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일본이 대륙으로 제국주의 확장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저항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이다.
이해 11월 3일 광주에서 청년학도들이 독립운동의 불을 지피자 12월부터 서울의 학생들이 뒤를 이었고 들불처럼 번져 다음해 3월까지 전국 및 해외의 194개교 5만4000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거대한 산불이 됐다. 3.1운동 이후 10년 만에 또다시 독립의 여망이 들끓어 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4565명의 학생이 처벌을 받았고 그중 형을 받은 사람이 335명, 퇴학생이 582명이나 됐다.
올해는 이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77주년. 이렇게 거대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독립운동은 세월과 함께 망각의 시간 저편으로 흘러가고 있다.
당시 발단이 된 11월 3일은 일본의 국경일인 명치절과 우리의 개천절이 공교롭게 겹치는 날이었다. 일본은 국경일을 맞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광주고보생들이 집단 거부하자 신사참배를 마치고 나오던 일본인 학생이 광주고보생 한 명을 칼로 찌르며 시비가 일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광주고보생들만을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몰아 해산시켰다. 마침내 11월 12일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비밀 학생조직인 성진회, 광주여고보의 소녀회, 광주지역 독서회 등 수천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와 함께 독립까지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의 이 학생정신은 일제의 말기인 43년 제2 학생독립운동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광복 후 8년 만에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 53년 국회에 의해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지정된다. 다음해에는 전국 초.중.고, 대학생들이 거둔 성금으로 현재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된다. 그러나 72년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다.
'학생의 날'은 천신만고 끝에 84년 다시 부활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이미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념일이 됐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장관이 참석하던 과거의 기념식과 달리 광주일고 교정에서 자체 행사로 치르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올 2월 국회는 성격이 모호해진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하는 대정부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77년 만에 분명한 성격의 기념식이 치러지게 된 것이다. 당시의 규모나 파급효과를 볼 때 학생독립운동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공유하기보다 외면해 온 경향이 없지 않다. 한 지역사로 매몰시키고 박제화해 버린 것이다.
일본의 재무장과 중국의 역사 왜곡 등 동북아가 혼돈 속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미래에 대비하는 작업이다. 전국의 각 중.고등학교에는 수많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방치되고 있다. 이제는 향토사 측면에서 선배들이 벌였던 처절한 독립투쟁을 복원하고 재조명해야 할 때다.
11.3 학생독립운동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1929년 일본이 대륙으로 제국주의 확장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저항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이다.
이해 11월 3일 광주에서 청년학도들이 독립운동의 불을 지피자 12월부터 서울의 학생들이 뒤를 이었고 들불처럼 번져 다음해 3월까지 전국 및 해외의 194개교 5만4000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거대한 산불이 됐다. 3.1운동 이후 10년 만에 또다시 독립의 여망이 들끓어 오른 것이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4565명의 학생이 처벌을 받았고 그중 형을 받은 사람이 335명, 퇴학생이 582명이나 됐다.
올해는 이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77주년. 이렇게 거대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독립운동은 세월과 함께 망각의 시간 저편으로 흘러가고 있다.
당시 발단이 된 11월 3일은 일본의 국경일인 명치절과 우리의 개천절이 공교롭게 겹치는 날이었다. 일본은 국경일을 맞아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광주고보생들이 집단 거부하자 신사참배를 마치고 나오던 일본인 학생이 광주고보생 한 명을 칼로 찌르며 시비가 일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광주고보생들만을 일방적으로 가해자로 몰아 해산시켰다. 마침내 11월 12일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비밀 학생조직인 성진회, 광주여고보의 소녀회, 광주지역 독서회 등 수천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와 함께 독립까지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시의 이 학생정신은 일제의 말기인 43년 제2 학생독립운동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광복 후 8년 만에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 53년 국회에 의해 11월 3일이 '학생의 날'로 지정된다. 다음해에는 전국 초.중.고, 대학생들이 거둔 성금으로 현재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된다. 그러나 72년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 국가기념일에서 제외된다.
'학생의 날'은 천신만고 끝에 84년 다시 부활했지만 학생들에게는 이미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념일이 됐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장.장관이 참석하던 과거의 기념식과 달리 광주일고 교정에서 자체 행사로 치르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올 2월 국회는 성격이 모호해진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변경하는 대정부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77년 만에 분명한 성격의 기념식이 치러지게 된 것이다. 당시의 규모나 파급효과를 볼 때 학생독립운동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공유하기보다 외면해 온 경향이 없지 않다. 한 지역사로 매몰시키고 박제화해 버린 것이다.
일본의 재무장과 중국의 역사 왜곡 등 동북아가 혼돈 속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미래에 대비하는 작업이다. 전국의 각 중.고등학교에는 수많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방치되고 있다. 이제는 향토사 측면에서 선배들이 벌였던 처절한 독립투쟁을 복원하고 재조명해야 할 때다.
김성 지역활성화연구소장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