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잠옷

윤자연200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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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뒷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석탄을 나르시는 모습을 나는 종종 집 안에서 지켜보았다. 그 열일곱 개의 계단을 어머니는 대개 세 차례씩은 오르내리셔야 했다. 하지만 창문 앞을 지나치실 땐 잊지 않고 나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그때가 내 나이 아홉 살 무렵이었다. 비록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와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우리 아버지는 내가 두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끔씩은 석탄을 집 안으로 들여다 줄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직장에서 돌아오시기 전에 나 혼자서 석탄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다. 사실 그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별 생각 없이 바구니에 석탄을 담고 두 손을 바구니를 들었다. 읍! 석탄 바구니가 그렇게 무거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낑낑거리며 그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다가 나는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힘들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어머니의 짐을 덜어 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열 세살 되던 해 연말, 나는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되었다. 시내 백화점의 포장 코너에서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게 된 것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었지만 한 시간에 23센트를 벌기 위해 나는 열심히 일했다. 월급은 크리스마스 직전에 받기로 되어 있었다. 드디어 나도 경제적인 능력(?)이 생긴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기운을 북돋워 드릴 수 있는 선물을 찾아 나는 아르바이트 일이 끝난 저녁이면 백화점 구석구석을 기웃거리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 진열장 안에서 어머니에게 꼭 어울리는 물건을 발견했다.

녹색 비단 잠옷.

그 옷을 걸치고 있는 마네킹은 어머니와 키가 비슷했다. 그 환히 빛나고 있는 얼굴에서는 잔주름도 피로도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그 잠옷을 걸치면 그동안 쌓인 피로를 잊은 채 그 마네킹처럼 황하게 웃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드디어 내가 원하던, 또 어머니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였다. 얼마냐고 물었다.

"25달러 95센트."

1950년도에, 그것도 열 세살짜리 아이에게 '25달러 95센트'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과연 크리스마스 전까지 내가 그만한 돈을 마련 할 수 있을까? 설사 돈을 준비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사이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잠옷을 먼저 사가지 않을까?

그날 이후,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나는 곧바로 진열창 앞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잠옷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나는 월급을 받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돈을 세어 보았다. 27달러 13센트! 나는 곧장 잠옥 가게로 달려 들어갔다.

"진열창에 있는 저 예쁜 잠옷 주세요! 저 돈 있어요!"

숨이 턱에 차서 헐떡거리며 외쳐 대는 나를 여종업원은 웃으면서 맞아 주었다. 나와 우리 어머니를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여자였다.

"매리언, 좀더 실용적인 선물을 해 드리는 게 어떻겠니?"

그녀의 충고에 나는 대뜸 머리부터 흔들어 댔다. 그녀의 친철한 충고의 의미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또 이해하기도 싫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내 결심을 흔들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잠옷은 우리 어머니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아무도 사 가지 못하도록 하느님이 지켜 주셨고 그동안 나는 돈을 마련했다.

여종업원이 마네킹에서 잠옷을 벗겨 내는 모습을 나는 황홀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선물 상자를 꺼내는 동안 그 옷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그 보드라운 촉감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크리스마스 아침. 나는 어머니가 그 상자를 풀어 보기만을 절실히 바랐다. 드디어 어머니가 상자 뚜껑을 열고 안의 물건을 확인한 순간 놀라움과 기쁨으로 어머니의 입술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었다.

"오! 매니! 너무나 예쁘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잠옷은 처음 본다. 네가 어떻게 이런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날 어머니는 그 잠옷을 입은 채 아침을 준비하였다. 기르고 하루종일 그 선물이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내게 되풀이하셨다. 물론 그날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머니의 자랑을 들어야만 했다. 세월이 흘러 그 잠옷이 다 낡아 버린 뒤에도 어머니는 이따끔씩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으셨다.

어머니는 정말로 그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 잠옷이 어머니의 힘든 나날을 어느 정도 보상해 주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그 비단 잠옷을 챙겨 입으셨고, 우리는 벽난로 앞에 마주 앉아 라디오도 듣고 얘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어머니한테 필요한 것은 그 여종업원 이 얘기한 '좀더 실용적인' 스웨터나 부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녹색 잠옷이 매일 저녁 어머니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저녁, 어머니가 우리 집을 찾으셨다. 세상을 감싼 즐거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그즈음 가족들 건사하는 고단함이 어느새 내 얼굴에 잔주름으로 잡혀 가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은 함성을 올리며 자신들의 선물 포장을 마구 찢어 댔다. 또 한 가지 일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심드렁하게 지켜보는 나에게 어느 순간 어머니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하나 내미셨다.

"메리 크리스마스, 매니!"

어머니는 당신을 위해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뜯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내가 그 상자의 포장을 벗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 상자의 뚜껑 연 순간, 숨이 막혀 왔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황금빛 잠옷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었다.

"이렇게 예쁜 옷이...... 이런 건 나 같은 사람이 입을 옷이 아닌데......"

나는 눈물로 어른거리는 눈길을 아래로 떨구어 내가 입고 있던 낡은 실내옷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낡은 실내복을 벗어 버리면서 나는 그동안의 고단함과 불만도 함께 벗어 버렸다. 마침내 그 황금빛 잠옷을 몸에 걸친 순간 나는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야! 우리 어머니 봐! 너무 예쁘다!"

환히 빛나는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옛날, 그 녹색 잠옷이 오롯이 기억 속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역시 그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것을 어머니의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에게 그 잠옷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어머니는 잘 알고 계셨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 선물이 지닌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