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토 조정의 외교정책 - 한반도의 움직임과 일본(37-38쪽) 고구려는 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야마토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 열도 사람들은 전부터 철자원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4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다. 후일 일본의 역사서에서 여기에 두어졌던 일본의 거점을 임나일본부라 불렀다.
조공 (38쪽)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하였다. 바다를 건넌 야마토 조정의 군대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4세기말부터 5세기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반도남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조선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다 (32-33쪽) 중국에서는 4세기경부터 유목민족이 북부로 침입해왔기 때문에 한(漢)민족의 지배자들은 남쪽으로 도망을 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국가간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남북조시대). 중국이 분열하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남부에는 작은 국가들을 통일한 백제·신라 2국이 일어났다.
야마토 국가는 백제와 소국(小國)이 분립하고 있던 가라(加羅 ; 任那)지방의 국가들과 결탁하여 고구려·신라와 싸웠다.
5세기에는 야마토 국가의 대왕이 왜국의 왕으로서의 지위와 조선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휘하는 권리를 중국의 황제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의 남조에 여러번 사절단을 보냈다.
조선 출병 (123쪽) 1세기 만에 전국의 통일을 이루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기는 왕성해졌다. 히데요시는 다시 중국의 명(明)을 정복하여 천황과 자신이 거기에 살고 동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1592년 15만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끼나가 등의 무장이 거느린 일본군은 곧바로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 북부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조선측의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의 활동과 민중의 저항이 있고 명나라 장군도 있어,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명과 평화교섭을 위하여 병사를 철수했다. 두 번에 걸친 출병의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이 현저히 황폐해졌다. 명도 일본과의 전투로 쇠퇴하였으며 토요토미가(家)의 지배도 흔들렸다.
일본서적(日本書籍)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122쪽) 자신의 세력을 외국에까지 뻗치고자 생각하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을 완수하자 명의 정복을 계획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그 통로가 되는 조선에 군대 15만명을 침입시켰다. 일본군은 곧 한성(현재의 서울) 등을 점령하였고 명의 국경 가까이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드디어 수군의 힘도 증강되고 명의 원군도 있어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휴전하고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히데요시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으나 히데요시가 병사했으므로 전군이 후퇴함.
쇄국 하의 대외관계 (133쪽)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대마도(對馬)의 종(宗)씨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어 있던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였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조선으로부터는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라 부르는 사절이 에도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또 부산에는 ‘종(宗)씨의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약 400-500인의 일본인이 살면서 무역과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218-219쪽)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동경서적(東京書籍)
동아시아의 정세 (213쪽) 메이지 10년대의 일본에서는 민권론자들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제국에서 민권의 신장과 독립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제민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도 위험하다며 대외팽창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한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메이지유신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개혁파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격렬해졌으며, 일본은 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비증강을 꾀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220쪽) 1894년 조선의 남부에 동학의 난(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서학)에 반대하는 종교(동학)를 신앙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추방을 목표로 하여 한 때는 수도 한성에 육박하는 기세를 보였다.
일ㆍ청전쟁 (218-220쪽)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여,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곧바로 폭동을 진압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김옥균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탄압했다(갑신사변). 약간의 병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고 일본도 갑신사변후 청과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서적(日本書籍)
갑오농민전쟁 (206-207쪽) 1894년 조선에서는 일본과 구미제국의 진출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동학*을 신앙하는 농민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갑오농민전쟁). 농민군은 화승총이나 창 등을 손에 들고 외국세력의 축출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서울)에까지 임박하였다. 정부는 청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은 조선에 출병하였다. 전부터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조선으로 출병했다. * 동학은 종교의 일종으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여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풍습을 파괴한다며 기독교(서학)에 반대했다. 이 해의 간지가 갑오에 해당하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또 동학의 난이라고도 한다.
일ㆍ청전쟁 (206-207쪽) 일ㆍ청 양국이 출병했을 때 농민군은 외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정치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휴전하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 등이 중립을 지키겠다는 확약을 하자 단독으로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강요했다. 그리고 일본은 회답이 불만이라며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했다. 이어 청의 해군을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청전쟁을 시작했다.
일ㆍ러전쟁과 전쟁의 추이 (224쪽)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츠시마의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조선 남부의 토지를 조차했다. 그대로 묵시하면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했다. (일본)정부는 더 늦기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의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고, 관동주(關東州)의 조차권을 취득하고,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양도받았다. 일ㆍ러전쟁은 일본의 생사를 건 장대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에 승리하여 자국의 안정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 막 태어난 유색인종국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세계의 억압된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주었다.
일본서적(日本書籍)
일ㆍ러전쟁-전쟁시작 (210-211쪽) 일ㆍ영동맹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을 서둘러 일본과 전쟁에 대비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둔다는 교섭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있었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아 전쟁의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에서는 군비가 증강되고 신문이나 잡지 대다수가 러시아와 개전을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도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반대를 외쳤다. 1904년 일본은 조선의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러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병합 (242쪽)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 모두가 지배를 원했으나 실제로 통치를 유지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지배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다른 나라가 차지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지역에 대하여 통치자로서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 있어 좋은 상황이었다. 일ㆍ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한국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실행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고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심한 저항도 일어났다.
일본서적(日本書籍)
한국병합 (217쪽) 일ㆍ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라는 관청을 두어 경찰과 내정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조선의 민중은 무기를 들고 각지에서 봉기하여 의병운동 등을 일으키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일본은 군대로 이를 진압하였다. 1909년 초대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에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 서울을 경계하는 가운데 한국의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는 조약에 조인토록 함으로써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를 한국병합이라고 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218쪽)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기로 하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 개의 팔뚝이 돌출되어 있다. 그것이 한반도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항상 들이밀고 있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었다.
후소샤 (扶桑社)의 검정통과본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동아시아의 지도를 살펴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으로부터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그것이 한반도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을 공격하는데 꼭 알맞은 기지가 될 것이고, 후배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주한 일본대사관 제공자료)
일본 역사왜곡 실태
일본 역사왜곡 실태
야마토 조정의 외교정책 - 한반도의 움직임과 일본(37-38쪽)
고구려는 반도 남부의 신라와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는 야마토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 일본 열도 사람들은 전부터 철자원을 찾아 한반도 남부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4세기 후반, 야마토 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차지했다. 후일 일본의 역사서에서 여기에 두어졌던 일본의 거점을 임나일본부라 불렀다.
조공 (38쪽)
고구려는 남하정책을 취하였다. 바다를 건넌 야마토 조정의 군대는 백제와 신라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문에 4세기말부터 5세기초의 사건으로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반도남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백제와 임나를 기반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정복은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조선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다
(32-33쪽)
중국에서는 4세기경부터 유목민족이 북부로 침입해왔기 때문에 한(漢)민족의 지배자들은 남쪽으로 도망을 가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국가간의 싸움이 계속되었다(남북조시대). 중국이 분열하자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북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남부에는 작은 국가들을 통일한 백제·신라 2국이 일어났다.
야마토 국가는 백제와 소국(小國)이 분립하고 있던 가라(加羅 ; 任那)지방의 국가들과 결탁하여 고구려·신라와 싸웠다.
5세기에는 야마토 국가의 대왕이 왜국의 왕으로서의 지위와 조선 남부를 군사적으로 지휘하는 권리를 중국의 황제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의 남조에 여러번 사절단을 보냈다.
조선 출병 (123쪽)
1세기 만에 전국의 통일을 이루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의기는 왕성해졌다. 히데요시는 다시 중국의 명(明)을 정복하여 천황과 자신이 거기에 살고 동아시아에서 인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1592년 15만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끼나가 등의 무장이 거느린 일본군은 곧바로 수도인 한성(현재의 서울)을 함락하고 조선 북부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조선측의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의 활동과 민중의 저항이 있고 명나라 장군도 있어, 전쟁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명과 평화교섭을 위하여 병사를 철수했다.
두 번에 걸친 출병의 결과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이 현저히 황폐해졌다. 명도 일본과의 전투로 쇠퇴하였으며 토요토미가(家)의 지배도 흔들렸다.
일본서적(日本書籍)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122쪽)
자신의 세력을 외국에까지 뻗치고자 생각하고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 통일을 완수하자 명의 정복을 계획했다. 히데요시는 1592년 그 통로가 되는 조선에 군대 15만명을 침입시켰다. 일본군은 곧 한성(현재의 서울) 등을 점령하였고 명의 국경 가까이까지 공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의 민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드디어 수군의 힘도 증강되고 명의 원군도 있어 일본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휴전하고 강화(講和)에 관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지 않았으므로 히데요시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으나 히데요시가 병사했으므로 전군이 후퇴함.
쇄국 하의 대외관계 (133쪽)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절 대마도(對馬)의 종(宗)씨를 통하여 히데요시의 출병으로 단절되어 있던 조선과 국교를 회복하였다. 양국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조선으로부터는 장군이 바뀔 때마다 통신사라 부르는 사절이 에도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았다. 또 부산에는 ‘종(宗)씨의 왜관(倭館)’이 설치되어 약 400-500인의 일본인이 살면서 무역과 정보수집에 종사하였다.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218-219쪽)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동경서적(東京書籍)
동아시아의 정세 (213쪽)
메이지 10년대의 일본에서는 민권론자들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 제국에서 민권의 신장과 독립을 기대하면서 아시아 제민족과 연대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는 조선에 진출하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도 위험하다며 대외팽창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한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 국내에서는 메이지유신을 배워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개혁파와, 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파의 대립이 격렬해졌으며, 일본은 청에 대항하기 위하여 군비증강을 꾀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220쪽)
1894년 조선의 남부에 동학의 난(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서학)에 반대하는 종교(동학)를 신앙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추방을 목표로 하여 한 때는 수도 한성에 육박하는 기세를 보였다.
일ㆍ청전쟁 (218-220쪽)
청은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고 하여,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돕기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 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1882년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 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청은 이에 편승하여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곧바로 폭동을 진압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김옥균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 때도 청의 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탄압했다(갑신사변).
약간의 병력밖에 보유하지 못한 조선은 청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고 일본도 갑신사변후 청과 합의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서적(日本書籍)
갑오농민전쟁 (206-207쪽)
1894년 조선에서는 일본과 구미제국의 진출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동학*을 신앙하는 농민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갑오농민전쟁). 농민군은 화승총이나 창 등을 손에 들고 외국세력의 축출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각지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서울)에까지 임박하였다. 정부는 청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청은 조선에 출병하였다. 전부터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은 이 소식을 접하자 곧바로 조선으로 출병했다.
* 동학은 종교의 일종으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여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풍습을 파괴한다며 기독교(서학)에 반대했다. 이 해의 간지가 갑오에 해당하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또 동학의 난이라고도 한다.
일ㆍ청전쟁 (206-207쪽)
일ㆍ청 양국이 출병했을 때 농민군은 외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정치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휴전하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 등이 중립을 지키겠다는 확약을 하자 단독으로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강요했다. 그리고 일본은 회답이 불만이라며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게 했다. 이어 청의 해군을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청전쟁을 시작했다.
일ㆍ러전쟁과 전쟁의 추이 (224쪽)
러시아는 만주의 병력을 증강하여 조선 북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츠시마의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조선 남부의 토지를 조차했다. 그대로 묵시하면 러시아의 극동 군사력은 일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강되는 것은 명확했다. (일본)정부는 더 늦기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할 결의를 굳혔다.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조선)의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았고, 관동주(關東州)의 조차권을 취득하고,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양도받았다. 일ㆍ러전쟁은 일본의 생사를 건 장대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에 승리하여 자국의 안정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 막 태어난 유색인종국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세계의 억압된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주었다.
일본서적(日本書籍)
일ㆍ러전쟁-전쟁시작 (210-211쪽)
일ㆍ영동맹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완성을 서둘러 일본과 전쟁에 대비했다. 만주는 러시아에, 조선은 일본의 지배하에 둔다는 교섭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있었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아 전쟁의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에서는 군비가 증강되고 신문이나 잡지 대다수가 러시아와 개전을 주장했다. 그런 가운데 기독교도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반대를 외쳤다.
1904년 일본은 조선의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한 후 전쟁을 선포하여 일ㆍ러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병합 (242쪽)
한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 모두가 지배를 원했으나 실제로 통치를 유지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지배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다른 나라가 차지하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지역에 대하여 통치자로서 신흥국 일본의 등장은 3국에 있어 좋은 상황이었다.
일ㆍ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한국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었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실행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고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심한 저항도 일어났다.
일본서적(日本書籍)
한국병합 (217쪽)
일ㆍ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국통감부라는 관청을 두어 경찰과 내정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조선의 민중은 무기를 들고 각지에서 봉기하여 의병운동 등을 일으키고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일본은 군대로 이를 진압하였다. 1909년 초대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에는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 서울을 경계하는 가운데 한국의 황제가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을 일본에 위임하는 조약에 조인토록 함으로써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를 한국병합이라고 한다.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218쪽)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기로 하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 개의 팔뚝이 돌출되어 있다. 그것이 한반도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항상 들이밀고 있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었다.
후소샤 (扶桑社)의 검정통과본
한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동아시아의 지도를 살펴보자, 일본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해 대륙으로부터 팔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그것이 한반도이다. 한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을 공격하는데 꼭 알맞은 기지가 될 것이고, 후배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주한 일본대사관 제공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