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miths - Heaven knows I

김선구2006.11.06
조회118
the smiths - Heaven knows I

4~5년쯤 전인가?

취업을 앞두고 우울함에 빠져있던 중
EBS의 어느 음악 관련 프로에서 우연히 접한 the smiths의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


뿔테안경을 쓰고 취한듯 노래를 부르는 모리세이의 모습에
홀딱 반해서 한동안 이 음악 찾는다고 틈만나면 소리바다를 뒤졌다..


지금은 가사도 외우고 다닐만큼...

전에 신청했던 곡인데

이제야 싸이에 올라오게 되서 다시 올린다...



THE SMITHS



해외에서 왜 모리세이(Morrissey)와 자니 마(Jonny Marr)의 이름이 그토록 비중있게,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보통명사의 하나인 지, 또 손쉬운 비교 대상이자 평가 도구인 선례로서 취급되고 있는 지를 아마 국내에서는 거의, 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스토리가 그들이 스미스(The Smiths)를 통해 스스로를 노출했던 80 중반에 국내에서도 마땅히 동시대의 현상으로서 경험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던 과거에 기인한다.

때마침 95년 8월에「Vauxhall & I」의 뒤를 이은 새 앨범「Southpaw Grammar」를 내놓은 모리세이의 행보는 여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기에 이 글은 그 기회를 충분히 이용해 먹을 생각이다. 이번은 그 전(前)편으로, 꽃과 소년과 사춘기의 나날, 스미스 스토리이다.

글:성문영






"스미스가 펑크의 신음소리에 대한 섬세한 '미(美)와 매력'의 대답이었다고요? 그럼 우리가 포크 그룹이었단 소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미스는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표현 그 자체로, 폭력적인 존재였습니다."-94년 4월, 모리세이

"정말 까놓고 말해, 우리는 지금 매우 분노하고 있다. 음악 업계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팝 음악에 대해 굉장히 분노하고 있다."-85년 3월, 모리세이




디스코 텍을 불태우자/ 저 축복받은 디제이를 교수형에 처하자/ 왜냐고? 저들이 쉴새없이 틀어대는 저 노래들에/ 내 이야기는 하나도 없잖느냔 말야/ 우리가 실수로 넘어지는 리즈市의 인도(人道)에서/ 우리가 조깅을 하는 평화로운 시골 지방의 도시들마다/ 디제이를 매달아라/ 디제이의 목을 밧줄로 감아라/ 디제이를 교수형에 처하라 -The Smiths,




예전 외지(外誌) 디테일스(Details)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음악 관련 앙케트중 '80년대의 밴드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의 결과에서 스미스는 10위권에 뽑힌 이름중 유일하게 국내에 낯설게 받아들여질 이름이었다. 또 얼마전 얼터너티브 프레스(A.P.)가 창간 10주년 기념호에서 지난 10년간의 베스트 앨범 99선을 뽑은 자리에서, 스미스의 「The Queen Is Dead 」는 너바나의 「Nevermind」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여기엔 모리세이의 솔로 앨범 「Your Arsenal」도 67위에 올라 있었다.)적지 않은 수의 영국 밴드들이 자국인 영국에서보다 미국에서 먼저 인기를 얻고 그다음 역수입되는 경우가 있지만 스미스의 경우는 그 반대의 지극히 영국적인 밴드로서, 그런 결과들을 얻은 것은 상당한 실적이라 할 수 있다(상기된 두 잡지는 모두 미국산). 80년대의 씬, 그것도 펑크 이후의 혼란하고 다양한 세력들의 포스트 펑크(Post-Punk)를 논하는 자리에서 스미스는 월계관을 쓸 자격이 충분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는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고/ 마침내 일자리를 구했어/ 그리고 지금 나의 이 비참한 심정은 아무도 모를 거야/ 내 인생에서/ 내가 죽든 살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들에게/ 난 왜 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The Smiths, .




영국 서북부 맨체스터의 가난한 집에서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를 위시한 셀 수 없을 양의 책들에 파묻혀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낸 청년 모리세이(Morrissey, 보컬과 가사)는 그 덕에 얻은 엄청난 근시때문에 두꺼운 뿔테 안경(NHS)을 쓰고서 제임스 딘(James Dean)에 대한 강력한 애정을 담은 'James Dean Is Not Dead'란 제목의 소책자를 쓰거나, 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팬클럽을 만들어 그들 앨범의 부클릿을 쓰거나, TV를 통해 방영되는 여러 가지 60년대 유명/비유명 필름들에 넋을 잃고 빠져들거나, 대중 음악 저널리스트의 꿈을 지닌 채 레코드 미러(Record Mirror)誌에 레코드평을투고하게나, 자신의 조그만 노트에 직접 지은 노래 가사들을(물론 가엾은 이 시들이 자니 마의 멜로디를 얻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계속 적어나가고 있던, 무언가 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은 바램은 있으되 그것이 현실적인 어떤 확실한 박차를 얻지 못한 상태에 있던, 섬세하고 내성적인 문학과 키취(kitsh) 중독의 결합체였다.


그의 비정상적인 '외부와 단절된' 비사교적/비사회적 상황은 이런 어린 시절부터 단단히 쌓여 온 그 자신의 생태계와도 같은 것이어서, 자니 마(Jonny Marr, 기타와 작곡)가 그의 집을 찾아와 '같이 해 보자'며 마침내 그를 세상으로 끌어내기 전까지 모리세이는─물론 그전에 다른 밴드 재적 경험이 짧은 몇개월 동안 있긴 했지만─자신만의 성(城)을 굳건히 지켜 왔다.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기념물같은 젊은이었다.


그런 그가 자니 마와 송라이팅 파트너쉽을 이룬 뒤 스미스라 이름을 채 생각해내기 훨씬 이전부터 스미스의 곡들이 될 노래들을 공작(共作)해 나간 지 양 반 년. 그들은 마이코 조이스(Mike Joyce, 드럼)과 앤디 러크(Andy Rourhe, 베이스)를 확정된 라인업으로 해여 모리세이가 만든 이름을 따라 밴드 스미스(The Smiths)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폴(The Fall)이나 아즈텍 카메라(Aztec Camera)가 거친 것으로 유명한 인디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그들은 싱글과 앨범, 공연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약간의 뜸을 들이는 데 소요되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그들은 데뷔 직후 급속도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 싱글 이후 과 관련한 시끄러운 논란(아동학대가 묘사된 곡이 아니냐는)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스미스의 이름만 유명하게 해 준 격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데뷔 앨범「The Smiths」와 후속 싱글들 및 가 곧바로 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차트와 판매고에서 위력을 과시한 데서 입증되었다. 곧 모리세이는 스스로 오갈 데 없이 고독하다고 믿는 수많은 동류의 젊은이들을 나포하기 충분한 'misery' 주조의 가사들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 그리고 못말리는 허풍/ 그 버릇이 다시 발동했고/ 이런 나는 아예 인류와 더불어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자격조차도 없는 사람이다─The Smiths,




이 무렵 스미스는 점차 자니 마의 곡들만큼이나 모리세이의 비범한 캐릭터로 더욱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이 조용하고 수줍던 젊은이는 일단 자신이 몸담은 밴드 스미스에 관한 화제에 대해서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한 자세로, 또한 인터뷰어를 교묘히 갖고 노는 달변(거기에 궤변도 얼마간)으로 그룹과 자신을 변호하는, 놀라운 대변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과거 칩거(?) 시절 책들에서 얻은 자양과 갖가지 인디/언더 영화들 및 팝 음악 전반에 대한 두터운 지식을 토대로─스미스 시절과 현 솔로 시절 앨범 재킷의 아트워크는 거의 모두 모리세이, 혹은 모리세이 위임의 대리자가 주도한 것으로, 영화와 문학, 사진 등 그의 이 키취 취향을 십분 발휘한 독자적 퍼스낼러티로 인정받고 있다─그는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그 어떤 비난이나 주제에 대해서든 회피없이 받아넘겼고 그 발언들을 센세이션으로 채웠으며 여기에는 자신의 오랜 채식주의 노선과, (가사들로 인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그 자신의 섹슈얼러티에 대한 대답인) 결코 여자도 아이도 미련두지 않는다는 독신주의 소신 피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섹슈얼러티에 관한 논란은 데뷔 시절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스미스 시절부터 지금 솔로의 모리세이 곡에 이르기까지 모리세이가 쓴 러브송들은 그래서 어딘지 항상 일말의 교묘한 동성애의 단서를 숨기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으며, 이 점은 모리세이 트레이드마크의 주제 '사랑받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고독한 영혼'과 함께 스미스의 주요한 두 가지 내용상의 기저가 되어 왔다. 스미스의 첫 싱글 가 이미 "보통 사람들이 보고 비웃을('The good people laughs (at us)')" 비정상의 관계를 암시하는 러브송이었지만, 말 그대로 거부할 수 없는 '차밍함'의 멀로디를 타고 찰랑찰랑 흐르는 스미스 제1의 고전 (에코벨리의 글렌 요한슨으로 하여금 당장에 짐을 싸 스웨덴에서 런던으로 건너오게 했던 바로 그 곡)은 펑크난 자전거를 매개로 분방하고 배려없는 사춘기 소년과 섬세한 감수성의 청년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 곡으로, 지극히 암시적이고 은밀한 호모 섹슈얼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이는 곧장 사가를 쓴 모리세이 자신의 섹슈얼러티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한 확실한 대답은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이후 그들을 덮친 또 하나의 사건은 이었다. 이 곡은 자니 마와 모리세이가 초기 송라이팅 파트너를 굴릴 때 만들었던 스미스 이전의 넘버였고, 63년부터 65년 사이에 모리세이의 거주지 맨체스터에서 있었던 무어(moors, 맨체스터에 흔히 보이는 낮은 구릉들의 황야 지대) 살인 사건에서 내용을 얻은 것이 분명한 이 곡엔 그 당시 휘생되었던 세 명의 아이들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고 있었고 이에 유가족들은 모리세이를 '비참하게 죽은 아이들을 팔아 노래를 만든' 파렴치한으로 격렬히 비난했으며 이 곡이 수록된 「The Smiths」는 몇 군데 레코드점에서 보이코트를 당했다. 그러나 유가족중 일부가 모리세이의 bus에 서서 변호함으로 인해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이후 이 소동은 스미스의 이름과 함께 늘상 따라다니는 중요한 사건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의 눈속에서 이 사랑을 확인하고도/ 왜 사람들은 우리를 믿지 못할까/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믿으려 하지 않는 걸까/ 그럼 이렇듯 우릴 지금 믿지 못하겠다면/ 도대체 그들이 우릴 믿어 줄 때가 앞으로 언제 온다는 걸까―The Smiths,




이윽고 모리세이의 '비참주의' 사춘기 철학은 바야흐로 빛을 발해, 지극히 자전적인 와 역시 뭔가 비범한 느낌의 구애 넘버 이 모두 차트 직행으로 달음질했고, 이에 덩달아 레코드사에서 얼씨구나 급조한 각종 비정규 녹음 모음집「Hateful Of Hollow」도 '잘' 팔렸다. 84년에 「Meat Is Murder」와 함께 나온 는 스미스 또하나의 걸작으로, 이미 영국내의 베스트 밴드로 입지를 굳힌 스미스의 위상을 반증하고 있었다. 이 무렵 스미스는 거대한 추종자군의 흠모를 받는 어떤 '상징'이었으며, 이 상징은 그들의 라이브에서 일종의 증후군의 형태로 잘 나타났다. (물론, 어느 밴드나 그 추종자들 사이에서 신념으로 받아들여지는 특별한 공감대 형성 형태가 있을 수 있으며, 고로 이 현상이 꼭 스미스만의 독점적 특질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모리세이의 투어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는 포옹의 행렬―끊임없니 무대 점령을 노리는 관객들의 연이은 모리세이 및 멤버들을 향한 껴안기 시도들, 수틀리면 옷도 찢고 그 위를 덮쳐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어 버린다―외에도, 모리세이의 스타일을 따라 굵은 뿔테 안경 아니면 보청기를 착용하고, 머리를 한껏 세우고, 긴 구슬 목걸이를 건 채, 글라디올러스와 수선화를 비롯한 각종 꽃다발을 들고 공연장을 찾는 사람은 누구건 확실한 스미스의 팬임에 틀림없었다. 모리세이 자신이 공연 무대가 꽃으로 장식되길 원했고("왜냐면 오스카 와일드가 꽃을 각별히 사랑했기 때문이죠"), 바지 뒷주머니에 꽃을 꽂고 노래했으며, 팬들이 무대위로 던지는 꽃다발 세례를 피학적으로(나르시스트적으로) 즐겼다. 영국의 유명 팝 프로 'Top Of The Pops'에 출연했을 때의 그는 평소 버릇대로 '팝 씬에 대한 패러디이자 고차원적 예술'의 의도로써 청바지 뒷주머니에 하나가득 흙덩이와 나뭇잎,덤불가지를 쑤셔넣고 등장했었다.


물론 그 사이 항상 넘버원의 인기였던 것만은 아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