궁합를 놓고 보더니 “허~참!”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점술가대회가 있는 날 우리 부부의 사주와 궁합을 주제로 내걸고 모두 어떠냐고 풀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중 반은 헤어지겠다고 하고 반은 살겠다고 했다는데... 그것도 두 사람이 다 교직에 있다고 하니 헤어지지는 않겠다고 풀이했다고 한다.
어디 싸우지 않는 부부가 있으며 또 Power game 하지 않는 부부가 있을까 마는 42년을 넘게 티격태격하면서 살아온 긴 세월은 이젠 넘을 수 없는 사랑의 탑이 되었다.
아직은 둘 다 그 많은 책속에 둘러싸여 번역도 하고 책도 쓰고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사람이 나이 들어도 70대 후반까지는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이 느껴져 즐겁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이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사랑을 가질 수 있었음은 경남고교를 졸업한 그의 명석한 두뇌와 지혜로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혼자 “경남고!!”를 외치며 갈채를 보내고 싶다.
경남여고 시절 죄수복 같은 파란 경고 교복에 멋진 명찰을 단 경남고생들을 멀리서 보면서 얼마나 동경했었던가!
그 경남고 출신 남편과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으며 또 그 경남고 출신들의 한 모임 동아리인 삼소회 모임에서 우리는 경남고 출신 남자들을 자주 만난다.
회고록
회고록
그러니까 경남고 출신 김종원 총각과 경여고 출신 이양자 처녀가 인연을 맺어 결혼식을 올린 것이 1965년 4월 12일이니 올해로서 꼭 42년이 된다. 참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이제와서 생각하니 마치 쏜 화살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갔다.
큰 딸 문희가 마흔 두 살, 큰 아들 형욱이가 마흔 살, 작은 아들 형열이가 서른 여섯 살. 우리 두 사람의 역사와 사랑의 결실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참으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하고 패기만만한 모습이 마치 야생마 같았던 그이도 이젠 일흔이 넘은 온순한 반백의 노인이 되었다. 그 야생마를 길들여 보겠다고 등에 타고 뛰어 보려다 수십 번을 곤두박질하며 떨어져 상처 입었던 야심만만했던 로데오 선수인 그 아내도 이젠 정년퇴직을 하고 주름진 얼굴로 그이를 쳐다보고 있다.
가난하게 성장하여 오직 의지와 자존심 하나 만으로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온 경남고 출신인 그이 옆에서 애 셋 낳고 함께 살아온 40 여년의 세월은 퍽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보람과 가치가 있었다. 나로 하여금 전략가가 되게 하였으며 강인한 인내자가 되게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집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여성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이 어려운 세월동안 우리를 지탱해 줄 수 있었던 요목들은 예쁘고 총명하게 잘 자라 준 우리 애들과 두 사람 다 깊이 빠져들 수 있게 해 준 학문이라는 영역의 오묘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대학에 전임이 된다는 건 참 어려웠다. 애들이 둘이나 다 자라도록 전임이 되지 못한 그이는 어느 날 내 패물을 다 꺼내 보라고 하면서 팔아서 청계천에 시계점포라도 하나 열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으며 결혼 5년 만인 1969년 12월에 그이는 한양대학교 전임이 되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교수 생활도 순조롭지 않았다. 학교의 중앙부처인 기획실에 보직을 맡으면서 그 당시 사립대학이 가지고 있던 부정부패에 맞서며 항거하였기 때문에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하는 충분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승진시키지 않는 학교의 처사에 그는 크게 분노하였다.
때마침 부산대학교 사학과에 교수로 계시던 경남고 은사 민성기 선생님이 상경하셔서 부산대학으로 가자고 권유하셨지만 그이는 거절하였다. 아직 서울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끝마치지 못했고 한양대학교의 처사에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후 2년여가 더 지나서 민선생님이 다시 오셔서 부산대학에 와 줄 것을 간곡히 권유하심으로 결국 우리는 1979년 9월 부산으로의 가족 대이동이 이루어졌다.
애들은 “모두 서울로 가려고 애쓰는데 왜 우리는 시골로 내려가느냐?”고 불평하였다.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로 뻗어나가야 할 우리들이 한국에서 서울에 사느냐 부산에 사느냐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설득으로 무마시켰다. 이렇게 우리 그이는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지방으로 역이동의 시초를 연 학자가 되었다.
가난하고 자존심 강하고 강직한 그이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나의 전략적 계획은 결혼 처음부터 시도되었다. 나는 3 가지 점에 유의하여 계획의
주안점을 두었다.
첫째 “그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느끼게 하자”였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중․고․ 대학을 모두 고학한 사람이다. 가진 게 있을 리 없다. 새 구두․ 새 양복․ 새 바바리코트․ 새 외투․새 담배 파이프․ 새 담배쌈지․ 새 가죽 가방...등등 모든 것을 새 것으로 자신의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 했다. 가난한 신혼의 생활 속에서 나는 거의 나를 위한 쇼핑을 한 일이 없다. 그이의 것을 사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나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고 또 부르주아는 더욱 아니지만 프티 부르주아 정도는 된다는 의식과 감성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점점 그의 의식은 변해갔다.
두 번째는 고전음악에 대한 인식과 감성의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선창”이나 “돌아가는 삼각지”나 “울고 넘는 박달재” 등 트롯풍의 흘러간 옛 노래만 알았지 거의 고전음악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방에서 만나 모차르트 음악이 나와서 조금만 더 듣고 가자고 하면 “모짜르트 고 뭐고 시끄럽다. 가자!”고 하는 그이였다. 작은 포터블 전축을 하나 마련하여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부터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기질과 성품으로 봐서 고집세고 끈질긴 작곡가 베토벤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이는 밤낮 없이 들었다.
옛 SP판은 오래 들으면 원래의 원음이 나왔는데, 그야말로 그렇게 다 닳도록 들었다. 운명․영웅․환희 등 베토벤 교향곡을 마스터하였고 그 다음은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로 넘어갔다.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온갖 외제 오디오 기구와 시스템을 다 사다 놓고 갖추려고 노력하였고, 이제 파가니니는 그이가 가장 즐겨 듣는 바이올린 곡목일 정도로 수준은 향상되었고 정서는 함양되었다.
세 번째는 그이의 취미생활의 지평을 넓혀 주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부산으로 이사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부산대학에 강의를 하기 위하여 정문을 통과하는데 뒤에서 “너 양자 아니냐” 하는 얘기에 뒤돌아보니 옛날 경남여중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억석 선생님이셨다. 나는 그 때 반장을 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부임해 오신 선생님은 첫 담임반의 반장이므로 아직도 내 이름을 기억한다고 하셨고 부산대학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그리고 당시 선생님은 부산 애란회 회장으로 계셨다. 이 때부터 우리는 난초와 인연을 맺게 되어 난초 구하고 사는 재미와 난초 키우기와 난초 전시회 열기 등등 난초라는 아름다운 식물을 통해 그이의 정서는 더욱 부드럽게 함양되어 갔다.
나의 전략적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자존적 강직성의 성품을 다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지름길이 있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라도 정식으로 갔다. 또한 그는 거의 결백증에 가까운 여성관계를 고집한다.
그의 끈질긴 성품은 중․고 6년에 걸친 일기 쓰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고학하던 그 가난함 속에서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많은 한문을 섞어가며 철두철미하게 일기를 써 왔었다.
그 낡은 일기장을 1년 여에 걸쳐 컴퓨터 작업을 통해 다 기록을 마친 그이의 이야기 보따리는 머지않아 아들들이 책으로 내어 주리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집에 관한 한 예를 보여주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 초부터 확인한 우리 두 사람의 피 형은 그이가 O형이고 나는 A형이었다.
큰 딸애가 국민 학교에 들어가자 학교에서 검진 결과 A형이라는 혈액형의 이름을 받아왔다. 그리고 둘째인 큰 아들은 O형이라고 했다. 둘 다 우리 애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셋째인 둘째 아들이 국민 학교에서 피검사를 한 뒤 피 형이 AB 라고 손바닥에 써가지고 온 것이다. 아니? 어째 이런 일이? 하고서는 학교의 검사는 사람이 많으니 잘못 뒤바뀐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한양대학 병원에 진료 받을 일이 있어서 갔다가 피검사를 다시 해 보니 역시 AB형이 아닌가!
그래서 엄마 아빠 둘 중 피검사가 잘못된 것이리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 뒤 큰 딸애가 장티부스에 걸려 수혈을 받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A형이 아니고 B형이었다. 이 이후 나는 피검사를 해보니 정확하게 RH-A형이었다. 그렇다면 이 애 셋이 모두 우리 애가 되려면 그는 분명히 B형인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이는 피검사도 해보지 않고 확인 없이 그냥 지내고 있다. 그는 분명히 B형일 것이다. B형 남자, 여러 가지 피 형의 증상으로 보아 그는 B형의 남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면 모두들 재미있어 하며 웃는다.
우리가 처음 살림을 시작한 곳은 서울의 수유리의 장미원 근처였다. 위치는 옛날 상업은행 야구장의 Back net 쪽에 있었다. 해마다 열리는 경고의 기별 야구경기대회...
그리고 회식과 그 뒷풀이 등의 정겹고 재미있었던 추억이 지금도 머리에 선하다. 항상 빠지지 않는 달콤한 감초같은 김경희 씨, 그리고 야구부 캣쳐였던 정병섭 씨, 허완구 씨, 김철규 씨, 이건섭 씨 등등 지금은 이름도 잊어버린 많은 친구분들... 지금은 70이 넘은 노인네가 되었지만 마음도 모습도 아직 옛날 그대로인 것 같다.
우리집은 돈은 없지만 공부는 많이 하는 집이다. 특히 중국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워낙이 엄마 아빠가 역사 공부만 하고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니 모두 그 공부는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자란 때문일까?
큰 딸이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기에 그냥 하라고 했다. 큰 아들은 공대에 가겠다기에 거기로 보냈고, 둘째 아들이 또 난데없이 역사 공부를 하겠다 고하기에 우리는 말렸다. 못먹고 산다고… 그래도 하겠다기에 큰 애 보고 너는 공대니까 돈벌면 동생 좀 도와 주도록 하라고 부탁까지 하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우리 집엔, 사위와 큰 아들이 공대 박사지만 그이와 나, 큰 딸, 작은 아들은 모두 중국사 전공으로 박사를 받은 문학박사다.
우스개 소리로 네 사람이 모이면 중국사 연구회요, 논문을 함께 내어 책을 출판하면 중국사학잡지가 된다고 하며 웃는다. 또한 특이하게도 며느리 둘은 모두 영문학 석사다.
우리 집에는 가가(家歌)가 있는데, 그 제목이 “의지와 공부 그리고 정직이다”
“날이 새도 의지! 해가 져도 의지! 날이 새도 공부! 해가 져도 정직!” 그것이다. 그이만 빼고 우리 모두 함께 부르며 박장대소를 한다.
다행이 자식들이 모두 자기가 앉을 자리들을 다 차지하고 사회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니 큰 부자는 아니라도 흐뭇한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또한 미국과 중국에서 박사를 딴 두 아들이 외국에 남지 않고 조국으로 돌아와 우리 곁에 와서 살기에 더 더욱 고맙다.
주역풀이 하는 한 점술가가 우리 부부의 사주, 궁합를 놓고 보더니 “허~참!”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점술가대회가 있는 날 우리 부부의 사주와 궁합을 주제로 내걸고 모두 어떠냐고 풀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중 반은 헤어지겠다고 하고 반은 살겠다고 했다는데... 그것도 두 사람이 다 교직에 있다고 하니 헤어지지는 않겠다고 풀이했다고 한다.
어디 싸우지 않는 부부가 있으며 또 Power game 하지 않는 부부가 있을까 마는 42년을 넘게 티격태격하면서 살아온 긴 세월은 이젠 넘을 수 없는 사랑의 탑이 되었다.
아직은 둘 다 그 많은 책속에 둘러싸여 번역도 하고 책도 쓰고 할 수 있어서 참 좋다.
사람이 나이 들어도 70대 후반까지는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이 느껴져 즐겁다.
우리 두 사람이 오늘에 이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사랑을 가질 수 있었음은 경남고교를 졸업한 그의 명석한 두뇌와 지혜로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혼자 “경남고!!”를 외치며 갈채를 보내고 싶다.
경남여고 시절 죄수복 같은 파란 경고 교복에 멋진 명찰을 단 경남고생들을 멀리서 보면서 얼마나 동경했었던가!
그 경남고 출신 남편과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으며 또 그 경남고 출신들의 한 모임 동아리인 삼소회 모임에서 우리는 경남고 출신 남자들을 자주 만난다.
부라보 경남고! 앗싸 경고! 아자 아자!! 파이팅!!!
2006년 10월 30일 이 양 자 씀
***** 이글은 남편이 나온 부산의 경남고등학교에서 동창회 회고록을 책자로
만드는데... 그 가족의 회고록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아 쓴 것이므로
독자들에게 다소 의외고 생소한 부분도 있겠지만... 살만한 집 딸이...
가난한 남편을 만나 고뇌하며 살아온 얘기가 담겨 있으므로 행여 누구
에게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실어봅니다. "결혼"이란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인생의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